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2. 개화사상의 발전
  • 3) 급진개화파의 개화사상

3) 급진개화파의 개화사상

19세기 지식인이라면 위정척사파는 물론 개화파들도 대부분 소년기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서당이나 서원·향교 등의 교육기관에서 유학교육을 받았다. 따라서 급진개화파도 기본적으로 유학에 소양이 있었으니, 김옥균의 경우에도 그가 일소해 버리려고 한 것은 부패한 기득권층이었지, 유학 그 자체는 아니었다.

급진개화파란 1880년대 주로 서양과 일본의 앞선 문화를 수용하려고 했던 일군의 정치가들이다. 바로 김옥균·朴泳孝·洪英植·徐光範 등이 그 핵심세력이다. 홍영식은 영의정 洪淳穆의 아들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3년 7월 報聘使의 민영익과 함께 미국에 사절로 파견되어 미국의 정치·교육·국방·농업·상공업·전신·우편제도 등 제반 선진문물을 견문하고 귀국, 복명문답기를 남겼다. 사실 1880년≪조선책략≫의 도입을 계기로 조선정부의 대미인식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2년 미국과 최초로 수교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홍영식·서광범·유길준·邊燧 등은 미국 각지를 직접 둘러보고 와서 미국이 세계 최대의 부강국인 동시에 선진 문명국가임을 확인했던 것이다.106) 金源模,≪韓美修交史≫(철학과 현실사, 1999). 그런가 하면 김옥균·박영효 등은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일본을 ‘동양의 영국’이라고 하면서 너무 부러워하고 홍영식과 짝이 되어 중국을 배척하고 서양을 존중하는 ‘排華尊洋’론을 주장하면서 말할 때마다 自主를 일컬었다.107) 金允植,≪續陰晴史≫하, 追補陰晴史(國史編纂委員會 편, 1960).

급진개화파는 청국과의 종속적인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완전한 자주독립을 지향하고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그 개혁의 모델로 삼았다. 그리고 집권층인 수구정치세력과 대결하여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급진적인 변법을 추구하였다. 여기서 변법이란 유교정치의 기본 틀인 군주제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서양의 정치제도까지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급진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 때 제시된<甲申政綱>에서 중국과의 전통적 사대관계를 끊고 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공포하였다. 급진개화파는 임오군란 때 청국이 흥선대원군을 保定府로 강제 납치해 간 것에 대해 자주독립국가로서 너무나 부끄럽고 욕된 사건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정책과 적극적 간섭정책의 굴레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 동안 전통적으로 이행하여 오던 朝貢을 폐지할 것을 선포하였다.108) 金玉均,<甲申日錄>(≪金玉均全集≫, 亞細亞文化社, 1979, 95∼96쪽).

급진개화파는 정치·사회개혁의 하나로 양반신분제도의 즉각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문벌이나 신분제도가 그 동안 사회적 불평등의 근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부패나 국가의 멸망까지도 초래할 수 있다는 견해에 근거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옥균은 갑신정변 뒤인 1885년에도 조선의 부국강병책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양반을 폐지하여 그 폐원을 없애 버리지 않는다면 국가의 폐망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였다.109) 金玉均,<池運永事件糾彈上疏文>(위의 책).

급진개화파는 전제군주제하에서 국왕을 모시고 대신회의를 하던 것을 없애고, 국왕을 배제하고 議政所에서 대신과 참찬끼리만 매일 일과로서 회의를 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이 회의에서 논의하여 먼저 결정한 다음에 국왕에게 아뢰어 정령을 실시하고, 六曹 이외에는 국왕에게 의견을 아뢰어 전교를 받아 내는 모든 권력기관을 폐지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육조의 대신·참찬회의에서만 모든 안건을 회의·결정하도록 권력을 고위 관료에게 집중시키고 대신 국왕의 실질적 권한은 제한하였다.

급진개화파의 핵심인물인 김옥균은 조선의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大更張改革’을 주장하였다. 그는 ‘대경장개혁’을 통하여 정부를 개혁한 뒤에 군권을 높일 수 있고 민생을 보호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서도 정치·외교를 반드시 自修自强한 뒤에 이룰 수 있다고 보아, 당시 정부의 인물로서는 결코 자수자강을 할 수 없다고 여겨, 군권을 기울여 위태롭게 하는 무능한 무리를 다 쓸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10)金玉均,<朝鮮改革意見書>(위의 책, 111쪽). 여기서 김옥균이 군권을 높이려 했던 것은 우선 정변이 성공한 뒤 장차 양반신분제도를 폐지하는 등 ‘위로부터의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군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옥균은 하루빨리 자기 나라를 개화하기를 바라고, 그 개화를 위해서는 청년층에게 신지식과 과학기술교육을 실시하여 민지를 개발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청년층을 교육하는 방법으로서 우선 유학생파견을 주장하여 해외에 청년유학생을 많이 파견하여 선진지식을 학습해 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11) 愼鏞廈,<金玉均의 開化思想>(≪韓國近代社會思想史硏究≫, 一志社, 1987), 221∼223쪽.

급진개화파의 한 사람인 박영효는 개화를 통하여 조선의 부국강병과 대외적 독립의 달성을 주장하고, 국가의 부강과 독립을 위해서는 정부가 ‘保民’과 ‘護國’에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 국제관계에 대해 “강자는 약자를 합하고 대국은 소국을 삼키고 있으며, 비록 만국공법이 있고 均勢公議가 있다고 하지만 나라에 자립자존의 힘이 없으면 반드시 영토가 깎이고 분열되어 유지하지 못하니 공법공의가 원래 믿을 바가 못 되는 것입니다”112)≪日本外交文書≫21권, 朝鮮國關係雜件, 朝鮮國內定ニ關スル朴泳孝建白書, 196쪽.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약육강식이 팽배한 당시 국제사회의 현실 속에서 ‘만국공법’이나 ‘균세공의’라는 것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하면서 조선의 대외적 위기를 천명하였다.

박영효는 나라의 부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군권을 감소하지 않고서 어찌 백성들로 하여금 當分의 자유를 누리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군권을 축소하고 민권을 신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113) 위와 같음(306쪽). 그는 모든 백성은 자유의 權이 있는데 군권이 定함이 있으면 민국은 길이 안정되나, 백성이 자유의 권이 없고 군권이 제한이 없으면 비록 잠시 강성한 날이 있더라도 오래지 않아 쇠망할 것이라 하였다.114) 위와 같음(309쪽).

박영효는 정부에 대해서도 우선 정부의 직분은 국민을 온당하게 다스리되 속박함이 없고, 국법을 굳게 지키되 뜻을 마음대로 함이 없고, 외국과 교제를 하되 신의를 중하게 여기는 것이라 하였다. 즉 박영효가 이해한 정부의 기능이란 어디까지나 백성의 자연권의 실현을 보장하며 안으로는 치안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세계 열강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지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한편 급진개화파는 호조에 의한 재정의 통일적 관할과 예산제도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갑신정변 당시의 개화파의 재정개혁의 기본 방향은 국가의 재정관리를 모두 호조로 통일하고, 호조 이외의 모든 재무관청을 혁파하여 예산제도를 실시하고 세입과 세출을 단일화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地租法과 조세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하여 세율을 내려서 법정화하고, 이서배의 농간과 탐관오리의 중간 착취와 부정을 제거하고자 하였다.115)개화파의 경제개혁은 조선 후기 이래 지주적 입장의 개혁노선을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즉 개화파는 모든 당시의 모순을 부세제도의 문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이서배들의 농간을 배제하고 탐관오리의 숙청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饒戶富民層을 보호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朱鎭五,≪19세기 後半 開化 改革論의 構造와 展開≫, 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5).

급진개화파는 갑신정변 이전에 상공업의 진흥을 역설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1883년 8월에 설립된 이래로 줄곧 어용 보부상을 보호하며 통제하고 있던 惠商公局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배경에는 혜상공국이 개화파의 개화활동을 저지하려는 민씨를 비롯한 수구파 정치세력의 정치자금과 물리력을 동원하는 온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권력의 비호를 받은 보부상은 이 혜상공국의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에게 많은 폐해를 끼치고 있었던 것이다.

급진개화파는 회사제도를 도입하여 근대적 산업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한성순보≫ 제3호에 수록된<회사설>은 주식회사와 합자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자본을 형성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회사가 제도적으로 서양 각국의 부국강병의 기초라고 생각하고, 하루빨리 회사제도를 도입하여 민간자본을 회사에 동원하여 업종별로 이를 전문화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김옥균은 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부국의 기초가 된다고 강조하고 철공업·기계공업·조선공업 등의 건설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공업을 발전시켜야 부국강병을 기할 수 있으며, 나아가 세계 열강과 경쟁할 수 있고 아울러 자력으로 자기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 자기 나라에 매장된 풍부한 광산자원을 개발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 개발을 의뢰하는 것을 개탄하면서 석탄광산의 개발에 큰 비중을 두었다. 김옥균뿐만 아니라 박영효도 상업과 공업을 일으키고 그 원리와 기술을 배워 익힐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김옥균은 각 나라의 정치 세목 중에서 우선 절실한 것으로 위생·농상·도로 세 가지를 들었다. 그는 ‘대경장개혁’의 한 부분으로 특히 ‘治道’ 즉 도로의 개선과 정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1880년대 초를 대경장의 기회로 보고 일본의 변법을 이야기하면서 오직 치도의 공에 효과를 크게 거두었다고 설명하면서, 아울러 위생과 농상의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治道略論>에서 중앙정부에 治道局을 설치하여 대신이 이를 관장할 것을 주장하고, 서울과 지방에도 치도를 위한 행정조직을 완비하되 서울에서는 한성판윤이 이를 관장하고 지방의 각 부에서는 면적과 인구의 크기에 따라 등급을 정해서 치도를 위한 행정기구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김옥균은 당시 조선이 개혁해야 할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위생을 강조하였다. 그는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어 번지는 원인으로 거처의 불결과 음식의 무절제와 의약의 미발달 등을 들었다. 그리고 위생의 요체로 청결과 의약의 발달을 들고, 국민의 보건과 위생을 위하여 국민이 생활하는 거처를 청결하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

박영효는 도로와 위생을 興農과 관련지어 설명하였다. 그는 당시 먼저 서둘러야 할 일이 흥농만한 것이 없다고 보고 흥농을 하려면 糞田을 해야 하고 분전을 하면 거리가 깨끗해지고 전염병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농법은 수송이 중요하고 수송을 하려면 치도를 해야 하고 도로에서 거마를 이용하면 10명의 노력을 1명이 할 수 있으니 9명은 기술자로 직업 전환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한편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사상을 지녔다. 급진개화파는 국민의 ‘교화’를 위하고 교육과 의료사업을 위해서는 선교사를 초빙하고 서양 종교의 포교를 승인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1884년 6월 24일에는 감리교회 선교사 맥클레이(R. S. Maclay)가 조선에 들어와 7월 3일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을 할 수 있도록 선교 허락를 받았다. 이제 정부를 포함하여 급진개화파든 온건개화파든 갑신정변 직전에는 모두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선교사의 조선입국과 기독교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김옥균 자신은 종교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어 국민의 ‘교화’를 위해서는 서양 종교의 유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맥클레이의 고종 배알을 주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스승 유홍기의 영향을 받아 불교에 호의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옥균이 불교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급진개화사상가 되었다거나116) 李光麟,<開化黨의 形成>(≪開化黨硏究≫, 一潮閣, 1973), 12쪽 참조. 김옥균이 급진개화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불교에 대하여 매우 적극적이고 긍정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117) 愼鏞廈,<金玉均의 開化思想>(≪東方學志≫46·47·48, 1985).는 것은 그의 종교에 대한 자유로운 태도를 보여준다. 또한 박영효는 미국뿐 아니라 문명한 나라들이 부강한 이유를 기독교의 교화에서 찾았다. 그는 인간은 종교 없이는 자립할 수 없고 정치를 하는 자는 종교를 제외하고서 많은 인민을 교육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동양제국이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으면 구미 각국과 같이 병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요컨대 급진개화파는 대내적으로는 양반신분제의 폐지와 문벌에 관계없이 유능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청국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하고 서양열강과 친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할 것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신문을 발간하여 백성을 계몽하고, 나아가 교육과 의료사업을 위해서 외국의 선교사를 불러들여 종교의 포교를 승인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상공업에 의한 국가재정의 확충과 광산의 개발을 도모하고 근대적 병력의 양성 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기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급진개화파의 개화사상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위축되었다가 갑오경장을 거쳐 독립협회에 의하여 계승되어 한 단계 더 발전하여 전개되었다. 개화사상의 발전과정에서 1890년대에는 일반 백성들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개화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드디어 갑신정변과 갑오경장 때 제시되었던 개화사상과 개화정책이 민중 속에 영향을 미치면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당시≪독립신문≫을 간행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던 徐載弼은 18세기 유럽에서 발달한 계몽사상의 천부인권설에 의거하여 사람은 누구나 이성을 지니고 있고, 태어날 때부터 자유와 평등의 생존권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118)≪독립신문≫2권 28호, 1897년(건양 2) 3월 9일. 서재필은 독립협회에 토론회를 도입하여 자기 나라의 정치·경제·사회 등 제반문제를 토론에 부쳤다. 그리하여 구체적으로 열강에게 이권을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는 반대운동을 벌였고, 국민의 인권과 재산권보호, 참형과 연좌법의 폐지, 그리고 국민의 언로를 넓히기 위해 의회를 설치해야 된다는 등의 개화운동을 벌여 개화사상은 점차로 민중 속에 번져 갔다.

1896년(건양 1) 4월 7일에 창간된≪독립신문≫에서는 민권의 신장에 목적을 둔 대중적 계몽지로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천명하였다. 이≪독립신문≫에서는 민권·법치주의·주권수호 등이 특히 강조되었다.≪독립신문≫이 발행된 지 3개월 뒤인 7월 2일에는 독립협회가 창립되었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개화사상은 사상의 내적 논리에서 보면 1880년대의 개화사상을 계승하면서 한층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제 독립협회의 개화사상은 자유민권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민족주의사상과 결합되어 나타났다.

그 특징으로서는 우선 국민자유권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생명과 재산의 자유권,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권을 주장하고 발전시켰다. 또한 국민평등권사상을 발전시켜서 사회신분제도의 폐지론뿐 아니라 남녀평등론을 체계적으로 정립, 발전시키는 여권운동이 대두되었다. 다음으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며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주권사상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국민주권론에 기초하여 국민참정권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국민의 직접적인 참정을 제도화하자는 주장을 하였다.119) 愼鏞廈,≪獨立協會硏究≫(一潮閣, 1976), 175∼214쪽.

독립협회는 당시 지방행정의 문란과 농민의 동요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농민들에게 ‘참정권’을 주어 일반선거제도에 의해서 지방관을 그 지방인민의 투표에 의하여 선출하게 하자고 제안하였다. 독립협회는 국민참정권사상을 지방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중앙정치에도 적용하여 의회설립을 주장하였다. 독립협회의 의회설립론은 종래 정부자문기관으로 설치되어 있던 중추원을 먼저 ‘上院’으로 개편하는 형식으로 입안되어, 1898년(광무 2) 11월 4일 의회설립법인<중추원신관제>가 공포되었다. 이 때 공포된 의회의 권한은 입법권, 조약비준권, 의정부에서 의결하고 상주하는 일체 사항에 대한 동의권, 칙명을 받고 의정부에서 자문하는 사항에 대한 동의권, 의정부의 임시건의에 諮詢하는 사항, 중추원에서 임의 건의하는 사항, 인민의 헌의사항 등의 심의결정권으로 되어 있었다.120) 위와 같음.

이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개화사상은 계몽사상의 성격을 띠면서 점차 민중 속에 번져 가기 시작했다. 독립협회의 개화사상도 당시에는 주로 도시민과 청년층에게 영향을 미친 정도였다. 그러나 개화사상이 지속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집권층도 일부 개화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여 1904년까지 자주적 근대화가 부분적이나마 시행되었다. 그 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개화사상은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는 위기 아래 전개된 애국계몽운동의 사상적 이념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는 문학·역사 등 신문화운동의 이념으로 발전하였으며, 그 후에도 줄곧 한국의 근대화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상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개화사상은 1850년대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1876년 개항 이후에는 정치세력인 개화파가 형성되었고, 1880년대에는 개화파가 추진한 개화정책의 이념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1880년대 초에는 전현직 관료나 일부 재야유생층은 동도서기론을 기반으로 하는 온건개화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아직 서양의 정치제도나 사상, 종교를 인정하는 급진개화사상은 김옥균·홍영식 등 소수 양반출신과 일부 청년지식인들만이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급진개화파는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정부의 권력으로 개화사상에 의거한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려고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정책은 다소 위축되었다. 그러나 온건개화파는 1886년 1월≪한성주보≫의 발행 등을 통하여 국민계몽과 교육사업 등을 줄곧 추진해 나갔다. 유길준이≪서유견문≫을 집필하는 등 개화사상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구체화시켜 나가기도 하였다. 1894년(고종 31)에 이르러서는 온건개화파가 다시 정치일선에 등장하여 개화정책의 추진에 참여하였다. 그 뒤 개화사상은 독립협회의 자유민권사상으로 발전하였고, 1900년대 초에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애국계몽사상으로 발전하여 주로 교육사업과 신문화운동을 통한 계몽운동의 사상으로 존재하였다.

요컨대 개화사상은 조선의 부국강병이라는 목표를 위하여 정치사회적으로는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하여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체제를 수립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양반신분제도를 폐지하고 인재를 능력에 따라 발탁하여 쓰고,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함으로써 자유로운 시민사회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계몽과 신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신문을 발간하고, 경학이나 사장학 중심의 교육을 근대적으로 개혁하여 신식학교를 널리 설립하고 신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상공업과 광업을 개발하여 근대산업체제를 수립하려고 하였고, 외국의 군함을 도입하여 해안을 지키고, 구식 군대를 신식 군대로 개편하면서 근대적 무기로 무장시켜 부국강병을 이룩하여 열강의 침략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려고 하였다. 개화사상은 19세기 중후반기에 조선사회가 당면했던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고 장차 자주부강한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하여, 나라의 자주독립과 발전을 실현할 수 있는 중추적 이념이었다. 개화사상의 본질은 완전 자주독립한 입헌군주정체의 나라를 수립하고, 자본주의경제의 추구를 그 목표로 한 것이었다.

<權五榮>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