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2) 고종의 밀명

(2) 고종의 밀명

조사시찰단 조사들의 임명시기는 1881년 (음)1월 11일에서 2월 26일 사이이었다. 이들에게는 각각 일본정부내 여러 성의 사무 및 세관사무, 기선운항과 육군 조련 등에 관한 사항을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고종의 밀명이 내려져 있었다.

1월 11일에 朴定陽·趙準永·嚴世永·姜文馨·沈相學·洪英植·魚允中 등 7명이 ‘동래암행어사’라는 직함으로 조사로 임명되었으며, 각자 일본의 내무성·문부성·사법성·공부성·외무성·육군성·대장성의 사무를 조사하여 보고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리고 어윤중과 홍영식에게는 미국과의 수교와 관련된 외교사항을 조사하는 임무까지 첨가되어 있었으며, 또 어윤중은 유길준을 비롯하여 자신의 수원들을 유학시키는 일도 맡고 있었다.

2월 2일에 李 永·閔種黙·趙秉稷·李元會가 동래암행어사로 임명되었다. 이헌영을 비롯한 세 사람은 세관사무를, 이원회는 육군의 조련상황을 조사해서 보고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 가운데 이원회는 2월 10일에 통리기무아문의 ‘軍械船艦事差定 參劃官’으로 임명되어 참모관 이동인과 함께 기선과 총포 구입계획을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닷새 후인 15일경 이동인이 실종되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빚어져서 26일에 조사로 복귀되었다. 그리고 이동인을 대신하여 金鏞元이 “기선운항에 관계된 제반사항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받아 동래암행어사 자격은 아니지만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합류하였다.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조사시찰단의 규모가 확대된 것은 당시 조선의 정치상황과 연관지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부가 1차로 박정양 등 일곱 명을 조사로 임명한 목적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전반적인 정세, 즉 ‘朝廷議論·局勢形便·風俗人物·交聘通商’ 등을 상세히 탐지하고, 정부 각 부서의 사무를 조사·파악해 조선 내정개혁의 지침이 될 방안을 강구하되 특히 1880년에 신설한 통리기무아문의 운영에 필요한 정보와 참고자료를 수집하는 데 있었다. 조사시찰단의 규모가 확대 개편된 것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최대 현안이었던 세칙에 관한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정부는 일본 쪽에 비교적 높은 세율의 차등관세와 개항장에서의 미곡 수출 금지 등을 규정한 세칙을 합의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에 앞서 인천을 먼저 개항할 것을 요구한 일본공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1882년 9월을 기하여 인천을 개항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와 같이 인천개항이 눈앞에 다가오고 세칙에 관한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조선정부로서는 앞으로 창설될 세관의 운영과 인천개항이 초래할 사회·경제적인 영향에 대비한 조치를 서둘러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2월 2일에 이헌영 등 세 명을 조사로 추가 임명하고 일본의 세관사무를 조사하여 보고하게 했다. 그러나 이헌영 일행은 임명되고도 한 달이나 지나서 출발했는데, 그것은 이동인의 갑작스런 실종으로 말미암아 인천개항에 대비한 기선과 총포 구입계획이 차질을 빚었던 때문인 듯하다.235) 許東賢, 앞의 글, 16∼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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