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2. 신문명의 도입
  • 2) 청국유학생(영선사)의 파견
  • (3) 학습상황

(3) 학습상황

영선사 일행이 북경에 도착한 것은 동년 11월 17일이었다. 김윤식은 예부에 咨文을 전한 다음 이홍장과 회담하기 위하여 22일에 保定府로 향발하였고, 유학생 일행은 27일에 북경을 출발하여 30일에 천진기기국에 도착하였고 대부분 南局에 머물렀다.

보정부에서 있었던 28일의 김윤식·이홍장의 제1차 회담에서 김윤식은 영선사의 임무가 군계학조사에 있음은 물론 聯美事에 있다는 것을 밝혔으며, 군계학조사에 대하여 언급된 것은 유학생의 연령, 유학 예정기간, 경비문제 등이었다. 그 후 11월 30일과 12월 1일에 제2차와 제3차 회담이 있었으나 논의된 것은 연미사에 관한 것뿐이었다.

12월 6일 천진에 도착한 김윤식은 청측의 軍械所觀察 劉含芳, 機器局總辦 許其光, 南局總辦 王德均, 東局總辦 潘駿德 등 관계위원과 더불어 學徒分廠에 관한 논의를 거듭하였다. 그 결과 우선 조한근·고영철·김광련 등 학도 3명이 水師學堂에서 실시한 시험에 합격하여 입당할 것이 결정되었으며(후에 학도 이희민이 추가되었다), 학도 최규한과 공장 박영조는 가장 연소하였기 때문에 水雷學堂 總兵 文瑞가 교습을 자청하여 16일에 입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연말이 되어 동·남국이 모두 放工할 때였으므로 유학생의 분창은 천연되었다. 그리하여 그 다음해 1월 8일 開工을 기하여 처음으로 분창이 실시되었으나 주로 동국에 소속된 유학생이 학습을 시작한 것이다. 그 후 1월 17일 남국의 유학생이 취업함으로써 유학생의 분창은 일단 완료하였다. 그러나 김윤식이 밝힌 바에 의하면 2월 초까지도 완전히 정리되지 못했다.265) 金允植,≪陰晴史≫하, 임오 2월 11일.

유학생의 분창상황을 2월 11일을 기준으로 하여 살펴보면 동국에 13명(학도 5명, 공장 8명), 남국에 12명(학도 5명, 공장 7명), 수사학당에 학도 1명, 수뢰학당에 2명(학도·공장 각 1명)으로 합계 28명이 학습하고 있었는데 다음의 도표와 같다.

學堂及廠名 학도·공장명 학 습 내 용 비 고








水 師
水 雷

銅 冒

䃨 水

機 器

木 樣
火 藥

化 學
電 氣
학도 高永喆
〃 崔圭漢
공장 朴永祚
학도 高永鎰·金光練
공장 河致淡
학도 金台善
공장 黃貴成
〃 崔志亨·宋景和·
安應龍
〃 張榮煥
〃 金興龍·金德鴻

학도 李熙民
〃 趙漢根

專習洋文·洋語

銅冒·後膛鎗子의 제법

黃䃨·硝䃨·鹽䃨·水硝䃨
등의 제법
修造機器의 조작법

畵本에 의한 모형제조법
화약제조법

각항 약물제조법
水電砲의 電理



학도 金光練은 水師
學堂에서 옮김





火藥廠八局 중 燒炭
局에 있었음
水師學堂 자퇴



畵 圖
電 氣
飜 沙
機 器
木 樣
火 器
학도 趙台源·安昱相
〃 安 浚·尙 澐
공장 崔同順·金泰賢
〃 金元永·韓得俊
〃 金聖元
학도 李南秀
諸廠機器의 제도법
陽電氣의 이론
銅鐵의 鎔鑄法
機器의 輪流
東局과 같음
화약제조법


공장 朴奎性이 일시
分隷되었음
공장 皮三成이 일시
分隷되었음

유학생의 分廠상황과 학습내용

유학생의 학습내용은 화약·탄약의 제조법에 한정한 것이 아니라 전기·화학·제도·제련·기초기계학 등은 물론 외국어에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유학생의 학습이 진행되는 동안 김윤식과 관계위원간에 논의된 것이 기기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유학생들이 귀국 후 실제로 전용할 수 있는 기기는 小手機器이어야 한다는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동국총판 반준덕은 김윤식에게 본국 설창에 관한 재정적 뒷받침이 없는 군계학조에 회의를 표시하였으며,266) 金允植,≪陰晴史≫상, 신사 12월 8일. 대부분의 관계위원들도 같은 이유로써 유학생이 학습하고 있는 기기의 부적성을 지적하였다.267) 金允植,≪陰晴史≫하, 임오 정월 24일. 김윤식 자신도 기기국의 규모를 목격한 후 그들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따라서 소수기기의 학습이 오히려 적당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리하여 때마침 北京神器營에서 銅冒手器를 학습하기 위하여 기기국에 공장들이 파견되어 있었으므로 銅冒廠의 유학생도 이들과 함께 학습토록 하였으며 䃨水廠에서도 역시 소수기기를 학습하게 되었다.

3월 17일과 25일에 유학생의 학습상황에 대하여 남국총판 왕덕균과 동국총판 반준덕은 각기 보고서를 이홍장에게 제출하였다.268)金允植,≪陰晴史≫하, 임오 3월 17일 및 3월 25일에 있는 남국총판 왕덕균의<詳報朝鮮學徒勤慢草>와 동국총판 반준덕의<詳報朝鮮學徒勤慢草>가 이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서 왕덕균은 남국 유학생에 대하여 비교적 좋은 평가를 내렸으나 반면 반준덕은 동국 유학생에 대하여 혹평을 가하고 있다. 유학생들이 儒雅의 기풍은 뛰어나나 疆毅의 자질이 부족하고 모든 것에 빠른 효과를 도모한다고 평하고 있으며, 특히 자질이 부족하여 이희민·조한근·김광련 등 수사학당의 학도 3명이 자퇴하였고, 공장 하치담이 동모창에 입창한 후 몇 차례 보고서도 손을 대지 못했다는 것 등은 관계위원에게 나쁜 인상을 주었다.

한편 본국에서는 유학생의 학습상황을 점검한다는 명목으로 통리기무아문 주사 魚允中과 李祖淵이 問議官으로 임명되어 2월 17일에 출발하여 3월 28일에 남국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2월 2일에 考選官으로 差下되었으나 그 다음날 문의관으로 改差되었다.269)≪日省錄≫권 255, 고종 19년 2월 3일. 그러나 이들은 그 전년 12월 19일에 보정부에서 있었던 김윤식·이홍장의 제4차 회담에서 조선사신을 초치하여 연미사를 협의케 하려는 이홍장의 의견에 따라 파송된 것이다. 따라서 유학생에 관한 임무로는 身病者와 無實效者를 송환한다는 것뿐이었다.270) 魚允中,≪從政年表≫, 고종 19년 2월 17일(國史編纂委員會 編,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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