•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3) 개화파의 활동
  • (9) 근대학교의 설립(1883)

(9) 근대학교의 설립(1883)

개항 후 신지식의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자 근대적 신식 학교의 설립도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개항장 원산에서는 처음에 개량서당을 설립하여 자제들을 교육하다가 1883년 봄에 개화파관료인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 鄭顯奭과 원산의 민간인들이 합작하여 근대학교로서 元山學舍를 설립하였다. 원산학사는 설립 후 운영에 성공하자 정현석이 무예반의 자격인준 때문에 1883년 8월 28일자로 정부에 보고를 올렸으며, 정부는 10월 20일 이를 승인하였다.063) 愼鏞廈,<우리나라 最初의 近代學校設立에 대하여>(≪韓國史硏究≫10, 1974) 참조.

이 학교는 당시의 긴급한 필요에 따라 학생을 문예반과 무예반으로 나누고, 정원을 처음에는 문예반 50명, 무예반 200명으로 하였다.064)≪春城府志≫, 興學 참조. 교육과목은 공통과목으로서 時務의 긴요한 과목으로 산수·물리로부터 각종 기계기술·농업·양잠·광산채굴 등을 가르쳤고, 특수과목으로서 문예반은 經義를 무예반은 병서와 사격술을 교육하였다.065)≪德源府啓錄≫1책, 고종 20년 8월 28일. 교재로서는 처음에는 ① 瀛志, ② 聯邦志, ③ 奇器圖說, ④ 日本外國語學, ⑤ 法理文, ⑥ 大學豫備門, ⑦ 瀛環志略, ⑧ 萬國公法, ⑨ 心史, ⑩ 農政新編 등이 사용되었다. 교육기간은 처음에는 1년을 단위로 했으나 뒤에 소학교 기준으로 연장되었다.

원산학사를 설립할 때에는 원산의 민간인 118명이 개별적으로 도합 5,325냥을 출재했으며, 원산주민들이 의무적으로 240냥을 갹출했고, 매년 200냥의 경비를 보조하기로 하였다. 같은 때에 설립된 원산상업회의소도 50냥을 보조하였다. 개화파관료로서는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 정현석이 100냥, 서북경략사 어윤중이 100냥, 승지 鄭憲時가 100냥 등 도합 300냥을 기증하였다. 원산해관에 고용되어 있던 외국인들도 이에 찬동하여, 중국인·영국인·미국인·덴마크인 각 1명이 도합 760냥을 찬조하였다.066)≪春城府志≫, 興學 참조. 외국세력과 직접 부딪치는 개항장에서 자발적으로 국민들과 개화파관료들이 단결하여 1883년에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를 설립한 것은 큰 의의를 가진 일이었다.

또한 1882년 서울에서는 군국기무아문 안에 영어학교로서 통역관 양성을 위하여 同文學이라는 학교를 설립하였다.067) 金允植,≪陰晴史≫하, 고종 19년 11월 21일(224쪽 참조). 동문학은 어학도 약 40명을 선발하여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서 영어·일본어·서양산수 등을 교육하였다. 학도들의 학용품·교재·기숙시설은 통리기무아문에서 공급하였다. 동문학은 처음에는 영어교사를 구하지 못하여 중국인 교사를 채용했다가 1883년 7월 영국인 핼리팩스(T. E. Hallifax, 奚來百士)를 고빙하여 본격적으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068)≪漢城旬報≫15호, 1884년 12월 22일.

1883년 일반학교로서의 원산학사와 영어학교로서의 동문학의 설립은 개화파들에 의하여 근대적 신식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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