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정부에서는 강화도조약의 체결 직후 일본을 통하여 서구문물제도와 특히 무비자강책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신무기 도입이나 학습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조약 자체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던 척왜론자의 주장이 지배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척왜론의 핵심은 斥邪論과 倭洋一體論이었다.
결국 무비자강책은 청을 통하여 강구하는 길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청나라의 總署나 북양대신 李鴻章 등 洋務관료가 조선정부의 이 정책을 적극지지하여 지원한 것은, 일본·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추진한 列國立約勸導策249)權錫奉,<李鴻章의 對朝鮮列國立約勸導策에 대하여>(≪歷史學報≫21, 歷史學會, 1963;≪淸末 對朝鮮政策史硏究≫, 一潮閣, 1986, 79∼116쪽).을 조선정부가 거부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그들이 추진한 정책과 병행되어야 할 정책으로 판단하였으며, 더욱이 자국의 국력의 한계를 인식한 바탕 위에 속방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정책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정부에서 軍械學造事의 가능성을 청측에 타진한 것은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같은 해인 1876년(고종 13) 9월이다. 조선정부에서는 사역원 副司直 李容肅의 사행편에 이 계획을 永平府知府 游智開를 통하여 이홍장에게 전하였으며, 이홍장은 이를 찬성하고 청측에 정식으로 요청할 것을 지시함으로써 유학생 파견의 단서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조선정부에서는 3년이 지난 1879년 8월에 이르러 비로소 청측과 교섭을 진행시켰으니 그 계기가 된 것은 이홍장에 의해 실천에 옮겨진 對朝鮮列國立約策에 관한 密函이 영중추부사 李裕元에게 전해짐으로써이다. 조선정부에서는 역시 이용숙 편에 유지개를 통하여 이홍장에게 열국입약책을 거부하면서 製器·練兵문제의 주선을 요청하였으며 이 때 또한 이홍장의 적극적인 지지와 요청 방법에 관한 지시가 있었다.250)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編,≪淸季中日韓關係史料≫2권, 光緖 5년 11월 15일, 北洋大臣李鴻章函(臺北;近代史硏究所, 1972), 394b∼395a쪽.
吳汝綸 編,≪李文忠公全集≫譯署函稿 권 10, 光緖 5년 11월 13일, 籌朝鮮(臺北;文海出版社, 1965), 15b∼17a쪽.
이와 같이 교섭이 성공한 다음 조선정부에서 이 문제에 관한 논의가 있었던 것은 그 다음해인 1880년 4월이다. 이 논의에서 이유원, 영돈녕 洪淳穆, 판부사 韓啓源, 영의정 李最應, 판중추부사 金炳國 등 모두가 인선·재정문제 등을 들어 신중론을 폈다.251)≪承政院日記≫, 고종 17년(1880, 광서 6), 4월 30일. 그러나 5월 25일에 고종은 결단을 내려 자문의 찬출과 賫咨官의 택정을 하명하였다.252)≪承政院日記≫, 고종 17년(1880, 광서 6), 5월 25일.
조선정부의 請咨文은 7월 9일에 別賫咨官에 임명된 卞元圭에 의해 부송되었고, 예부를 거쳐 光緖帝에게 奏明되었으며, 8월 29일 이 문제를 이홍장으로 하여금 妥籌하도록 유지가 있었다.253)≪淸德宗景皇帝實錄≫권 118, 光緖 6년 8월 29일(臺北;華文書局, 1970). 이에 따라 이홍장은 天津海關道 鄭藻如, 永定河道 유지개, 辦理軍械各局候補道 劉含芳, 候選道 王德均 등과 논의하여 제조뿐만 아니라 購器·練兵문제까지 확대하여 구체적인 세목을 결정하니<代朝鮮擬製器練兵各條>254)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淸季中日韓關係史料≫ 2권, 光緖 6년 9월 28일, 北洋大臣李鴻章文, 附件(3) 朝鮮派人來學製器練兵分條擬具淸摺, 462a∼430a쪽.
吳汝綸,≪李文忠公全集≫奏稿 권 38, 光緖 6년 9월 27일, 妥籌朝鮮製器練兵摺, 附件 朝鮮派人來學製器練兵分條擬具淸摺, 40a∼43a쪽.가 그것이며, 이와 함께 유학생 파견의 절차·규모·규칙 등을 규정한<朝鮮國員弁來學製造操練章程>255)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淸季中日韓關係史料≫ 2권, 光緖 6년 9월 28일, 北洋大臣李鴻章文, 附件(2) 擬議該國員弁來學製造操練章程, 425a∼426a쪽.
吳汝綸,≪李文忠公全集≫奏稿 권 38, 光緖 6년 9월 27일, 擬議朝鮮來學章程片, 附件 朝鮮國員弁來學製造操練章程. 4조도 작성되었다.
製器는 화약·탄약제조에 중심을 두되 그에 필요한 畵圖·木樣·飜沙·鎗子捲銅·機器·熟鐵·火器·電機·火藥·䃨水 등 11科에 1명 내지 4명을 배정하고, 유학생의 연령은 15∼16세로부터 20세 내외자로 하며, 이들 38명을 天津機器局의 東·西兩局에 배정시킨다는 것이다.
購器·練兵에 대해서는 王城現兵 30,000명을 馬兵 3,000명, 礮兵 3,000명, 步兵 24,000명으로 구분하여 이들의 무장에 필요한 무기와 그 가격을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즉 마병용 무기는 毛瑟(mausser) 後膛鎗과 恩費爾來福(Enfield rifle) 前膛鎗을 반씩 병용하고, 보병은 20,000명이 무장하되 후당창 3,000정과 전당창 17,000정을 사용하고, 포병용으로는 克鹿卜四磅後膛銅礮(Krupp cannon) 18문과 兩磅過山後膛礮 18문 등을 책정하였고, 각 탄약가를 포함하여 총계 221,400량을 계상하였다. 이 무기의 조련을 위하여 弁兵 수십 명을 天津 鎗·礮隊에 배속시키는 한편 水雷·電機의 학습도 병행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議定 결과에 대하여 9월 29일 광서제는 軍機大臣에게 유지를 내려 재가하고 그 실행 여부는 조선국왕이 결정토록 하였으며,256)≪淸德宗景皇帝實錄≫권 120, 光緖 6년 9월 29일. 이러한 성공적인 교섭 결과는 11월 1일 본국에 전해져 이에 따라 유학생파견은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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