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3) 개화파의 활동
  • (10) 근대신문의 발간(1883)

(10) 근대신문의 발간(1883)

개화파들은 1880년대에 들어서자 박영효를 중심으로 신문 발간을 주창해 오다가 그가 한성판윤에 임명된 1883년 1월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 박영효는 유길준에게 신문의 발간업무를 맡겼으며 후자는 漢城府新聞局章程과 創刊辭와 창간호에 실릴 원고까지 준비했으나, 전자가 수구파의 미움을 받아 광주유수로 좌천됨으로써 이 신문의 발간계획은 중단되었다.069)≪兪吉濬全書≫4권, 漢城府新聞局章程 및 創刊辭 참조.

신문 발간계획을 이어서 인계받은 것은 김윤식이었다. 그는 신문 발간을 통리기무아문에서 실행하고자 하여 신문 발행부서로 博文局을 신설하고 그 책임자로 金寅植, 편집부원으로 張博·吳容黙·金基駿 등을 임명했으며, 번역부원으로 일본인 이노우에(井上角五郎)를 고용하였다.

박문국은 김인식의 책임하에 1883년 10월 1일(양력 10월 30일)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인≪漢城旬報≫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신문의 체제는 가로 25㎝ 세로 9㎝ 크기의 8면에 달하고 10일 만에 1호씩 발행되어 오늘날의 잡지 비슷한 체제였다. 내용은 순한문을 사용하고 정부소식의 ‘內國記事’와 외국소식의 ‘各國近事’와 개화교양을 위한 ‘解說記事’로 신문을 편집하였다.070) 李光麟,<漢城旬報·漢城周報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38, 1968).
趙恒來,<韓末新聞의 發達과 論調에 관한 고찰>(≪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鄭晋錫,<漢城旬報·周報에 관한 연구>(≪新聞硏究≫36, 1983).
≪한성순보≫는 창간 후 1호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10일마다 1호씩 발간되다가 1884년 10월 17일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파괴되어 신문 간행이 중단되었다.

≪한성순보≫의 발간은 관리들과 국민들에게 세계정세와 국내사정의 변화를 상세히 알게 하고 나라를 개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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