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2. 신문명의 도입
  • 2) 청국유학생(영선사)의 파견
  • (1) 사행의 교섭

(1) 사행의 교섭

조선정부에서는 강화도조약의 체결 직후 일본을 통하여 서구문물제도와 특히 무비자강책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신무기 도입이나 학습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조약 자체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던 척왜론자의 주장이 지배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척왜론의 핵심은 斥邪論과 倭洋一體論이었다.

결국 무비자강책은 청을 통하여 강구하는 길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청나라의 總署나 북양대신 李鴻章 등 洋務관료가 조선정부의 이 정책을 적극지지하여 지원한 것은, 일본·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추진한 列國立約勸導策249)權錫奉,<李鴻章의 對朝鮮列國立約勸導策에 대하여>(≪歷史學報≫21, 歷史學會, 1963;≪淸末 對朝鮮政策史硏究≫, 一潮閣, 1986, 79∼116쪽).을 조선정부가 거부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그들이 추진한 정책과 병행되어야 할 정책으로 판단하였으며, 더욱이 자국의 국력의 한계를 인식한 바탕 위에 속방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정책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정부에서 軍械學造事의 가능성을 청측에 타진한 것은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같은 해인 1876년(고종 13) 9월이다. 조선정부에서는 사역원 副司直 李容肅의 사행편에 이 계획을 永平府知府 游智開를 통하여 이홍장에게 전하였으며, 이홍장은 이를 찬성하고 청측에 정식으로 요청할 것을 지시함으로써 유학생 파견의 단서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조선정부에서는 3년이 지난 1879년 8월에 이르러 비로소 청측과 교섭을 진행시켰으니 그 계기가 된 것은 이홍장에 의해 실천에 옮겨진 對朝鮮列國立約策에 관한 密函이 영중추부사 李裕元에게 전해짐으로써이다. 조선정부에서는 역시 이용숙 편에 유지개를 통하여 이홍장에게 열국입약책을 거부하면서 製器·練兵문제의 주선을 요청하였으며 이 때 또한 이홍장의 적극적인 지지와 요청 방법에 관한 지시가 있었다.250)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編,≪淸季中日韓關係史料≫2권, 光緖 5년 11월 15일, 北洋大臣李鴻章函(臺北;近代史硏究所, 1972), 394b∼395a쪽.
吳汝綸 編,≪李文忠公全集≫譯署函稿 권 10, 光緖 5년 11월 13일, 籌朝鮮(臺北;文海出版社, 1965), 15b∼17a쪽.

이와 같이 교섭이 성공한 다음 조선정부에서 이 문제에 관한 논의가 있었던 것은 그 다음해인 1880년 4월이다. 이 논의에서 이유원, 영돈녕 洪淳穆, 판부사 韓啓源, 영의정 李最應, 판중추부사 金炳國 등 모두가 인선·재정문제 등을 들어 신중론을 폈다.251)≪承政院日記≫, 고종 17년(1880, 광서 6), 4월 30일. 그러나 5월 25일에 고종은 결단을 내려 자문의 찬출과 賫咨官의 택정을 하명하였다.252)≪承政院日記≫, 고종 17년(1880, 광서 6), 5월 25일.

조선정부의 請咨文은 7월 9일에 別賫咨官에 임명된 卞元圭에 의해 부송되었고, 예부를 거쳐 光緖帝에게 奏明되었으며, 8월 29일 이 문제를 이홍장으로 하여금 妥籌하도록 유지가 있었다.253)≪淸德宗景皇帝實錄≫권 118, 光緖 6년 8월 29일(臺北;華文書局, 1970). 이에 따라 이홍장은 天津海關道 鄭藻如, 永定河道 유지개, 辦理軍械各局候補道 劉含芳, 候選道 王德均 등과 논의하여 제조뿐만 아니라 購器·練兵문제까지 확대하여 구체적인 세목을 결정하니<代朝鮮擬製器練兵各條>254)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淸季中日韓關係史料≫ 2권, 光緖 6년 9월 28일, 北洋大臣李鴻章文, 附件(3) 朝鮮派人來學製器練兵分條擬具淸摺, 462a∼430a쪽.
吳汝綸,≪李文忠公全集≫奏稿 권 38, 光緖 6년 9월 27일, 妥籌朝鮮製器練兵摺, 附件 朝鮮派人來學製器練兵分條擬具淸摺, 40a∼43a쪽.
가 그것이며, 이와 함께 유학생 파견의 절차·규모·규칙 등을 규정한<朝鮮國員弁來學製造操練章程>255)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淸季中日韓關係史料≫ 2권, 光緖 6년 9월 28일, 北洋大臣李鴻章文, 附件(2) 擬議該國員弁來學製造操練章程, 425a∼426a쪽.
吳汝綸,≪李文忠公全集≫奏稿 권 38, 光緖 6년 9월 27일, 擬議朝鮮來學章程片, 附件 朝鮮國員弁來學製造操練章程.
4조도 작성되었다.

製器는 화약·탄약제조에 중심을 두되 그에 필요한 畵圖·木樣·飜沙·鎗子捲銅·機器·熟鐵·火器·電機·火藥·䃨水 등 11科에 1명 내지 4명을 배정하고, 유학생의 연령은 15∼16세로부터 20세 내외자로 하며, 이들 38명을 天津機器局의 東·西兩局에 배정시킨다는 것이다.

購器·練兵에 대해서는 王城現兵 30,000명을 馬兵 3,000명, 礮兵 3,000명, 步兵 24,000명으로 구분하여 이들의 무장에 필요한 무기와 그 가격을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즉 마병용 무기는 毛瑟(mausser) 後膛鎗과 恩費爾來福(Enfield rifle) 前膛鎗을 반씩 병용하고, 보병은 20,000명이 무장하되 후당창 3,000정과 전당창 17,000정을 사용하고, 포병용으로는 克鹿卜四磅後膛銅礮(Krupp cannon) 18문과 兩磅過山後膛礮 18문 등을 책정하였고, 각 탄약가를 포함하여 총계 221,400량을 계상하였다. 이 무기의 조련을 위하여 弁兵 수십 명을 天津 鎗·礮隊에 배속시키는 한편 水雷·電機의 학습도 병행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議定 결과에 대하여 9월 29일 광서제는 軍機大臣에게 유지를 내려 재가하고 그 실행 여부는 조선국왕이 결정토록 하였으며,256)≪淸德宗景皇帝實錄≫권 120, 光緖 6년 9월 29일. 이러한 성공적인 교섭 결과는 11월 1일 본국에 전해져 이에 따라 유학생파견은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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