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1. 개화정책의 추진세력
  • 3) 개화추진세력의 분화

3) 개화추진세력의 분화

1882년(고종 19) 6월의 임오군란은 민씨 척족들을 중심으로 개화를 추진해온 고종 친정체제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당시 권력의 최상층부에 있던 이최응·민겸호·김보현이 살해되었는데, 이최응은 고종의 백부였고 민겸호는 민영익의 숙부, 김보현은 민영익의 처조부였다. 그러나 군란 이후 고종의 혁신의지는 오히려 더욱 확고해졌다. 7월 20일 국왕 즉위 이래의 실책을 자책하면서 대사면과 유신을 다짐하는 윤음을 내린 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정권을 잡은 대원군의 분부에서 나온 것이었고,182)≪高宗實錄≫, 고종 19년 7월 20일. 대원군이 청에 납치되고 다시 친정을 회복하면서부터는 여러 가지 혁신조치들이 발표되었다.

7월 22일 고종은 ‘문벌숭상 타파’의 교서를 내려 서북인, 송도인, 서얼, 의·역 중인, 하급 서리와 군졸 등을 모두 차별하지 않고 顯職에 등용하겠다고 다짐하였다.183)≪高宗實錄≫, 고종 19년 7월 22일. 이는 전통적인 양반지배체제하에서 정치참여가 봉쇄되어 온 소외계층에 대한 전격적인 문호개방 선언이었다. 조선 후기 이래 계속된 신분제 해체현상은 개항 이후 더욱 가속화되었고, 특히 중인층 이하 출신들이 개화정책의 추진과정에서 기존의 양반관료들보다 뛰어난 적응력을 보이자 이들의 실무능력을 충분히 수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표방으로 고종이 주도하는 개화정책의 추진세력은 그 외연을 더욱 확대하게 되었다.

한편 7월 25일에는 다시 대궐내에 機務處를 설치하였고, 8월 5일 동도서기적인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교서를 발표하였다.184)≪高宗實錄≫, 고종 19년 8월 5일. 그리고 전국의 척화비를 뽑아 내고 개화정책을 공식화하였다.185) 척화비 철폐는 이미 5월 5일 일본공사가 요구했던 것인데, 이 때 의정부를 통해 공식적으로 철폐를 전국에 명령하였다. 그러자 전국 각계각층으로부터 개화상소가 쏟아져 들어왔다.186) 李完宰,≪初期開化思想硏究≫(민족문화사, 1989) ‘부록 개화에 대한 상소문’ 참조. 개화를 지향하는 세력이 이미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형성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이제 혁신정책을 추진하는데 구체제와 구세력들은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이에 10월에는 減省廳을 설치하여 司䆃寺·內贍寺·內資司 등 다기한 재정관련 기관들을 호조로 통합시키고 造紙署·活人署·舟橋司 등 시대변화로 쓸모없게 된 기관들을 폐지하였다. 또한<各司官員遵行節目>을 발표하여 관료의 부패방지 등 기강확립을 시도하였다.187)≪高宗實錄≫, 고종 19년 12월 29일, 減省廳減省別單. 이 개혁은 어윤중이 주도하였는데,188) 黃玹,≪梧下記聞≫, 제1필 계미. 당시 권력의 핵심인물들도 함께 참여하여 정부내에서 보수적 여론을 형성하는 원로대신들을 대폭 숙청하였다.189) 이 때 70세 이상 의정부 堂上을 모두 減下하였는데, 56명 가운데 13명이 해당되었고 정1품 아문인 宗親府·議政府·忠勳府도 減省 대상이었다(延甲洙, 앞의 글, 122쪽).

그리고 12월 28일에는 종래의 ‘世貴之風’을 반성하여 관료이든 상천민이든 누구나 재화를 벌어 부자가 되게 하고, 농민·상인·수공업자의 자식일지라도 출신에 상관없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한다는 교서가 발표되었다.190)≪高宗實錄≫, 고종 19년 12월 28일. 이쯤되면 중세사회의 골간을 이루었던 신분제는 내용적으로 거의 폐지되었으며, 富國 달성이라는 목표 앞에서 유교사회의 전통적 직업관도 의미를 잃게 되는 순간이었다. 실제로 이 조치 이후 1880년대 후반에는 서자나 중인출신의 개화관료들이 상당히 등장하였다.191) 柳永益,<甲午 開化派官僚의 執權經緯·背景 및 改革構想>(앞의 책) 참조.

그러나 이러한 고종의 개혁정책은 군란을 진압해 준 청이 속방화정책으로 내정간섭을 강화하면서 장애를 만나게 되었다.192) 金正起, 앞의 글 참조. 또 이를 계기로 개화관료내에 온건파와 급진파의 대립도 본격화되었다. 우선 임오군란이 터지자 청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그들과 함께 귀국한 김윤식·어윤중 등의 친청파 동도서기론자들은 그 세력을 급속히 확대하였다. 기무처를 설립할 때도 김윤식·어윤중·김홍집·조영하·김병시·신기선 등 친청세력이 대거 참여하였다. 군란수습 후 陳奏使로 파견된 조영하·김홍집도 외국인고빙과 차관제공을 요청하면서 청에 의존한 개혁추진을 표방하였다.193) 延甲洙, 앞의 글, 117쪽.

그리고 11월 이홍장의 추천으로 馬建常과 묄렌도르프가 도착하여 내정과 외교를 간섭하고 신설된 통리아문·통리내무아문에도 친청세력이 대거 진출하면서 이들의 정국주도는 더욱 강화되었다.194) 11월 18일 통리아문·통리내무아문의 인선과 12월 통리군국사무아문·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체제개편 때의 인선을 분석해 보면, 1881년 통리기무아문 인선에 비해 신진기예보다는 온건 친청세력이 중심이 되었다. 즉 민태호·민영목·민영익 등 척족세력과 조영하·김병시·윤태준·한규직·정범조 등 보수대신이 고위급에, 김윤식·박정양·어윤중·김홍집·신기선·민종묵·이조연 등 온건개화관료가 실무진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홍영식·김옥균·윤치호·장박 등도 포함되어 급진파 계열이 완전히 실각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김윤식은 袁世凱의 도움으로 강화도에 鎭撫營을 설치, 청나라식 군사훈련을 시작함으로써 평소 그의 주장대로 강병에 의한 禦洋論을 현실화시키고 있었다.195) 崔震植, 앞의 글(1990) 참조. 청의 간섭이 있기 전에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 같이 개화를 지향하였던 온건파와 급진파는 이제 김윤식 등 친청세력과 김옥균이 이끄는 반청세력으로 완전히 분화되었다. 군란이 일어났을 때 김윤식·어윤중은 청에, 김옥균·서광범은 일본에 각각 구원병력을 요청하면서 청의 간섭에 대한 인식에서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 것이다.

한편 청의 속방화정책에 가장 큰 불만을 가진 사람은 역시 고종이었다. 따라서 비밀리에 급진세력들을 지원하며 반청의 독자적 근대화를 추진하였다.196) 李光麟,<開化黨의 形成>(앞의 책, 一潮閣, 1973), 35쪽 및<甲申政變 政綱에 대한 再檢討>(≪開化期硏究≫, 一潮閣, 1994) 19쪽에 의하면, 갑신정변은 고종과 개화당 사이에 충분한 숙의를 거쳐 일어난 것으로 고종의 사전 密勅이 있었을 가능성이 추정된다. 그러나 박영효가 고종과 합의해서 결행한 것은 아니라고 반박한 자료도 있다(李光麟,<春皐 朴泳孝>, 앞의 책, 1993, 125쪽). 군란수습 후 손해배상과 제물포조약 비준서 교환, 그리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던 관세설정에 관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절단은 이러한 급진파계열의 진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행보였다.

1882년 8월 박영효를 정사로, 김만식을 부사로 하여 구성된 사절단에는 서광범이 종사관으로, 고종의 밀명을 받은 김옥균과 민영익이 고문으로 동행하여 당시 고종 측근에서 개화를 추진해 온 핵심인사들이 총망라되었다.197) 朴泳孝,≪使和記略≫(≪海行摠載≫권 11, 민족문화추진회), 9월 9일조에 의하면 수행원은 유혁로·변수·박제경·윤웅렬 등 4인이었다. 박영효는 훗날 이 일본행에서 明治 일본의 발전상을 본 견문이 일평생을 지배하여 이 때 받은 충동으로 조급한 마음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라고 회고할 정도였다.198)≪新民≫14, 1926년 6월. 또한 이 때 받은 융숭한 대접은 김옥균과 박영효가 일본에 의존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199) 金玉均,<甲申日錄>참조.

이들은 3개월의 체류기간 동안 오오쿠마 시게노부·이토 히로부미·이노우에 카오루·후쿠자와 유키치·시부자와 에이이치·오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등 일본 조야의 유력인사들과 광범하게 접촉하고, 청·미국·영국·독일 등 이미 국교가 수립된 나라들뿐 아니라 러시아·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스페인·이탈리아 등 아직 수교가 성립되지 않은 나라의 외교사절과도 폭넓은 교제를 가졌다. 조선과 수교를 준비하고 있던 프랑스공사에게는 특별히 서신을 보내 수교교섭에 유리한 전략을 충고해 주기까지 하였다.200) 朴泳孝,≪使和記略≫9월 8일·10월 3일 기록 등 참조. 그런데 이들이 일왕을 알현하고 외무성 관료들과 각국 공사를 초청하여 대규모 연회를 열기도 하는 등 이전의 수신사절과 달리 화려한 외교활동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왕실의 부마라는 박영효의 높은 지위 덕분이었다. 물론 수교를 앞둔 각국 외교사절의 입장에서도 조선의 실력자와 미리 친해 두는 것이 수교교섭에 유리하다고 계산했을 것이다.

이들 일행 중 민영익은 청나라에 가려고 10월 19일 가장 먼저 출발하였고,201)민영익은 이 때 대원군문제로 중국을 방문하고 천진·상해·홍콩 등지를 여행하였다(崔完秀, 앞의 글). 박영효·김만식은 11월에 귀국길에 올랐으나, 김옥균과 서광범은 고종의 특명에 따라 다시 3개월이나 더 머무르게 되었다.202) 朴泳孝,≪使和記略≫, 11월 18일. 김옥균은 이 때 관계에 진출한 지 실로 오랜만에 우부승지로 승진하는 등 고종으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203) 朴泳孝,≪使和記略≫, 10월 19일. 그는 이러한 고종의 신임과 1년 전 첫 번째 도일 때 쌓은 일본인사들과의 광범한 친교를 바탕으로 차관교섭에 나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원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觀兵式과 工部大學 등을 둘러본 후 일본의 근대적 군비와 기계화에 감복하였고, 특히 일본정부의 증세정책에 의한 군비증강에 주목하면서 재정의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의 외무대신 이노우에는 정부의 조선정책이 소극책으로 전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橫濱正金銀行에서 17만 원의 차관을 얻어 주었다. 이 소액차관은 유학생 비용을 충당하는데 불과하였으나, 김옥균은 이것을 일본의 계속적인 지원 약속으로 믿고 고토 쇼지로(後藤象次郎)와 제주도 벌채사업과 포경사업 등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고 1883년 3월 귀국하였다.204) 古筠記念會 編,≪金玉均傳≫상, 212∼218쪽 및 최덕수,<개항이후 일본의 조선정책>(≪1894년 농민전쟁 연구≫3, 역사비평사, 1993) 참조.

한편 먼저 귀국한 박영효는 일본에서 데리고 온 육군호산학교 졸업생 신복모와 이은돌, 경응의숙 유학생 유길준 등과 함께 개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1882년 12월, 23세의 나이로 한성판윤이 된 박영효는 고종에게 신문 발간을 건의하고, 유길준을 통리교섭아문 주사로 발탁하여 사업을 추진시켰다.205)李光麟,<漢城旬報와 漢城周報에 대한 일고찰>(≪韓國開化史硏究≫, 一潮閣, 1969) 참조. 이 사업은 박영효가 한성판윤을 그만둠으로써 중단되었다가 7월 김윤식에 의해 博文局이 설치된 후 김만식의 주도로 10월 1일 첫 신문이 발간되었다. 또 김옥균의<治道略論>에 의거하여 도로정비를 목적으로 治道局을 설치하였고 치안을 위해 巡警部를 만드는 등 의욕적으로 근대화사업에 투신하였다. 도로정비사업 중 주민들의 민원으로 3개월 만에 한성판윤을 그만두고 廣州留守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는, 고종의 허락을 받아 광주에 특별군영을 설치하고 이은돌·신복모 등과 함께 일본식 군사교련으로 신식 군대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수구파의 공작으로 이 군대가 친군영에 이속되고 유수직도 6개월 만에 해임된 후 미국유람을 계획하게 되었다.206) 古筠記念會 編,≪金玉均傳≫상, 273쪽.

반면 일본의 재정지원을 믿고 귀국한 김옥균은 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차관교섭을 위한 담보확보, 재원개발에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이 임명한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와 민태호·민영목·민응식 등 척족세력들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당오전의 주조는 악화남발에 그치고 말았다.207) 吳斗煥,<갑오경제개혁의 구조와 성격>(≪인하대 사회과학논문집≫3, 1984) 참조. 민영익과 함께 통리교섭통상아문 富敎司담당이었던 김옥균은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하여 묄렌도르프 등과 대립한 후, 차관교섭을 위해 1883년 6월 또 다시 도일하게 되었다.208)<甲申日錄>에 의하면, 김옥균은 조영하·민태호·민영목·민영익·윤태준 등과 주전관계로 고종 면전에서 다툰 것이 여러 차례요 글로 건의하기는 수십 차례였으며, 이 때부터 척족세력 특히 묄렌도르프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고 한다.

고종은 동남제도개척사라는 직함의 김옥균에게 신임장을 주어 차관교섭을 일임할 정도로 그의 일본행에 큰 기대를 걸었다.209) 이 차관교섭은 묄렌도르프가 일본공사 竹添進一郞을 통해 신임장이 가짜라고 공작하는 바람에 일본정부의 불신으로 실패로 돌아갔다(<甲申日錄>). 고종으로서는 서양 각국과 수교 이후 들어온 각종 새로운 문물들, 특히 전등·전화·전신 등 서양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해 보고 싶어했다. 또 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정예병을 양성하여 청국군대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보려는 자주의지도 있었다. 그 밖에 각국 사신 및 내방객 접대와 교제비용 등 개항 이후 급작스레 늘어난 개화비용들을 화폐주조와 매관매작에 의존하고 있는 처지였으므로 김옥균의 차관교섭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210) 古筠記念會 編,≪金玉均傳≫상, 254쪽.

또한 고종과 왕실 측근들은 이 무렵부터 청을 피해 미국에 의존해 보려는 聯美策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청을 견제할 방법은 서양 강국으로서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에 의존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7월 미국에 파견된 사절단(報聘使)은 표면적으로는 조선주재 초대 미국공사로 푸트(Lucius H. Foote)가 내한한 데 대한 답례였으나, 실제로는 미국에 가서 직접 서양문명의 실체를 접해 보고 가능하면 그들의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내 보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에 이제까지 막후에서 개화정책을 조정하던 민영익이 직접 전면에 나서 정사에 임명되었고 부사와 서기관에도 왕실의 신뢰도가 높은 홍영식과 서광범이 발탁되었다.

1883년 7월 출발, 일본을 거쳐 9월 초 미국에 도착한 보빙사 일행은 미국 대통령 아더(Chester A. Arthur)를 만나 국서를 전달한 다음, 40여 일 동안 워싱톤의 각종 정부기관을 방문하고 뉴욕·시카고·보스턴에서 수많은 상공인들의 접대를 받았다. 근대적 시설의 공장·농장·병원·전신국·전기시설·우체국·신문사·육군사관학교 등을 시찰했을 뿐 아니라 외국박람회도 참관하였다. 특히 박람회에 전시된 각종 근대문물을 보고는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귀국후 조선에서도 국제박람회를 열겠다고 제의함으로써 수교 이후 조선과의 교역증진을 기대하고 있던 상공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들은 연회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한 가지라도 더 많은 것을 배우려는 열의에 가득차서 어디든지 지칠 줄 모르고 구경하였다. 미국무장관을 방문했을 때는 외교·군사고문과 교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211)金源模,<朝鮮 報聘使의 美國使行(1883) 硏究>상·하, (≪東方學志≫49·50, 1985·1986)참조.

이처럼 적극적인 자세로 미국을 배우고 의존하려는 태도를 본 미국정부는 특별히 민영익·서광범·변수 등을 해군함정에 태우고 대서양을 횡단, 유럽 각국을 거쳐 수에즈운하를 통과하고 인도양을 지나 조선에 이르는 6개월간의 세계일주를 주선하였다. 따라서 홍영식 등 나머지 사절단은 11월에 먼저 귀국하였고,212)≪承政院日記≫, 고종 20년 11월 21일 및 金源模,<遣美使節洪英植復命問答記 解題>(≪史學志≫15, 1981) 참조. 수행원 유길준은 민영익의 배려로 미국에 남아 유학생활을 시작하였으며,213) 李光麟,<兪吉濬의 開化思想>(앞의 책, 1979), 55쪽. 민영익 일행은 프랑스·영국·이탈리아·이집트·인도·싱가포르·홍콩·일본 나가사키 등을 거쳐 1884년 5월에야 귀국하였다.214)≪承政院日記≫, 고종 22년 5월 9일.

보빙사행 이후 개화정책은 급격히 미국을 통로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1883년 12월 창설된 畿沿海防營에 미국인 군사교관을 초빙하고 라이플총 4,000정을 미국에 주문한 것은 임오군란 이후 심화되어 온 청의 군사적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1884년 1월 양잠시설과 상해-인천, 부산-나가사키간 기선항해를 미국회사에 허락하고, 5월에는 홍영식이 미국에서 구입한 가축들로 목장을 개설하였으며, 9월에는 대궐에 쓸 전등장비를 미국에 주문하였다.215) 古筠記念會 編,≪金玉均傳≫상, 234쪽.

그런데 연미책이 진행되면서부터 그 동안 일본에 의존해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했던 급진개화파는 상당히 소외되고 있었다.216)李光麟, 앞의 책(1981), 173쪽. 우선 개화파를 적극 지원하였던 민영익과 김옥균 등의 사이가 멀어졌다. 흔히 민영익이 미국행 이후 개화에서 후퇴하여 수구세력 쪽으로 가담하였다고 하나, 이는 개화를 포기한 것이라기보다 일본을 통한 서기수용을 중단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차관교섭차 일본을 방문했던 김옥균이 임오군란 이후 소극적 조선정책으로 전환한 일본정부의 방침 때문에 아무런 성과없이 귀국한 것도 한 계기가 되었다.

김옥균은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교외에 한거하면서 보다 획기적인 국면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는 갑신정변 이전까지 미국공사 빙햄(J. Bingham)과 20여 차례나 면담하면서 미국의 지원도 탐색하였으나 실패하자, 청불전쟁을 계기로 다시 개화파에 접근해 온 일본과 정변을 모의하였다. 미국여행중 민영익과 의견 차이를 보였던 홍영식과 서광범도 김옥균 쪽에 가담하여 1884년 5월 무렵부터 함께 정변을 모의하였고, 8월 친군영제 개편 때 한규직·이조연·윤태준·민영익 등 왕실 측근들이 병권을 장악하고 자신들을 소외시키자 드디어 정변을 감행하였다.217)愼鏞廈,<초기개화파와 갑신정변의 민족주의>(≪韓國近代民族主義의 形成과 展開≫, 서울대 출판부, 1987) 참조.

그러나 주지하듯이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정계내에서 급진개화파의 위상은 완전히 추락하였다. 이후 청의 내정간섭은 더욱 강화되었고 친청세력의 독주도 심화되었다. 우의정에 김병시, 의정부 공사당상 및 선혜청 제조에 어윤중, 병조판서 및 의정부 유사당상에 김윤식이 임명되는 등 친청파가 요직을 차지하였다.218) 延甲洙, 앞의 글, 127∼128쪽.

한편 정변 직후 국정 주도권을 포기하는 교서를 발표하고 의정부로 권한 이양을 선언하였던219)≪高宗實錄≫, 고종 22년 11월 30일 敷心之別諭. 이 교서는 친청파 김윤식이 대찬한 것이었으므로(≪雲養集≫권 9, 御製代撰 중 常參綸音) 고종 자신의 견해라기보다는 청과 친청파 관료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종은 다시 개화를 추진하면서 오히려 반청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우선 청을 견제할 세력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여 제1차 조러밀약을 추진하였다. 이 때 외무독판이면서도 외교교섭에서 소외된 김윤식이 반발하자 1885년 3월 단행된 관직개편에서 김윤식을 교체하고 4월에 어윤중을 퇴진시키는 등 친청세력 제거에 착수하였다.220) 李光麟, 앞의 책(1981), 200∼205쪽. 5월에는 대궐내에 內務府를 설치하고 산하에 商理局·錢圜局·轉運局·鑛務局·機器局·育英公院·種牧局·鍊武公院·電報局 등을 두어 1880년대 후반 개화자강사업을 이끌어 나갔다.221) 徐榮姬,<1894∼1904년의 政治體制 變動과 宮內府>(≪韓國史論≫23, 서울大 國史學科, 1990), 337∼378쪽.

이에 청은 고종과 민비를 견제하기 위해 8월 청의 保定府에 연금되어 있던 대원군을 환국시켰다. 또한 10월에는 원세개를 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誼로 임명하여 조선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미국인 외교고문 데니(O. N. Denny)와 협판 내무부사 민영환 그리고 金嘉鎭·金鶴羽 등 신진 개화세력들과 함께 1886년 3월 다시 한 번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하는 밀약을 추진하였다.222) 李光麟, 앞의 책(1981), 208∼210쪽.

이처럼 고종의 반청운동이 계속되자 원세개는 1886년 7월 마침내 고종폐위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朝鮮大局論’에서 내정개혁 10개조를 발표하여 국왕의 정국운영 배제와 개화정책 중단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원세개와 함께 고종폐위를 구상하였던 친청파의 거두 김윤식이 민영익의 밀고로 유배를 떠나는 것으로 귀착되었다.223)原田環,<80年代後半閔氏政權と金允植>(≪朝鮮史硏究會論文集≫22, 1985) 및 金允植,≪續陰晴史≫하, 582쪽 참조. 이로써 갑신정변 이후 급진파의 몰락에 이어 온건개화파들도 모두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갑신정변 때 민태호·민영목·조영하·윤태준·이조연·한규직 등 친청파가 모두 살해되어 세력을 잃은 데다 왕실과 척족들이 청의 압력을 거부하여 친러책을 쓰기 시작하였고, 이제 선위음모까지 발각된 마당에 청의 위세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더 이상 정권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1886년 말에서 1887년 초 사이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은 모두 차례로 퇴진하였다.224) 김윤식과 어윤중은 1886년 4월 박영효의 아버지 朴元陽의 시체매장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았다. 김윤식은 박원양이 자기 생질의 백부가 되기 때문에, 어윤중은 보은 태생으로서, 수원에서 훈장을 하던 박원양에게 어려서 수학한 인연으로 그를 도왔다가 갑신정변세력 비호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崔震植, 앞의 글, 1990, 179∼185쪽).

이후 고종은 1887년 5월부터 민씨 척족들을 대거 진출시켜 정권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이 때 閔丙奭·閔應植·閔泳煥·閔泳駿 등이 새로이 세력가로 떠올랐고, 李鍾健·韓圭卨 등도 대표적인 친위관료로 활약하였다.225)糟谷憲一,<閔氏政權上層部の構成に關する考察>(≪朝鮮史硏究會論文集≫27, 1990) 참조. 趙羲淵·安駉壽·金鶴羽·金嘉鎭·權灐鎭·鄭秉夏 등 신진개화파와 유길준 등은 민씨 척족들의 후원으로 육영공원(1886), 연무공원(1887), 광무국(1887), 기기창(1887) 등 근대화기구에서 각종 실무를 담당하였다.226) 柳永益, 앞의 글(1990) 참조. 고종은 또한 연무공원에 미국인 군사교관을 고빙하고,227) 李光麟,<美國軍事敎官의 招聘과 鍊武公院>(≪韓國開化史硏究≫, 一潮閣, 1969). 미국·일본·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 등에 상주 외교관을 설치하여 전권공사를 파견하는 등 외교다변화 전략을 통해 청의 속방화에 대항하였다.228) 李光麟, 앞의 책(1981), 215∼218쪽.

그런데 신설된 각종 근대화기구들은 재원부족으로 곧 운영이 정지되는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1888년 재정적자로≪漢城周報≫가 폐간된 데 이어 1889년 農桑所와 農務牧畜試驗場이 폐지되었다. 고종은 차관으로 그 운영자금을 마련코자 하였으나 청의 방해로 번번히 실패하였다. 청은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방해하기 위해 자기 나라의 차관을 강요하면서, 고종이 알렌(H. Allen), 데니, 메릴(N. F. Merrill), 르장드르(Le Gendre) 등 고빙인사들을 통해 미국·프랑스·일본 등으로부터 들여오려는 차관교섭을 방해하였다.229) 金正起,<朝鮮政府의 淸借款 導入>(≪韓國史論≫3, 1976) 참조. 따라서 1880년대 후반 근대화 추진에 필요한 재원은 결국 세원확장과 증세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개화정책의 추진은 곧 조세수탈의 강화로 이어져 민중의 부담을 가중시켰다.230) 徐榮姬,<개항기 봉건적 국가재정의 위기와 민중수탈의 강화>(≪1894년 농민전쟁연구≫1, 역사비평사, 1991) 참조.

이처럼 갑신정변 이후 고종 주도로 추진된 개화는 재정부족과 청의 간섭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추진세력에 있어서도 고종이 자신의 주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개화관료들을 모두 축출하고 고빙 외국인과 일부 신진개화파들에게만 의지함으로써 그 기반이 매우 협소하였다. 고종은 평소≪海國圖志≫·≪瀛環志略≫·≪易言≫ 등 개화서적들을 통해 개혁의지를 다졌고, 다산 정약용의≪與猶堂集≫을 항상 옆에 두고 참고할 만큼231)金泳鎬,<開化思想의 形成과 그 性格>(≪한국사≫16, 국사편찬위원회, 1975), 256쪽. 실학적 개화론을 가지고 있었으나, 봉건군주로서의 한계 또한 명백하였다.

고종의 개화 추진방식은 근본적으로 청의 中體西用論과 같은 동도서기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청의 간섭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종은 청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면에서 친청파 동도서기론자들과 차이가 있었고, 일본의 급격한 서구화에 비판적인 점에서 급진파와도 입장을 달리하였다. 결국 군주로서 고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서기를 수용하되, 그 어떤 이유에서도 자신의 주권이 흔들리는 것은 싫어하였으므로 청·일 모두를 견제하고 개화파도 외세와 연결될 때는 철저히 숙청하였다. 따라서 1880년대의 개화정책은 광범한 사회적 추진주체를 형성하지 못했고 몇 가지 근대문물을 수용하는 선에서 불완전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徐榮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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