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2. 신문명의 도입
  • 3) 미국시찰단의 파견
  • (3) 조선보빙사 파견의 성과

(3) 조선보빙사 파견의 성과

조선보빙사의 미국파견의 성과에 대하여 민영익은 “서울을 떠날 때 푸트공사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미국정부는 우리를 대대적으로 환영할 것이고, 우리는 미국의 각 공공기관을 시찰할 뿐만 아니라 증기기관과 전기시설까지 시찰할 것이고, 조선에서 볼 수 없는 기타 많은 문물을 보고 듣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친절한 격려의 말씀에 감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의 말씀은 현실화되었다. 오히려 푸트가 언급한 이상으로 우리는 친절한 환대를 받았고, 그래서 우리는 미국정부와 각 공공기관에 대해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294) New York Herald, October 15, 1883.

민영익 일행은 12월 1일 트렌턴호를 타고 유럽 각국 순방여행길에 올랐다. 민영익 일행은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 그리고 아프리카의 이집트까지 시찰한 후 수에즈운하를 거쳐 인도양을 항행, 남중국해를 통과, 1884년 6월 2일 귀국하여 복명했다.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의 세계일주 항행을 완수한 셈이다. 트렌턴호의 6개월간 함상생활에서 포크 해군무관은 민영익과 서광범·변수 사이의 구미문물 견학시찰의 반응이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나는 이들과 8개월간 가깝게 사귀었다. 민영익은 처음에는 국가발전을 위해 정력적인 노력을 경주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관찰해 본 결과 그는 마음이 약하고 변덕심이 심한 성격의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유교관계 漢籍만을 탐독하고 있었는데, 이 같은 그의 수구적 태도는 슬프게도 모처럼 구미 선진문물을 관찰하고 계몽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 같이 보여서 안타까웠다. 이에 반하여 서광범·변수는 내가 백과사전을 번역하여 설명해 주면 자기 나라에 유용한 사항을 노트에다가 적는데 지칠 줄 모르는 열의를 보였다(McCune and Harrison, op. cit., pp. 101∼111).

6월 2일 제물포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서광범은 포크에게 민영익이 도미할 때에는 개화의지를 가지고 출발했지만 구미 선진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하면서부터는 附淸的 정치노선을 취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결국 민영익은 견문한 진보사상을 버리고 보수반동적 사대주의사상으로 후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295) Noble, op. cit., p. 17. 서광범은 귀국 직후 정치개혁을 통해 개화운동을 벌임으로써 근대화를 이룩해야 하며, 이러한 거창한 개화사업을 추진하려면 슈펠트를 정치고문으로 雇聘할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296) Korea Instructions, vol. 1, Frelinghuysen to Foote, November 12, 1883.
Shufeldt Letters, Foulk to Shufeldt, February 26, 1884.
민영익은 구미여행 소감에 대해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서 광명세계로 들어갔다가 이제 또다시 암흑세계로 되돌아왔다”297) FRUS, Foote to Frelinghuysen, June 17, 1884, p. 126.라고 솔직히 피력하고 있다. 홍영식도 “어둠 속으로부터 나와 눈부신 광명세계로 뛰어들어간 기분이다”298) Noble, op. cit., p. 16.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와 같이 민·홍 양인은 다같이 암흑세계로부터 광명세계로 들어갔다는 데는 공통점을 이루고 있지만, 홍영식은 광명세계에서 견문한 구미 선진문물을 도입하여 정치적 개혁을 통해 개화운동의 열의를 보인 반면, 민영익은 개화의지를 부정하고 부청정책으로 보수반동적 사대주의 정치노선을 취한 것이다.

조선정부가 견미사절을 파견한 일차적 목적은 조미조약 제2조의 외교관 교환이라는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사절단을 보냈지만, 주목적은 미국의 선진문물을 도입하여 개화운동을 벌여 보겠다는 데 있다.

첫째로 조선은 고문관·교사·군사교관을 고빙하여 정치개혁을 통해 개화사업을 이룩하려고 했다. 조선정부는 견미사절을 파견한 후 10월 19일 푸트공사에게 직접 고문관·군사교관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실제로 민영익도 미국정부에 대해 교사·고문관·군사교관 등을 파견해 줄 것을 정식 요청했다.299) Korea Despatches, vol. 1, Foote to Frelinghuysen, October 19, 1883.
Jones, Foreign Diplomacy in Korea, p. 415.
둘째로 미국문화의 수용이다. 이 취지에 따라 민영익은 유길준을 미국에 남게 해서 최초의 국비유학생이 되었다. 셋째로 조선은 미국의 선진 영농기술을 도입, 농업근대화를 성취하려고 시도했다. 이 취지에 따라 최경석은 실제로 농무부로부터 각종 농작물의 신품종 종자 및 농기구뿐만 아니라 심지어 각종 가축까지 도입하여 忘憂里 밖에 農務牧畜試驗場을 개설 운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넷째로 제도의 개혁이다. 홍영식은 귀국 복명하는 자리에서 대군주에게 미국의 선진제도를 본받아 제도개혁을 단행할 것을 역설하였고, 그의 주장대로 한국 최초의 미국식 우편제도를 도입, 郵征局을 창설하고 그 자신이 우정국 總辦에 취임하였다.300) 金源模,<遣美使節洪英植復命問答記>(≪史學志≫15, 1981), 183∼230쪽.

그러나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발발로 이 같은 의욕적 개화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교사·고문관·군사교관이 도착하기는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1886년 7월이었다. 한국 최초의 국비 미국유학생 유길준은 고국에서의 정변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고, 최경석의 농무목축시험장은 성공적으로 개장하여 한국 농업근대화에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최경석이 1886년 급사함으로써 농업근대화의 꿈은 무산되었다. 끝으로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은「위로부터의 정치적 개혁」을 통해 개화사업을 성취해 보고자 정변을 주도했으나 청군개입으로 인한 거사실패로 그의 근대화 기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金源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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