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2. 신문명의 도입
  • 2) 청국유학생(영선사)의 파견
  • (4) 유학생의 철수

(4) 유학생의 철수

유학생이 철수하는 계기는 의외에도 빨리 왔다. 6월 9일에 야기된 壬午軍變이 그것이다. 이 군변소식이 김윤식에게 알려진 것은 6월 18일이며,271) 權錫奉,<大院君被囚問題에 대한 再檢討 上·下>(≪人文學硏究≫3·4·5, 中央大 人文學硏究所, 1976·1977;≪淸末 對朝鮮政策史硏究≫, 一潮閣, 1986, 195쪽). 그 다음날부터 기기국에 나가는 유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김윤식도 밝히고 있다.272) 金允植,≪陰晴史≫하, 고종 19년 6월 19일.

유학생 철수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물론 임오군변이나 이 계기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실정을 고려한다면 유학생의 조기철수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즉 귀국자의 속출, 재정적 곤궁, 본국 설창계획의 추진 등이 그것이다.

유학생의 중도 귀국자가 속출하게 된 중요한 원인은 신병과 無才였다. 유학생 중 최초로 귀국한 것은 1881년(고종 18) 12월 18일 별견당상 변원규의 귀국 편에 부송된 박태영·이창렬 등 학도 2명이었다. 그 다음해 1월 3일에도 학도 김성, 이현이 송환되었던 바, 후자는 김윤식·이홍장의 제4차 보정부회담 결과 본국정부에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전송된 것이다.

그 뒤 3월 6일 별차관 李應俊의 귀국 편에 학도 7명(이장환·정재규·이필선·고영일·김광련·이남수·최규한)과 공장 2명(장영환·피삼성)이 부송되었다. 이들 중 이장환·정재규·이필선 등 학도 3명은 무재자로서 당초에 분창되지 않았던 자이며, 그 밖에도 학도 2명(고영일은 聞其親病重, 이남수는 有故)을 제외하고 모두 분창된 후 무재자로 판정되어 송환된 것이다. 그리고 송환일자는 불명이나 동국총판의 보고서에 보면 학도 진상언과 공장 김성손이 귀국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월 3일에 공장 홍만길이 병사하였으며, 5월 1일 종사관 윤태준의 귀국 편에 병으로 인하여 공장 김흥룡·안응룡·최동순 등 3명이 부송되었다. 이렇게 하여 5월 초까지의 중도귀국자의 총수는 3월 22일 관변 백낙윤과 함께 귀국한 학도 상운을 포함하여 38명 중 19명에 달하였다. 이미 반수가 귀국한 것이다.

다음에 재정적인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881년 11월 28일 보정부에서 있었던 김윤식·이홍장의 제1차 회담에서 보면 경비로 한 사람에게 하루 1∼2냥이 粮銀으로 지급되기로 하였으며, 이 경비를 가지고 오거나 換給하기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윤식이 밝힌 바와 같이 包蔘을 換銀하여 경비로 쓰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특히 정월 이후에는 북경 玉河館 옆에 있었던 官號錢莊인 和豊局에서 차용하여 경비에 충당하였다.273) 金允植,≪陰晴史≫하, 고종 19년 4월 27일. 그러나 화풍국의 차관도 1월 하순에 이르면 여의치 못해 2월 초에 행중 일행의 경비문제는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

문의관 어윤중은 3월 28일에 천진에 도착한 후 이러한 재정 궁핍상을 목격하고 이를 본국정부에 보고하는 한편 김윤식과 함께 해결책을 강구하였다. 그 결과 천진해관도 周馥의 주선으로 招商局總辦 唐景星을 통하여 천진 동문 밖에 있는 華裕局에서 庫平銀 10,000냥을 차관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차관으로 경비와 債銀을 지불하였으나 그 동안 지급하지 못한 2월부터 5월까지의 四朔銀을 3분의 1을 삭감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경비는 여전히 궁핍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유국의 채은은 그 이후 10월 15일까지 16,000냥으로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중도귀국자의 속출과 재정적 궁핍은 유학생의 조기철수를 불가피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조기철수를 시사해 주는 것이 곧 김윤식과 관계위원간에 본국설창계획이 논의되고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이 계획에 대한 논의는 이미 2월 말부터 있었으나,274) 金允植,≪陰晴史≫하, 고종 19년 2월 30일. 김윤식은 영선사행이 점차 불리한 여건에 직면하게 되고 또한 군계학조사가 단시일내에 그 성과를 얻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됨에 따라 이 계획은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5월 23일에는 馬建忠 편에 통리기무아문의 下封書가 전달되었다. 이 하봉서에는 본국설창에 따르는 기기구입의 자금으로 6월 말 이전에 15,000∼16,000냥이 전송된다는 내용이 밝혀져 있었다.275) 金允植,≪陰晴史≫하, 고종 19년 5월 29일. 이렇게 하여 본국 설창계획은 추진단계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윤식은 군변소식을 들은 직후 어윤중과 더불어 주복을 통하여 청측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청조는 6월 29일에 김윤식과 어윤중 양인을 嚮導官으로 임명하는 한편 파병준비를 갖추었다. 이보다 앞서 어윤중은 6월 22일에 군변의 진상을 탐사하고자 조선으로 도해하는 北洋水師提督 丁汝昌과 더불어 超勇艦에 편승하여 귀국하였고, 김윤식도 그 뒤를 이어 7월 3일에 초상국 상선 日新號 편으로 천진을 출발하였다. 그는 5일 烟臺 부근의 해상에서 廣東水師提督 吳長慶과 회동하여 威遠艦에 편승하였으며, 경기 남양부에 도착한 것은 7일이었다.276) 金允植,≪陰晴史≫하, 고종 19년 7월 3·5·7일. 이 때 함께 귀국한 유학생은 학도 안준·조한근 등 2명이었으니 천진에 잔류한 유학생은 동국 9명, 남국 6명, 도합 15명으로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일단 귀국한 김윤식은 9월 29일 잔류유학생의 철수와 설창을 위한 기기구입을 위하여 천진에 파견되었다. 그는 종사관 金明均을 대동하고 問候官 李載德 일행과 함께 10월 6일 천진에 도착하였다.

김윤식은 유학생의 철수와 기기구입 문제에 관하여 10월 8일과 14일 두 차례에 걸친 이홍장 및 관계위원과의 회담을 가졌으며, 기기구입 문제를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즉 이 문제는 동·남국총판을 비롯한 관계위원과 협의하되 남국총판 왕덕균이 주관하고, 구입할 기기는 소수기기를 원칙으로 하여 그 종류도 銅冒·彈子小手機器에 한정하지 않고 수리기구·䃨水諸具·化學小試機器·電氣器具·水龍兩具·擧重器一具 등으로 결정되었다. 이 기기구입의 결정에 의하여 10월 15일에 약 5,000냥 상당의<購入機器品目>277) 金允植,≪陰晴史≫하, 고종 19년 10월 15일.이 전하여졌으며, 이 기기구입에 있어서 주선을 담당한 사람은 왕덕균, 주복 그리고 독일인 슈미트(Schmidt, 斯米德) 등이었다.278) 위와 같음. 이 밖에 남국에서 拉火手器를 비롯한 각종 서적이 기증되었고 또한 유학생들이 만든 각종 木樣과 圖樣도 전달되었다.

이렇게 하여 철수 준비를 갖춘 김윤식은 마침내 10월 16일 잔류하고 있었던 동국 유학생 7명, 역관 최성학 및 奴子 등을 영솔하고 귀로에 올랐다. 일행은 다음날 大沽 앞 海口에 이르렀으나 예정되었던 泰安艦이 오지 않아 대고로 회항하였고, 10월 19일 保大商船 편으로 연대로 향하였다. 이 곳에서 태안함의 내항을 기다리던 중 26일에는 조영하 일행과 정부에 고빙된 穆麟德(P. G. von Möllendorff) 일행이 도착하였다. 김윤식 일행은 이들과 함께 초상국총판 당경성이 주선한 초상국 상선 興感號에 편승하여 연대를 출발한 것이 28일이었고, 11월 1일에 경기 남양을 거쳐 인천에 도착하였다.

이와 같이 무비자강책의 강구라는 원대한 이상 아래 군계학조사라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고종 19년 9월 26일 본국을 출발한 영선사 일행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1년여 만의 유학기간(실제로 학습한 것은 6개월 정도이다)에 종지부를 찍고 전원 철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영선사행이야말로 고종 20년 3월 천진에 있었던 종사관 김명균이 天津工匠 袁榮燦 등 4명을 영솔 귀국하여 삼청동 北倉에 처음으로 機器廠279)≪漢城旬報≫1호, 조선개국 492년 10월 1일, 內國紀事(統理機務衙門 博文局 刊)에 보면, 이 機器廠의 규모에 대하여 “所立廠舍 卽飜沙·熟銕·銅冒及庫房”이라 하였다.을 창건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280)權錫奉,<領選使行에 대한 一考察-특히 軍械學造事를 중심으로->(≪歷史學報≫17·18, 1962;앞의 책, 147∼188쪽).

<權錫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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