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1. 개화정책의 추진세력
  • 2)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2)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본격적인 개화정책이 시작되면서 그 동안 막후에서 고종의 개화의지를 북돋워 온 일군의 개화세력들도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개화를 추진하기로 한 결정은 고종과 권력핵심부의 민씨 척족들이 내렸지만 실제로 개화정책을 수행하는 것은 이들 개화관료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일찍이 개국통상론을 주장한 박규수 문하에 드나들며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뜨고, 박규수 사망 이후에는 劉大致(劉鴻基)의 지도를 받으며 사상적·정치적 결사를 형성하고 있던 金玉均·朴泳孝·徐光範·洪英植 등 노론 명문의 자제들이 개화정권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155)鄭玉子,<開化派와 甲申政變>(≪國史館論叢≫14, 國史編纂委員會, 1990) 참조. 이들은 이미 과거합격 이전부터 왕실과 깊은 관련을 맺고 권력핵심에 접근하여 고종이 개화를 결심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 주변에는 姜瑋·李東仁·卓挺埴·鄭秉夏·朴齊絅 등 중인 이하 출신의 개화세력들도 모여들고 있었다.156)李光麟,<開化黨의 形成>(≪開化黨硏究≫, 一潮閣, 1973) 참조.

박영효(1861년생)는 원래 가난한 시골 진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먼 친척인 박규수의 천거로 1872년(고종 9)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하였다. 그의 나이 14세 때인 1875년에는 왕세자 책봉문제로 조선에 온 청의 칙사를 국왕을 대신하여 방문하는 등 왕실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부마였다. 그는 박규수에게서 개혁사상을 전수받았고, 형 朴泳敎를 통해 김옥균과 알게 된 후 불교사상를 매개로 친교를 맺게 되었다.157)李光麟,<春皐 朴泳孝>(≪開化期의 人物≫, 연세대 출판부, 1993), 94쪽.
古筠記念會 編,≪金玉均傳≫ 상(慶應出版社, 1944), 60쪽.

김옥균(1851년생) 역시 빈한한 향반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출세한 안동김씨 친척에게 입양되어 서울 북촌으로 이사한 뒤, 박규수·오경석·유대치 등과 만나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양부 김병기가 강릉부사를 역임한 후 형조참의까지 오르는 동안 박영효·홍영식·민영익·김만식·서광범 등 당대 최고 명문의 자제들과 교유하였다. 또 왕실의 최고 어른인 조대비와 인척관계라는 점 때문에 일찍부터 왕실에 출입하며 총애를 받고 있었다.158)조대비는 자신의 친정조카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趙寧夏의 從弟 趙成夏의 모친 김씨가 김옥균의 숙모라는 인연으로 청년시절부터 자주 김옥균을 불러들여 만났다고 한다(≪金玉均傳≫ 상, 44쪽). 그러나 1872년(고종 9) 20세가 넘어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벼슬살이는 순탄치 못해서, 1882년 무렵까지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리 등 5품직을 벗어나지 못하였다.159) 愼鏞廈,<金玉均의 開化思想>(≪東方學志≫46·47·48, 1985) 참조.

서광범(1859년생)은 조부가 평안감사, 부친이 이조참판까지 지낸 달성서씨 명문출신으로 22세인 1880년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부인이 안동김씨인 관계로 일찍부터 김옥균과 사귀어 형제처럼 지내고 있었다.160) 李光麟,<緯山 徐光範>(≪開化期의 人物≫, 연세대 출판부, 1993), 204쪽.

이상 세 사람은 함께 박규수 집에 드나들며 우정을 나누었고, 영의정 이최응의 아들로 고종의 사촌인 이재긍, 민씨 척족의 젊은 세도가인 민영익, 역시 영의정을 지낸 洪淳穆의 아들 홍영식 등 최고 권력층의 자제들과 교유하며 개화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홍영식(1855년생)은 1873년 과거에 급제한 후 뛰어난 가문을 배경으로 쉽사리 종2품 참판까지 올라 개화파 중 가장 관력이 화려하였다. 1년 먼저 과거에 장원급제하고도 원래 출신가문이 한미하기 때문인지 승진이 빠르지 못했던 김옥균과는 차이가 있었다. 1881년에는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 육군성을 조사하고 돌아와 보다 적극적인 부국강병을 추진하자고 주장하였다. 통리기무아문에서는 민영익과 함께 군무사를 담당하였다.161) 李光麟,<洪英植硏究>(≪開化期硏究≫, 一潮閣, 1994) 참조.

민영익(1860년생)은 민비의 친정조카로서 고종의 개화정책을 가장 측근에서 보좌한 젊은 세도가였다. 개화파를 고종에게 천거하고,162) 민영익의 일생에 대해서는 崔完秀,<芸楣實紀>(≪澗松文華≫37, 1989) 참조. 1881년 일본시찰단 파견을 기획한 것도 민영익이었다.163) 李 永의≪日槎輯略≫에 의하면, 시찰단의 일원으로 동래로 내려가던 도중 3월 16일 밀양읍에서 민영익을 만났는데, 그는 홍영식·어윤중 등과 함께 영남루에 머무르고 있다가 고종의 봉서를 받고 3월 19일 서울로 올라갔다고 하므로, 애초에 민영익도 비공식적으로 시찰단과 동행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민영익이 개화파를 발탁한 것은 권력기반이 미약했던 민씨 일족164)당시 민씨 척족들은 國舅가 중심이 된 19세기의 세도가문과는 달리 閔升鎬·閔謙鎬·閔奎鎬·閔台鎬 등이 왕비와 동렬이고 閔泳翊, 閔泳煥·閔泳駿 등은 조카뻘로 연배나 경륜이 정계의 여론을 주도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고종 친정체제 성립 이후 정권은 척족과 이최응·이재원·이재긍 등 종실, 金炳國·金炳始·金輔鉉 등 안동김씨의 연합형태로 이루어졌다(延甲洙,<개항기 권력집단의 정세인식과 정책>,≪1894년 농민전쟁 연구 3≫, 역사비평사, 1993, 96∼99쪽 참조).이 대원군 및 기존의 세도가문에 대항하여 일거에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당시 불가피한 時務였던 개화를 추진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대원군정권과 달리 수구가 아닌 개화를 추진한 것은 결국 정권의 안정적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야에 편만한 척사세력의 공격 때문에 양반출신 개화관료들은 처음부터 직접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우선 이동인 등 비양반출신들을 고용하여 비밀리에 개화를 추진하였다. 이동인은 강화도조약체결 당시 하나부사(花房義質)의 통역으로 조선에 왔던 일본 本願寺 승려 楓玄哲과 교유한 인연으로 1878년 무렵부터 부산의 東本願寺 別院에 드나들고 있었다. 1879년 8월에는 일본의 개화 실정을 알고자 하는 유대치·김옥균·박영효 등의 부탁을 받고 직접 도일하였다. 일본 재야의 유명한 문명개화론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문하에서 약 1년여를 머무르며 근대문물을 배우고 있던 그는 1880년 8월 수신사로 일본에 온 김홍집 일행을 만나 함께 귀국한 뒤 민영익에게 소개되었다. 그리고 다시 민영익의 천거로 고종에게 발탁된 이동인은 이후 고종의 일본통 밀사 역할을 맡게 되었다.165)李光麟,<開化僧 李東仁>(앞의 책, 一潮閣, 1973) 및<開化僧 李東仁에 관한 새 史料>(≪韓國開化史의 諸問題≫, 一潮閣, 1986) 등 참조.

이동인은 1880년 9월 승려 無不(탁정식)과 함께 두 번째로 도일하여 미국과의 수교 결심을 밝힌 고종의 밀서를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전달하였다. 12월에 귀국한 이후에는 다시 대규모 일본시찰단의 파견을 기획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통리기무아문 별선군관으로 임명되어 시찰단의 향도로서, 또 일본에서 총포와 선박을 구입해 오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前府使 李元會와 함께 도일하려 하였으나 도중에 행방불명되고 말았다.166)李光麟은 위의 글에서 김홍집ㆍ이조연 등 온건파에 의한 암살이라고 추정하였으나, 이 시점에서 개화세력내의 노선 갈등이 암살까지 감행할 정도였다고는 볼 수 없고, 아마도 왕실의 개화추진에 불만을 품은 척사세력의 소행이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중견관료층 안에서는 김홍집·어윤중·김윤식 등이 고종의 신임을 받는 개명관료그룹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흔히 온건개화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김홍집이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고, 1881년 어윤중·김윤식이 각각 일본시찰단과 영선사로 임명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김홍집(1842년생)은 대사헌·개성유수·형조참판을 역임한 金永爵의 아들로서, 소론 명문출신이지만 북촌의 노론 자제들과 교유하면서 김옥균을 알게 되었다. 또 강위와도 친분이 있는 등 일찍부터 개화세력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1868년 27세로 庭試 병과에 급제했는데, 1873년 注書로서 經筵에 참가했을 때 5대조가 숙종조의 國舅인 慶恩府院君 金柱臣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고종의 특별한 신임을 얻게 되었다.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발탁된 것도 그러한 인연이 작용한 것이었다.167)金弘集,<以政學齋日錄>, 1873년 9월 15일 및<修信使日記>, 1880년 5월 28일(≪金弘集遺稿≫, 高麗大 出版部, 1976). 일본의 근대문명을 시찰하고 온 김홍집은 동도서기적인 부국강병론의 입장에 서게 되었으며,≪조선책략≫때문에 척사세력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김홍집은 신설된 통리기무아문에 참여하여 일본과 인천개항의 교섭, 조미조약의 체결 등 외교통상 분야에서 활약하였다.168) 崔震植,≪한국 근대의 온건개화파 연구≫(영남대 박사학위논문, 1990) 참조.

어윤중(1848년생)은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주경야독으로 21세인 1869년 殿試 병과에 합격하자 정계에 진출하였다. 조부의 영향으로 茶山 丁若鏞의 실학을 계승하였던 그는 1872년 김옥균을 장원급제시킨 시험관이었으며,169) 崔震植,<魚允中의 富强論 硏究>(≪國史館論叢≫41, 1993) 76쪽. 민영익과 친교가 있었고,170)민영익의 집에 드나든 8學士 중에는 홍영식·김옥균과 함께 어윤중도 끼어 있었다(黃玹,≪梅泉野錄≫권 1 상, 갑오이전). 유대치의 집에도 드나드는 등 개화세력과 상당한 관련이 있었다.171)어윤중이 1881년 시찰단으로 일본에 다녀와서 쓴 여행기≪中東紀≫를 유대치에게 주자, 김옥균이 이를 읽고 도일을 결심하였다는 기록(≪金玉均傳≫상, 130∼131쪽)과 유대치의 유일한 官歷이 임오군란 이후 어윤중이 주도하였던 減省廳에의 참여였던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877년 전라우도암행어사로서 능력을 발휘한 이후 고종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1881년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부터 개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일본의 각종 근대시설을 둘러보고 난 후, 다시 고종의 밀명으로 청에 파견되어 미국과의 수교교섭을 진행하면서 天津機器局을 시찰한 경험은 임오군란 후 減省廳개혁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일본에 동행한 수행원 윤치호·유길준·유정수 등을 모두 유학시켜 개화세력 확대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172) 崔震植, 앞의 글(1993) 참조.

김윤식(1835년생)은 역시 어려서 부모와 사별하고 숙부집에서 김만식 등 사촌형제들과 함께 성장하면서 정통유학이면서도 현실참여적이고 실학적 측면이 있었던 兪莘煥에게서 수학하였다. 이 때 민태호·민규호·민영목 등 민씨 척족들과 동문수학한 인연으로 후일 자연스레 권력 핵심부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유신환 사후에는 박규수에게도 사사하였다. 1865년 蔭官으로 관계에 진출하였다가 40세 때인 1874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부승지·순천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881년 영선사에 임명된 것은 역시 민씨 척족들과의 인연 때문이었으며, 이후 천진에서 이홍장과 조미조약체결에 대해 논의하면서부터 개화관료로 활약하게 되었다.173) 鄭玉子,<雲養 金允植 硏究>(≪歷史와 人間의 對應-高柄翊先生 華甲紀念論叢≫, 한울, 1985) 및 崔震植, 앞의 글(1990), 14∼15쪽 참조.

그런데 이들 온건개화파들은 주로 막후에서 활동하고 있던 급진개화파와 달리 청·일과의 공식 외교채널에 투입되었다. 이들의 온건한 성향이 척사세력의 반대를 완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고종의 배려였던 것이다. 김홍집·어윤중·김윤식 등은 서로 뚜렷한 교유관계는 없었으나 함께 개화 실무에 종사하였고, 또 대체로 온건한 개화노선을 지향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점차 한 집단으로 분류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추구한 개화는 청의 洋務論처럼 점진적·개량적 근대화로서, 완전한 서구화가 아니고 제한적·선별적으로 서양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여 그것으로 외적을 막자는 것이었다. 또한 外交觀에 있어서도 외교관의 북경상주를 요구하고 朝貢使行의 폐지를 주장하는 근대적인 일면과, 여전히 청의 ‘屬邦’ 주장을 수용하는 한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 점이 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과 유교적 가치질서의 폐기를 주장한 급진파 계열과는 차이가 있었다.

한편 김옥균 등 급진파들은 청이 아닌 일본을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있었다. 이동인의 일본행 이후 일본의 내외정세에 대해 더욱 호기심을 가지게 된 김옥균 등은 어윤중의 일본·중국여행기인≪中東紀≫를 읽고 마침내 도일을 결심하였다. 마침 이재선사건의 종결로 척사세력의 기선을 제압한 고종도 김옥균 등의 일본행을 허락하였고, 민비도 민영익에게 적극 권유하였으나 사정상 김옥균만 첫 번째 도일에 성공하였다.174) 古筠記念會 編,≪金玉均傳≫상, 121∼129쪽.

드디어 1881년 12월 徐光範·柳赫魯·邊燧 등과 함께 일본에 도착한 김옥균은 근대문명의 실상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882년 6월 귀국하기까지 약 6개월 동안 김옥균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개화사상에 접하였고, 그의 소개로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隅重臣)·시부자와 에이이치(澁澤榮一)·고토 쇼지로(後藤象次郞) 등 일본정부 및 민간의 유력인사와 면담하면서 고종의 관심사인 일본 조야의 對韓策을 탐문하였다.175) 古筠記念會, 위의 책, 136∼137쪽. 박규수로부터 북학사상을 전수받으며 개화를 꿈꾸었던 김옥균은 마침내 일본의 눈부신 발전상을 보고 더욱더 급격한 개화추진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귀국 도중 임오군란과 대원군의 납치 소식을 듣고 분개한 김옥균은 점차 어윤중 등 친청 온건파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청에 대한 입장 차이로 온건파와 급진파가 분기하기 시작한 것이다.176)김윤식의 회고에 의하면, 온건파와 급진파는 똑같은 憂國之士로서 동지였으나 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을 계기로 서로 분화했다고 한다(金允植,≪續陰晴史≫하, 577쪽). 이후 급진파 주변에는 주로 일본유학생 출신의 소장개화파들이 결집하여 개화세력의 저변을 확대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尹致昊·徐載弼·兪吉濬 등인데, 무관 윤웅렬의 아들 윤치호는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시찰단에 동행하였다가 유학생활 뒤 돌아와 통리기무아문 주사 겸 미국공사관 통역관으로 활약하였다.177) 柳永烈,≪開化期의 尹致昊硏究≫(한길사, 1985) 참조. 서광범의 친척인 서재필은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 육군호산학교에 유학하고 돌아와 나중에 갑신정변의 적극 가담자가 되었다.178) 서재필은 13촌 아저씨인 서광범으로 인해 김옥균과 알게 되었고, 또 김옥균이 서재필의 養母의 친정 안동김씨의 친척이 되므로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李光麟,<徐載弼의 開化思想>≪韓國開化思想硏究≫一潮閣, 1979, 99쪽). 그 밖에 申福謨·李殷乭·林殷明·李圭完·鄭蘭敎·申應熙 등 유학파 무관들과 李寅鍾·柳赫魯 등 하급 군인,179) 鄭玉子, 앞의 글(1990), 224쪽. 역관 邊燧180) 변수는 강위의 제자로서 김옥균 등과의 인연으로 1883년 보빙사 민영익을 수행하여 세계일주를 한 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내아문 주사로 발탁되었고 갑신정변 때에는 외아문 참의에 임명되기도 하였다(李光麟,<한국 최초의 미국 대학졸업생 변수>, 앞의 책, 1986). 등이 급진파와 입장을 같이하였다. 다만 박규수 문하에 드나들다가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유학한 유길준만이 민영익과의 인연으로 온건개화의 입장을 견지하였다.181) 柳永益,<甲午更張 이전의 兪吉濬>(≪甲午更張硏究≫, 一潮閣, 199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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