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2. 신문명의 도입
  • 3) 미국시찰단의 파견
  • (2) 조선보빙사의 미국파견 및 일정

(2) 조선보빙사의 미국파견 및 일정

조선정부가 견미사절단을 파견한 목적은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조선은 조선보빙사 미국파견으로 미국으로부터 공인 받은 완전 자주독립국이라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호기를 얻게 되었다. 미국은 朝美立約교섭에서 시종일관 청의 대한 종주권주장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외교책략에 따라 조선독립국정책을 관철시켰다. 조선정부는 미국의 대한정책을 전폭 수용하면서 견미사절을 파견했다. 둘째는 미국인 고문관·교사·군사교관 등을 다수 고빙하여 개화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조선이 전권공사를 미국에 파견한다는 것은 청국측 입장에서 보면 조선이 청의 정치적 영향권(宗主權)에서 완전 이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미수교 직후 임오군란으로 청은 대원군을 납치하고 對朝鮮종주권 확보를 위하여 묄렌도르프(P. G. Möllendorff, 穆麟德)를 파견하는 등 대조선 내정간섭을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은 조선보빙사의 미국파견을 반대하지 못했다. 그것은 밖으로는 安南(베트남)문제로 청·불전쟁의 처리문제, 임오군란 발발로 청·일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조선보빙사의 미국파견 반대로 미국과 외교적 분쟁을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283)Francis C. Jones, Foreign Diplomacy in Korea, 1866∼1894, Harvard University, 1935, p. 414.

1883년 7월 16일 조선정부는 마침내 견미사절인 조선보빙사를 임명했다. 그 구성원을 보면, 전권대신에 閔泳翊, 부대신에 洪英植, 종사관에 徐光範, 외국참찬관 겸 고문관에 미국인 로우엘(Percival Rowell, 魯越), 수원에 兪吉濬·崔景錫·邊燧·高永喆·玄興澤 외에 중국어 통역관 우리탕(吳禮堂) 등 10명이었다. 조선은 최초로 견미사절을 보냄에 있어서 외교에 너무 어둡고, 그 위에 언어장벽을 극복하기 어려운지라 조선보빙사 미국사행 임무를 끝까지 지도 안내할 미국외교관이 절대 필요했다. 이에 조선은 빙햄(John A. Bingham) 주일미국공사의 천거로 로우엘을 특채했다. 조선의 대미교섭은 로우엘을 통해 일본어를 통한 이중통역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로우엘은 영어에 능통한 일본인 宮岡恒次郞을 개인비서로 채용했다.284) 金源模,≪韓美修交史≫(철학과 현실사, 1999), 21∼121쪽.

조선보빙사 일행은 인천에서 아시아함대 소속 모노카시(Monocacy)호로 일본 요코하마(橫濱)에 도착, 東京에서 약 1개월간 체재한 후 8월 15일 아라빅(Arabic)호로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까지 대륙횡단철도로 약 1주일간 걸려 시카고를 거쳐 9월 13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외국특사가 오면 이들을 영접 안내하는 관리를 임명하는 것은 외교관례이다. 조선에서는 이를 接伴使라 하는 바, 미국정부는 조선보빙사를 안내할 접반사에 메이슨(Theodore B. Mason) 해군대위와 포크(George C. Foulk, 福久) 해군소위를 임명했다.285)Robert W. Shufeldt Letters(Library of Congress), Chandler to Davis, September 28, 1883. 그 당시 아더대통령은 뉴욕에 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보빙사는 메이슨과 포크 두 사람의 안내로 9월 17일 뉴욕에 도착, 대통령이 묵고 있는 피브스 애버뉴호텔에 투숙했다.

국서제정식은 1883년 9월 18일 오전 11시에 호텔 대접견실에서 거행되었다. 전권대신 민영익을 비롯하여 사절단 전원이 紗帽冠帶로 정장하고 일렬 종대로 대접견실로 나아갔다. 흉배와 각대를 두른 청홍 색깔의 사모관대 차림은 조선의상의 화려하고도 황홀한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대접견실 중앙에 아더대통령이 국무장관과 함께 서 있었는데, 조선보빙사 일행은 민영익을 선두로 차례대로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렸다. 대통령은 서서 허리를 굽혀 답례했다. 1860년 일본 최초의 견미사절은 선 채로 허리를 굽혀 대통령에게 인사한 것과 대조적이었다.286) New York Times, September 18, 1883.
Frank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 September 29, 1883.
≪万延元年 遣米使節史料集成≫권 1(豊間書房, 1961), 124쪽.

인사가 끝난 후 민영익 전권공사는 대통령에게<대조선국 국서>(신임장, 全權憑據)을 제정했다. 한글본<대조선국 국서>287)이「한글 국서」는 한문으로 된 국서를 번역하여 미국신문에 전문이 게재되었다. 한글문서가 미국신문에 소개되기는 처음이다. 원문은 구철자 순한글로 되어 있고, 이해를 돕기 위해 한자를 병기했다.는 다음과 같다.

됴선국군주(大朝鮮國大君主) 미국니텬덕(大美國伯理璽天德, 대통령)게 글월을 올니 이이 두나라이 됴약(條約)을 박구고 화의(和誼)가 돗타우 전권신(全權大臣) 민녕익(閔泳翊)과 부신(副大臣) 홍영식(洪英植)을 흠차(欽差)여 귀국(貴國)의 보서 폐(幣帛) 갑 녜(禮)을 닥긔노니 이 신(大臣)들이 공번(公反)되며 충성(忠誠)허며 주밀(周密)며 자서(仔細)여 능(能)히 의 속마음을 몸바더 고달(告達)헐 터이며 범사(凡事)의 변리(辨理)허미 적당(適當)허리니 다(多幸)히 라노니 정성(精誠)을 미루어 서루 미더서 더욱 화목(和睦)케 며 한가지 평(泰平)을 누리게 시 각허건 한 귀니텬덕(貴伯理璽天德)도 깃거허실리이로소이다 국구십이년 뉵월 십이일(開國 四百九十二年 六月 十二日)(New York Herald, September 19, 1883;≪舊韓國外交文書≫ 권 10, 21쪽).

민영익은 국서를 제정하고 다음과 같은 提呈辭를 했다.

신(使臣) 민녕익(閔泳翊) 홍영식(洪英植) 등(等)은 낫흐로 아미리가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니쳔덕(大伯理璽天德)게 알외이다 신등(使臣等)이 됴선국(大朝鮮國) 군주(大君主) 흠명(欽命)을 밧와 와서 신(代身)으로 니쳔덕게서와 밋 합중국 모든 인민(人民)이 한가지로 안녕(安寧)험을 누리시기을 쳥(請)오며  두나라 인민이 서로 사귀고 죠와허 우의(友誼)에 확실헌 슬 고여 피차 돈밀(敦密)을 각허와 실상(實狀)으로 서루 직흼을 정(定)여 기리 무궁(無窮)헌 복(福)이 되기을 라이다 밧드러온 바 국서(國書) 두 봉(封)의 나 우리 군주게서 니쳔덕게 회답(回答)허심이오 나 신의 전권빙거(全權憑據)오니 삼가 밧침을 알외이다(New York Herald, September 19, 1883).

아더대통령은<대조선국 국서>와<대조선국 대군주회답>을 받고 다음과 같은 답사를 했다.

우리는 주위에 수많은 도서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한반도와 그 산물, 그리고 조선백성의 근면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귀국 인구는 우리 나라가 독립 당시의 인구의 두 배나 됩니다. 우리 양국의 영역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대양도 이제는 증기기선 항해의 도입과 완비로 편리하고도 안전한 교역의 大公路가 된 것입니다. 우리 공화국은 과거 역사에서 보듯이 다른 나라 영토를 점령 지배할 의도는 없으며 오로지 상호 우호적 관계와 호혜적 교역을 통해 이익을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Notes From the Korean Legation, Draft;FRUS, President Arthur Address to the Representatives of Tah Chosun Corea, 1883, pp. 249∼250).

국서제정식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해 본다면, 첫째로 조선은 최초의 미국사행을 통하여 자주독립국가라는 사실을 세계만방으로부터 국제적 공인을 받게 되었다. 국서에 ‘대조선국’·‘대군주’를 최초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연호를 버리고「開國年號」만 사용했다. 조미조약에는 청국 光緖연호와 개국연호를 병기했는데, 국서에는 아예 광서연호를 폐기하고 개국연호만 사용했다. 이는 독립국가임을 상징하고 있다. 둘째, 조선사신은 국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미국신문에 게재함으로써 조선이 중·일과 상이한 독자적인 고유의 표음문자「한글」을 가진 문화국가임을 전세계에 과시했다. 셋째로 조선은 주체의식을 살린 자주외교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조미조약 영문본에는 조선을 일본어식으로 ‘Chosen’이라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일제히 대조선을 조선어식으로 ‘Tah Chosun’, 조선인을 ‘Chosunese’로 표기함으로써 조선은 비로소 종속외교의 기반으로부터 벗어났음을 강조하고 있다.288) Notes From the Korean Legation, Draft.
FRUS, Persident Arthur Address to the Representatives of Tah Chosun, Corea, 1883, pp. 249∼250.

국서제정식을 엄수한 후 조선보빙사 일행은 동부지방의 산업시찰 여행길에 올랐다. 보스턴·로우엘 등 산업도시를 순방하면서 사절단이 유숙하는 호텔에는 으레 태극기를 게양하여 조선사절단의 위엄을 과시했다. 견미사절은 미국사행 때 새로 제정한 태극기(1883년 3월 6일 국기제정 반포)를 휴대하고 도미, 이를 호텔 옥상에 게양함으로써 견미사절단의 위엄을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국위를 선양했다. 사절단은 동부지방의 방적공장·미국박람회·월코트농장(Wolcott Farm) 등을 시찰하면서 미국의 선진 영농기술을 도입, 조선의 농업 근대화사업에 착수하고, 서울에서 국제박람회를 개최할 것임을 발표했다.289) Boston Daily Globe, September 19, 1883.
New York Herald, September 27, 1883.
New York Times, September 27·October 23, 1883.
George M. McCune and John A. Harrison, ed., Korean∼American Relations, Vol. 1,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51, pp. 32∼34.

동부지방 시찰을 끝낸 조선보빙사는 뉴욕으로 돌아와서 뉴욕의 각 공장 그리고 뉴욕 헤럴드 등 신문사·소방서·육군사관학교·우체국 등을 시찰했다. 특히 공장견학 때 유길준은 전기불을 보면서 ‘마귀불’이라 불렀다.

우리는 일본에서 전기용품을 본 일이 있다. 그러나 전기불이 어떻게 켜지는지 몰랐다.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마귀(devil)의 힘으로 불이 켜지게 된다고 생각했다(New York Herald, October 15, 1883).

뉴욕시찰을 완료한 조선보빙사는 워싱턴으로 가서 미국정부 각 부처를 순방했다. 특히 농무부를 방문했을 때, 미국 영농기술도입에 강한 의지를 표명하여 각종 농작물 종자 및 영농책자를 얻었다. 우체국을 방문했을 때 홍영식은 우편제도의 도입에 열의를 보였다. 시찰여행을 끝낸 조선보빙사 일행은 10월 12일 백악관을 예방, 아더대통령에게 고별인사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아더대통령은 미국 해군함정 트렌턴(Trenton)호로 전권공사 민영익 일행을 호송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리면서 항행비용도 미국 해군이 부담하게 조처했다.290)Harold J. Noble, “The Korean Mission to the United States in 1883,” Transactions(1929), p. 14.
FRUS, Corea, Frelinghuysen to Foote, November 12, 1883, p. 125.

대통령고별인사를 끝낸 조선보빙사는 두 패로 나뉘어 귀국하게 되었다. 부사 홍영식은 참찬관 미국인 로우엘, 중국인 吳禮堂, 수원 현흥택·최경석·고영철, 로우엘의 개인비서 宮岡恒次郞 등을 대동하고 10월 16일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정사 민영익은 종사관 서광범, 수원 변수, 해군무관 포크 등과 함께 트렌턴호로 대서양을 항행, 6개월간 유럽 각국을 순방하면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의 세계일주 항행 후 귀국하였다. 미국이 중·일에도 없는 해군무관을 조선에 파견한 것은 이례적인 조치이다. 유길준은 민영익의 특별배려로 조선인 최초의 미국유학생 제1호로서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고 미국에 남아 공부하게 되어서「단발 제1호」가 되었다.291) New York Times, November 8·16, 1883.

정사 민영익과 부사 홍영식이 동행 귀국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귀국하게 된 이유를 추구하는 것이 갑신정변 발발의 원인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편의상 개별귀국설’과 ‘양자간의 정견분열로 인한 개별귀국설’ 두 가지 시각이 대립되고 있다. 정·부사는 사행임무를 끝마치고 동행귀국이 일반적 관례이기 때문에 편의상 개별귀국설은 설득력이 없다. 역사적으로 遣外使節간 정견분열로 말미암아 국가적 위난과 외세침략을 당한 일이 있었으니, 임진왜란 직전 日本通信使 정사 黃允吉과 부사 金誠一간의 정견충돌로 말미암아 7년 전란의 환난을 당한 일이 있다. 견미사절의 경우도 정·부사간「政見不和」로 말미암아 갑신정변이 발발한 것이다. 원래 민영익과 홍영식은 뜻을 같이하는 개화파의 동지였다. 민영익을 조선보빙사에 천거한 것도 개화파 영수 김옥균이었다. 그러나 미국사행이 개시되면서 민영익은 민씨 척족세력의 영수로서 친청사대주의 정치노선을 취하고 있었고, 홍영식은 배청·자주독립 노선을 취하면서 양자간 심각한 정치적 갈등과 의견충돌을 빚었기 때문이다. 워싱턴에서의 양자간 정견대립은 노골화되었다. “홍영식은 워싱턴 체재중 민영익과 정견의 충돌을 보게 되었다. 후자는 사대주의를 고집하는데 대해 전자는 독립자주를 역설한 결과 마침내 단호히 손을 뿌리치고 동서로 分路하여 후자는 유럽漫遊의 길을 떠나고, 전자는 태평양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292) 閔泰瑗,≪金玉均傳記≫(을유문화사, 1969), 72∼73쪽. 이와 같이 양자간의 정견분열은 갑신정변 발발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민영익과 홍영식 사이의 정견분열로 인한 개별귀국설에 대해서는 수행원 유길준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얼마 안 되어 내가 유학차 미국으로 갈때 일본 동경에서 홍영식과 같이 김옥균을 만나 정치개혁문제를 의정한 바 있다. 김옥균은 나라 밖에서 군사를 양성하고, 홍영식은 나라 안에서 서울주둔 청·일양국 군대를 철수하도록 권고하고, 약 5년 후 거사하기로 했다. 나는 일개 서생으로 이러한 거사계획에 참여할 수 없었고, 다만 이 두 사람의 거사계획담을 듣고만 있었다(≪兪吉濬全書≫권 5, 시문편 書趙忠定公, 一潮閣, 1971, 263∼265쪽).

이와 같이 조선보빙사가 도미 도중에 동경체재 1개월간 홍영식은 정사 민영익을 따돌리고, 유길준과 함께 그 당시 차관교섭차 동경에 머물고 있는 金玉均을 은밀히 만나 갑신정변 거사계획을 구체적으로 협의했다. 뿐만 아니라 홍영식은 미국사행 임무를 완수하고 귀국길에 동경을 재방문하여 김옥균을 만나 차관문제를 협의했는데, 이는 바로 거사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홍영식은 1883년 12월 22일 복명한 그 날로 성급하게도 푸트공사를 찾아가 차관교섭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는 사실이다.293) 尹致昊,≪尹致昊日記≫ 권 1, 1883년 12월 22일(國史編纂委員會 編,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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