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4) 일본시찰 활동

(4) 일본시찰 활동

동래암행어사로 임명된 조사 12명이 출발지 동래부에 집결한 것은 3월 25일이었다. 29일에는 고종이 조사시찰단 경비로 하사한 5만 냥을 鄭秉夏가 가지고 와서 이것을 일본돈으로 환전하여 별도 파견 형식의 김용원을 제외한 11명에게 1,366엔씩 지급하였다(당시 환율은 일본돈 1엔에 대해 3냥 3전 3푼이었다). 4월 1일에는 辦察官 玄昔運을 통해 선박을 임대했으며, 3일에는 출항에 앞서 조사들이 경비를 염출해 강문형의 수원 변택호를 제주로 해신제를 올렸다. 5일에는 일본회사 스미토모(住友) 소유의 화륜선 안레이마루(安寧丸)가 도착하였고, 8일 조사시찰단은 일본영사관을 예방한 후 그 다음날 출항했다. 그러나 기상상태가 나빠 회항했다가 4월 10일(양력 5월 7일)에 다시 일본을 향해 출항했다.

조사시찰단의 규모는 조사와 수행원 62명을 비롯하여, 보수를 주고 고용한 일본인 통역 2명까지 포함하여 모두 64명이었다. 이 밖에 조사시찰단의 편의를 돌봐주기 위해 일본영사관 직원이 합류했다.

4월 11일 쓰시마(對馬島)에 도착한 조사시찰단은 일본측 지방관들의 접대를 받으며 나가사키(長崎)·오사카(大阪)·교토(京都)·고베(神戶)·요코하마(橫濱) 등지의 산업시설을 시찰한 다음, 같은 달 28일에 도쿄에 도착했다. 비록 조선정부나 조사들은 조사시찰단이 공식사절이 아님을 누차 밝혔지만, 일본측은 조사시찰단이 일본의 각 성과 세관, 산업시설, 군사시설은 물론이고 각종 기술에 이르기까지 제한 없이 둘러보고 조사할 수 있도록 협조했다.

조 사 수 원 통 역 하 인 일본인 통역
朴定陽 王濟膺·李商在 金洛俊 李秀(壽)吉 上野敬助
武田邦太郞
趙準永 李鳳植·徐相直   文順錫·崔允伊
嚴世永 嚴錫周·崔成大 徐文斗 朴春鳳
姜文馨 姜晉馨·邊宅浩 金順伊 劉福(卜)伊
沈相學 兪鎭泰·李鐘彬 金永得(正植) 尹相龍(商容)
洪英植 高永喜·咸洛基·全洛雲 白福周 鄭龍石(錫)
魚允中 柳定秀·兪吉濬·尹致昊·
黃天彧·金亮漢
  金永根
李 永 李弼永·閔建鎬 林基(箕)弘 金五文
閔種黙 閔載厚·朴會植 金福奎 李正(貞)吉
趙秉稷 安宗洙·兪箕煥 李章浩(金箕文) 林錫奎
李元會 宋憲斌·沈宜永 李壽萬 金鴻逵·李順吉
金鏞元 孫鵬九 金大弘  

<표>조사시찰단의 구성

李 永,<日槎集略>(≪(국역)해행총재≫11, 민족문화추진회, 1977), 72∼73쪽.
 朴定陽,<從宦日記:辛未-癸未>(≪朴定陽全集≫, 亞細亞文化社, 1984), 368∼370쪽.
 宋憲斌,<東京日記>(≪倭使日記·東京日記≫, 亞細亞文化社, 1975), 28∼29쪽.

조사시찰단은 일본정부의 협조를 받아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해당분야의 일본측 관리들과 접촉하였으며, 관련자료도 수집해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문으로 옮겼다. 일례로 세관사무를 담당했던 이헌영 같은 이는 도쿄로 가는 길에 들른 나가사키와 고베세관에서도 세관업무를 조사했지만, 본격적인 조사활동은 5월 4일과 5일 두 차례에 걸쳐 외무성 大書記官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少一)를 만나 조언과 협조를 얻으면서 시작되었다. 미야모토는 4일 세관사무를 조사해 보겠다는 이헌영에게 “먼저 관세국에 탐문해서 대략 세관의 개요만이라도 안 뒤에 요코하마에 가는 것이 좋을 것이고 세관사무 중 긴요한 사항은 써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조언했다. 다음날 이헌영은 관세국을 방문하여 같은 달 25일 요코하마세관을 방문하기 전까지 관세국 관계자들과 세칙에 관해 문답하고≪條約類纂≫등 관계서적도 빌려 오는 등 세관업무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나서는 6월 17일까지 요코하마세관에서 수입·수출·상품하역·감정 등 실무 전반을 중점적으로 조사하고, 7월 10일까지는≪조약유찬≫·≪釜山元山半年輸出入表≫·≪稅關事例≫ 등 그간 수집한 세관사무 관련문건들을 일본인 한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문으로 옮기고 내용을 교정하였다.

또한 조사들은 각자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메이지유신 이후 추진한 부국강병책의 결실이랄 수 있는 각종 근대시설과 육·해군의 훈련실황 등을 폭넓게 시찰·조사했으며, 또 정계·경제계·교육계 등 각 분야의 인사들과 교류했다. 물론 조사들간에는 시찰한 시설이라든가 접촉인사들의 범위와 수준에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박정양은 주로 자신이 담당한 내무성과 농상무성에 관련된 시설을 시찰하고 인사들을 접촉했으며, 다른 조사들도 주로 자신의 담당부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시설과 인사들을 시찰하고 접견했다. 그러나 이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일본의 근대시설들을 둘러보았고 여러 계통의 인사들과도 폭넓게 안면을 넓히려고 노력했다.

수원들은 보다 세부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송헌빈은 이원회를 보좌해 구마모토(熊本)포대·이다바시(板橋)화약제조소·사관학교·도야마(戶山)학교·군용전신국·근위병영·포병공창 같은 군사관계 시설을 주로 시찰하면서 일본의 군제를 폭넓게 조사했다. 또 그는 주로 포병공창에서 탄환·뇌관·화약의 제조법과 군사기술을 집중적으로 수집하였으며, 일제 무라타(村田)총과 미제 레밍턴(Remington)총, 전기지뢰와 같은 신식 화기의 성능과 전신 등의 통신체계 운용방법도 견학했다. 이 밖에도 그는 유리·설탕·성냥의 제조법과 도자기 채색기술, 제사·제지·조선 등의 일반 산업기술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말라리아치료법·키니네제조법과 같은 의료기술까지 조사·연구했는가 하면, 황산·초산·염산·염화칼륨의 제조공정도 상세하게 조사하였다. 특히 염화칼륨은 대량 생산할 경우 종래의 초목의 태운 재를 대체해 농업생산력을 급증시킬 수 있는 화학비료제조법이었으며, 황산·초산·염산 등도 비료·폭약 등 공업용·군수용 등 공업 일반에 폭넓게 응용될 수 있는 기초 화공약품들이었다. 요컨대 송헌빈은 일본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서양 근대기술 가운데 군사·산업·농업·의료 전 분야에 걸쳐 실용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은 거의 대부분 조사·연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조병직의 수원인 안종수는 서양식 근대농법의 수용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농업 관련학자와 관료를 두루 만났으며, 그 가운데는 일본의 대표적 농학자인 쓰다 센(津田仙)도 있었다. 안종수는 쓰다로부터 근대농학에 관한 지식을 배웠으며, 이를 바탕으로 귀국 후 1881년 말에≪農政新編≫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 밖에 최초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온 유길준과 유정수는 5월 12일(양력 6월 8일)에 慶應義塾에 입학했다. 이들의 입학은 당시 일본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는데, 이들은 경응의숙 최초의 외국인 유학생으로 입학해 서양 근대학문을 본격적으로 연마하였다. 윤치호는 원래 농업학교에 입학할 예정이었지만, 이노우에의 소개로 同人社에 입학해 일본어를 배우는데 주력했으며, 또 손붕구와 함께 만났던 주일 영국공사관의 서기관 사토(Ernest M. Satow)로부터 영어를 배우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윤치호가 영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1882년 말 수신사 朴泳孝와 함께 도일한 金玉均의 권고를 받은 뒤부터였다.

김양한은 조사시찰단이 귀국한 후 요코스카(橫須賀)조선소에서 항해술을 배우고 가마이시(釜石)광산에서 주철기술을 학습하여 1882년 11월경에는 일본정부로부터 자격증을 취득하기까지 했다. 손붕구는 원래 동경대학에서 의학을 연수하려 했으나 어학능력이 부족해 입학이 여의치 않자 시나가와(品川)유리공장의 견습직공으로 들어가 유리 제조기술을 배웠다.

어느덧 조사시찰단이 일본에서 시찰활동을 수행한 지 4개월이나 흘렀다. 조사 어윤중과 김용원, 그리고 유길준을 비롯한 유학생을 제외한 나머지 조사 10명과 그 수행원들은 일본시찰을 마치고 7월 14일에서 23일 사이에 도쿄를 떠나 귀로에 올랐다. 이들은 나가사키에 모두 모여서 윤7월 초하룻날에 귀국선을 타고 출항한 지 하루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그 후 이들은 8월 25일에서 9월 2일 사이에 고종에게 복명했고, 일본에 남아 있던 어윤중은 미국과의 수교협상과 관련한 특별 임무를 마친 뒤 11월 10일 부산을 통해 귀국해 12월 14일에 복명했으며, 김용원은 그대로 일본에 머물렀다.238) 許東賢, 위의 글, 26∼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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