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2. 신문명의 도입
  • 3) 미국시찰단의 파견
  • (1) 조미조약의 체결

(1) 조미조약의 체결

1882년(고종 19) 5월 22일 조선은 구미열강 가운데 미국과 최초로 朝美條約을 체결했다. 조미조약체결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해 본다면, 첫째로 조선은 斥邪·斥洋을 기조로 한 鎖國攘夷政策을 지양하고 개화·개항정책을 채택, 미국과 입약함으로써 명실공히 세계만방에 문호를 개방했다. 이로써 조선은 구미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둘째로 조선은 조미조약의 체결로 중국에 대한 사대외교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조선은 조미조약체결 1년 전에 국호를 ‘朝鮮’에서 ‘大朝鮮國’으로, 국왕을 ‘大君主’로 격상하는 등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체모를 갖추었다.281)≪高宗實錄≫, 고종 18년 윤7월 27일. 셋째로 미국은 對韓獨立國政策을 구현했다. 조미조약은 시종일관 조선대표의 참여 없이 李鴻章과 미국대표 슈펠트(Robert W. Shufeldt, 薛斐爾) 양자간의 교섭에 의해 타결된 조약이다. 이홍장은 對韓宗主權 유지를 위해 조미조약 제1조에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다”라는 屬邦論을 명문화할 것을 주장한 반면 슈펠트는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국 지위를 주장,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속방론문제로 회담이 결렬 위기에 봉착하자, 양자는 일보씩 양보하여 조약문에 속방론을 삭제하는 대신 조약체결 후 조선국왕이 미국대통령에 보내는 별도 조회문에 속방문제를 언급하기로 타결했다. 넷째로 미국은 조선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여 대등한 호혜평등의 입장에서 입약했기 때문에 그 당시 강대국과 약소국과의 조약체결에서 볼 수 있듯이 불평등조약이 아니라「쌍무적 협약」의 의미가 강하다는데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회는 1883년 1월 9일 속방조항이 삭제된 조미조약을 비준하자, 아더(Chester A. Arthur)대통령은 2월 13일 이를 최종 비준한 후 3월 9일 푸트(Lucius H. Foote, 福德, 1826∼1913)를 주한미국특명전권공사에 임명했다.282) 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舊韓國外交文書≫권 10, 美案 1(1967), 18쪽. 미국정부가 주한미국공사의 지위를 주청·주일공사의 지위와 동등 또는 그 이상의 ‘특명전권공사’로 격상한 것은 미국의「조선독립국정책」의 일환책으로 취한 조치이다. 미국은 청의 대한간섭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면서 조선을 완전 자주독립국이라는 한 개체로 인정했다. 가령 영국은 총영사를 파견, 주청영국공사의 지휘를 받도록 했고, 독일은 외교관 중 가장 낮은 영사를 서울에 주재시킴으로써 청의 對韓屬邦政策을 간접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이처럼 미국은 청의 대한속방정책을 전면 거부하고 특명전권공사를 서울에 주재시킨 것이다.

조미조약 제2조에 “본 조약을 입약하고 通商和好한 뒤에 양 체약국은 각각 외교대표를 상대국 수도에 주재할 수 있다. 이는 자국의 편의에 따른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외교관 교환원칙에 따라 초대 주한미국공사 푸트는 1883년 5월 19일 서울에 부임하여 조미간 비준문서를 교환했다. 그는 제시한 비준서에서 조선의 독립국 지위를 재천명하고 있다.

조선은 자치권이 있는 독립국가이다. 본 조약은 제3국과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권국가간의 협약에 의해 체결된 것이기에 비준한다(National Archives, Diplomatic Documents, President Chester A. Arthur to His Majesty, The King of Chosen, March 14, 1883).

다음날인 5월 20일 미국의 국서를 제정하는 자리에서 푸트는 또한 이렇게 언명하였다.

진보주의시대에는 상비군보다 더 강력한 ‘도덕적 힘’이 존재한다. 한 국가가 허약해지는 것은 이러한 ‘도덕적 힘’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우호국가간에 상호 자유로운 교섭을 통해서만이 최고의 문명국가를 성취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우리는 평등한 조약규칙을 준수하고, 국가보전을 보장한다(FRUS, Address of Mr. Foote to the King of Corea, 1883, p. 243).

이와 같이 푸트는 조미조약의 조약규칙을 준수하면서 조선의 국가보전을 위해 미국이 상비군보다 더 막강한 ‘도덕적 힘’이 되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푸트는 비준문서를 교환한 후 貞洞에 주한미국공사관을 개설했다. 조선정부도 조미조약 제2조에 명시되어 있는 외교관 교환이라는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미국 워싱턴에 조선전권공사를 파견 주재해야 한다. 그러나 재정적 부담 때문에 상주하는 공사관을 개설할 수 없었다. 이에 푸트는 상주하는 공사를 보내는 대신에 遣美使節團 파견을 제의했다. 7월 9일 조선정부는 푸트의 건의를 수용, 朝鮮報聘使를 워싱턴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푸트는 프릴링하이젠(F. T. Frelinghuysen)국무장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동양의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도 틀림없이 외국인 고문관을 다수 채용할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미국의 조선고문관 참여 여부는 조선보빙사가 미국에 가서 받은 인상 여하에 달려 있다고 본다. 현재 조선은 미국의 제도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Korea Despatches, vol. 1, Foote to Frelinghuysen, July 13, 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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