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1) 파견계획의 수립

(1) 파견계획의 수립

朝士視察團(속칭 ‘紳士遊覽團’)은 12명의 朝士가 1881년(고종 18) 4월 초부터 윤7월까지 약 4개월 가량 메이지(明治) 일본의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그 견문한 바를 조선의 개화·자강정책에 반영하고자 했던 우리 나라 근대화 운동사상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232)‘신사유람단’이란 명칭은 1930년 1월 12일자≪동아일보≫에 실린 윤치호의 ‘十二紳士遊覽團’이라는 제목 아래 조사시찰단에 관한 회고담에서 최초로 사용되었으며, 鄭玉子의<紳士遊覽團考>(≪歷史學報≫27, 1965)가 발표된 뒤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조사시찰단의 일본파견을 언급한 논저에서는 ‘日本遊覽朝士’(山口正之,<明治十四年の日本遊覽朝士>,≪文敎の朝鮮≫, 1930), ‘遊覽朝士’(田保橋 潔,≪近代日鮮關係の硏究≫상, 京城;朝鮮總督府 中樞院, 1940), ‘일본시찰반’(古筠紀念會 編,≪金玉均傳≫上, 東京;慶應出版社, 1944), ‘일본시찰단’(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김옥균≫, 평양;사회과학원 출판사, 1964), ‘일본국정시찰단’(愼鏞廈,<開化政策>,≪한국사≫16, 국사편찬위원회, 1975), ‘官紳視察團’(姜在彦,≪朝鮮近代史硏究≫, 東京;時事評論社, 1970), 그리고 ‘일본에 파견된 시찰단’(宋炳基,≪近代韓中關係史硏究≫, 단국대 출판부, 1985)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논저마다 그 호칭이 다른 이유는 당시 조선정부가 보수세력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조사시찰단 조사들을 동래암행어사로 임명했을 뿐 대외적인 공식 직함을 부여하지 않은 데 있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기록을 살펴볼 때 박정양 등 12명을 ‘신사’로 부른 것은 일본측이었으며, 조선정부는 이들을 일관성 있게 ‘조사’라고 지칭했다. 또한 이들 조사들에게 부여되었던 임무를 고려해 볼 때 ‘유람’이란 말도 현대적 어의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유람’의 원의는 문물과 제도를 살핀다는 뜻이지만 현재에는 본뜻이 전화되어 사용되므로 조사시찰단의 역사적 의의가 폄하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조사시찰단은 1876년과 1880년 두 차례의 수신사행을 통해 문호개방과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자각한 조선정부가 1880년 말에 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한 뒤 別技軍 창설, 領選使 파견, 그리고 미국과의 수교추진 등 일련의 개화·자강정책을 단행하면서 그 일환으로 파견하였다. 또한 그 파견은 수신사행들의 보고를 통해 일본의 발전상을 확인한 고종의 결단과, 조사시찰단 파견을 통해 대원군세력을 누르고 민씨세력을 신장하려 한 閔泳翊의 정치적 의도 및 개화승 李東仁의 숨은 노력이 결합해 조선측이 자발적·주체적으로 결행한 것이다. 특히 조사시찰단 파견의 결정적 계기는 고종의 결단이었다. 그렇다해도 조선정부가 사전 교섭이 없이 조사시찰단을 일본에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그 파견은 입안단계에서부터 조선에 대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의 확대를 노린 일본측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추진된 것이었다.233)許東賢,<1881年 朝士視察團의 活動에 관한 硏究>(≪國史館論叢≫66, 國史編纂委員會, 1995), 8∼16쪽.

한마디로 조사시찰단은 대외개방과 부국강병 등의 필요성을 절감한 조선정부가 독자적인 판단에 의해 파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1876년 이래 조선에 대해 ‘개화와 독립의 후원자’이자 ‘제국주의적 침략자’라는 양면적인 태도를 보인 일본이 능동적으로 협조함으로써 성사될 수 있었다.234) 柳永益,<한·미관계 전개에 있어서의 일본의 역할>(≪한·미수교 1세기의 회고와 전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136∼142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