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3) 어떤 인물들인가

(3) 어떤 인물들인가

이처럼 중요한 임무를 띤 조사들은 어떤 기준에 의해 선발되었을까. 대부분의 조사들은 종실이나 벌족에 속하는 양반 명문가출신이었다. 또 연배가 2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인 이들은 과거급제 후 적어도 10년 가까이 관직에 몸담은 종2품계 이하 정4품계 이상의 중견 관료들로서, 일찍이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의 관등이나 경력에 비해 뒤떨어질 게 없었다. 그리고 이원회와 김용원을 빼놓고는 모두들 주로 홍문관이나 대간출신의 언관으로 학식과 문장이 탁월했고, 국왕의 近侍로서 국정 전반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경연에서 각종 정치문제에 대해 고종에게 조언했다. 또한 이들은 박정양과 강문형처럼, 조사시찰단을 파견하기 두 달 전에 대간들의 반대상소를 무릅쓰면서까지 유배를 풀고 다시 불러 쓸 정도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근왕세력이었다.

조사로서 선발되기 전에 박정양·엄세영·강문형·어윤중·이헌영은 암행어사로, 엄세영·강문형·민종묵·김용원은 청국 혹은 일본파견 사절로, 그리고 이원회·김용원은 군사전문가로 활약했듯이, 이들은 실무능력과 전문 지식을 겸비한 정예 관료였다. 이 가운데 어윤중은 1877년에 전라우도암행어사로 활약했을 때 고종으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아 조사로 발탁되었으며, 다른 조사들도 각각 학식이 풍부한 점이 높이 인정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조사들은 모두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난 뒤로 득세한 민씨파의 인물이었다.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공사의 보고에 의하면, 박정양·어윤중·조준영·홍영식·심상학·엄세영·강문형 등은 모두 ‘민씨당’의 사람들이었으며, 특히 어윤중과 홍영식은 조사시찰단의 파견을 후원한 민영익의 집을 드나들던 이른바 ‘8학사’에 속하는 인물로서 민영익과 친분관계가 두터웠고, 김용원 역시 민영익의 집을 출입하던 인물이었다.236) 許東賢, 위의 글, 20∼26쪽.

그러면 조사들을 수행한 수원들의 면면은 어떠했을까. 수원들도 대부분 양반출신이며, 그 가운데 崔成大나 王濟膺을 비롯한 몇 명은 오위장, 참봉 같은 하위 관리이기도 했다. 그 밖에 중인출신이 다섯 명, 尹致昊 같은 서출의 자제도 들어 있었다. 대체로 수원들은 조사들과 사적으로 이런저런 연줄이 닿아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姜晋馨·李弼永·閔載厚는 인척관계로, 李商在·兪吉濬은 조사들과의 친분이 있어 발탁된 것 같고 윤치호는 어윤중의 제자인 것이 인연이 되어 수원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향리를 지냈던 邊宅浩·全洛雲·高永喜·朴會植은 그 전에 일본에 갔었다는 점과 실무능력을 인정받아 선발된 듯하다.

또 어윤중의 수원이었던 유길준·윤치호·柳定秀·金亮漢은 조선 최초의 국비유학생으로 예정되어 선발된 인물들이다. 김용원의 수원인 孫鵬九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은 관직에 오르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는 과거를 포기한 이른바 ‘선각자’들이었다.237) 許東賢, 위의 글, 20∼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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