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3. 제도의 개혁
  • 1) 정치·군사부문
  • (1) 정부기구의 개편

(1) 정부기구의 개편

조선국왕 고종은 강화도조약체결 이후 종래의 의정부와 삼군부체제로는 새로운 대내외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의정부 중신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정부 관료들은 사대교린체제에 안주하려 하였으므로 새로운 국제관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동래부사를 비롯한 지방관으로부터 예조, 의정부로 이어지는 외교통로와 일본 외교관의 도래 또는 외교적 현안이 발생할 때 임시로 마련되는 接見官 講修官 임명 등을 통한 양국관계의 처리는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현안처리 기일이 지연되거나 담당관료들의 의식 차이에 따른 사안 처리의 일관성 결여로 분쟁이 끊이지 않는 등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또한 대원군이 서양세력의 통상요구를 거절하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신무기를 개발하고, 해안경비를 강화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는 동안 중시되었던 삼군부는 대원군이 실각하고 일본의 강압적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무력감을 드러내었다. 조선 후기 비변사가 국방문제를 비롯한 대내외 문제 전반을 다루었다면 삼군부는 邊情과 군사문제에 국한하여 그 권한을 행사하도록 조치되어, 1871년의 신미양요 당시에는 그런 대로 그 존재 가치를 발휘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이 실각하고 雲揚號사건에서 일본의 무력시위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던 삼군부는 유명무실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301)≪承政院日記≫, 고종 17년 12월 20일.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외교적 현안은 더욱 증대되었고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열강의 위협 또한 계속 증대되었다. 조선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효과적인 외교와 武備自强策을 강구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조선국왕 고종은 수신사의 보고를 통해 일본의 발전상을 알게 되었고, 또한 일본과 러시아의 위협이 증대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에 대한 수교의 유용성도 알게 되었다. 서양의 새로운 문물도입을 통한 부국강병책의 마련이 시급함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이를 위한 새 기구의 설치를 마련토록 지시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련된 새 기구가 통리기무아문이었다.302)統理機務衙門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로 그 설치 경위와 조직 및 기능이 밝혀졌다.
全海宗,<統理機務衙門 設置의 經緯에 對하여>(≪歷史學報≫제17·18집 1962).
李光麟,<統理機務衙門의 組織과 機能>(≪開化派와 開化思想 硏究≫, 一潮閣, 1989).

통리기무아문 설치의 직접적인 계기는 새로운 기계제조 기술을 배우게 해달라는 조선정부의 청원에 대한 청나라의 답신이 오면서부터였다. 새로운 무비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은 1880년 4월 사역원에 명하여 기기의 수입 및 기계제조 기술의 학습에 대한 청나라의 협조를 구하는 문안을 작성토록 지시하는 한편 정부에 대하여 청에 파견할 인재들을 천거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정부는 무비강구의 자문을 만들어 청나라에 보냈고, 청나라는 조선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기계제조 학습에 대한 청나라의 수락통보를 받은 고종은 바로 이 문제의 처리와 사대·교린·변정 등에 관한 일을 맡을 새로운 기구의 설치를 명하였다.303)≪備邊司謄錄≫261, 고종 17년(1880) 12월 7일. 이어 신설 기구에 대한 절목을 빨리 만들어 바치도록 독촉하였다.304)≪備邊司謄錄≫261, 고종 17년 12월 17일.

국왕의 독촉을 받은 의정부는 대신과 참찬, 그리고 유사당상들과 의논하여 절목을 만들어 바치는 한편 신설아문의 처소 마련이 쉽지 않음을 호소하였다. 이에 대해 국왕은 “삼군부의 설치가 비록 여러 해가 되었으나 지금은 한만한 직책이니 이를 혁파해서 신설아문의 처소로 삼도록 하라”고 답하였다.305)≪備邊司謄錄≫261, 고종 17년 12월 20일. 이렇게 해서 마련된 통리기무아문은 事大司·交隣司·軍務司·邊政司·通商司·軍物司·機械司·船艦司·譏沿司·語學司·典選司·理用司 등 12개사로 조직되었다.306)全海宗, 앞의 글, 689쪽.
李光麟, 앞의 글, 6쪽.
통리기무아문은 군국기무를 總領할 수 있도록 정1품아문으로 그 지위가 보장되었고, 대신 중에서 총리를 임명하고 시·원임대신으로 이 기관의 都相을 겸하게 하였다. 따라서 1881년 1월 19일(음력 12월 20일) 아문이 설치되자 당시의 실력자들이 당상으로 임명되었고, 중견 인물들이 각사의 낭청에 등용되었다. 또한 외무를 처리하여야 했으므로 외국어에 밝은 漢學과 倭學의 역관들을 참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당시 비상한 인물로 알려진 수문장 이제마(한의)와 별선군관 이동인(승려) 등이 참모관으로 발탁되었다.307) 李光麟, 위의 글, 4∼11쪽.

이렇게 출발한 통리기무아문은 나라의 모든 중요 기밀을 취급하게 되어 처음 삼군부 자리에 있다가 그 처소를 궁궐 안 內兵曹·典設司 근처로 옮기게 되었다.308)≪承政院日記≫, 고종 18년 1월 17일·18일. 그러나 12사는 그 설립 취지에 비해 업무처리와 효율성에 문제가 있었던 듯 1881년 12월에 이르러 사대사와 교린사를 통합하여 同文司로 합치는 등, 軍務司·通商司·典選司·律例司·監工司 등으로 축소 조정되었다.309)≪高宗實錄≫, 고종 18년 11월 9일. 주로 대외문제의 효과적인 처리를 위해 설치되었던 통리기무아문은 대외문제 만이 아니라 군국기무와 관련된 내정문제도 처리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비변사와 같이 국정의 최고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종은 통리기무아문을 중시하여 아문의 현판을 직접 써서 하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의 각사 제궁과 지방 8道4都로부터 대·소 업무를 보고 받아 처리하도록 하였다. 평상시 국왕과 차대할 때에는 경리당상들이 모두 모여 국정을 협의 결정하고, 긴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각사의 당상들이 일단 궁궐 밖에 모여 협의한 뒤 국왕에게 보고하도록 함으로써 통리기무아문은 국가의 모든 중요한 문제에 관여하였다.310) 李光麟, 앞의 글, 12∼23쪽.

통리기무아문은 설치된 이후 제일 먼저 領選使의 파견문제를 처리하였다. 영선사란 새로운 군기제조의 기술습득을 위하여 학도와 공장을 인솔하고 청나라에 갔던 사신을 말하는 것으로, 이에 대한 조선의 청원이 청나라에 의해 받아들여지면서 이의 처리가 통리기무아문 설치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므로 당연하다 하겠다. 다음으로 통리기무아문은 일본의 신문물 시찰을 위한 신사유람단 파견, 신식 군인 별기군 설치와 군제개편, 미국을 비롯한 서양제국과의 수호조약체결 등을 추진하여 개화정책 담당기구로서 기능을 발휘하였다. 이외에도 일본인의 침투가 심해진 울릉도에 대한 검찰관의 파견, 해로의 요충지인 동래부 절영도에 鎭을 설치하는 문제, 재정문제 해결을 위한 鑄錢, 금은채광과 包蔘管理 문제 등 각종의 현안을 처리하였다.311) 위와 같음.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통리기무아문은 폐지되었다. 보수적 유학자들을 비롯한 개화 반대세력들은 개화정책 추진에 앞장서 온 통리기무아문과 신식 군대인 별기군의 폐지를 주장하였고,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별기군이 설치되면서 소외되고 차별대우를 받았던 구식 군인들의 난을 계기로 대원군은 정권을 잡게 되었고, 별기군의 해체에 이은 군제의 복구와 더불어, 과거 대원군의 攝政기간에 중시되었던 변정·군사기구인 삼군부의 권한이 다시 부활되면서 통리기무아문은 혁파되었던 것이다.312)≪承政院日記≫, 고종 19년 6월 10·12일. 그러나 대원군이 집권 33일 만에 중국으로 납치되어 가자 고종은 기무처를 궁궐 내에 설치하여 중요문제를 논의하고 처리하게 하였다.313)≪高宗實錄≫, 고종 18년 7월 25일.

그런데 기무처는 임시기구로서 규모 면에서 날로 복잡해지는 국정을 처리하기에 적절치 않았던 모양으로 고종은 다시 1882년 12월 통리아문 및 통리내무아문을 설치하였다.314)≪高宗實錄≫, 고종 19년 11월 18일. 이어 1883년 1월에는 통리아문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약칭 외아문), 통리내무아문을 통리군국사무아문(약칭 내아문)이라 개칭하였다.315)≪高宗實錄≫, 고종 19년 12월 4일. 이어 삼군부와 기무처는 통리군국사무아문에 합병하였다.316)≪高宗實錄≫, 고종 19년 12월 22일. 전자는 외교통상관계 사무를, 후자는 군국의 기무를 비롯하여 내정일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 두 관청에는 당시 이름난 대부분의 인재들이 배치되어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새로운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처하였다.317) 李光麟,<開化·斥邪運動>(≪韓國史講座≫V, 一潮閣, 1981), 161쪽. 내정과 군사를 담당하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은 갑신정변 이후 의정부에 합부되었다가318)≪高宗實錄≫, 고종 21년 10월 21일. 다시 내무부로 부활되었다. 내무부는 초기에 軍務局·司憲局·修文局·地理局·工作局·職制局·農務局 등을 두어 내정전반을 관할하였고, 뒤에도 필요에 따라 商理局·鑛務局 등 새로운 국을 증설하여 현안문제들을 해결하였다.319)≪高宗實錄≫, 고종 22년 5월 25일·6월 20일·8월 10일, 24년 4월 5일 참조.

이와 같이 내외정세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기구가 설치되었으므로 자연히 유명무실한 기구와 인원에 대한 조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더욱이 오랜 동안 내려 온 불필요한 기구와 관직, 이에 따르는 수세정책의 난맥과 재정낭비는 개항 이후 새로운 정책과 사업의 추진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이를 시정하고자 1882년(고종 19) 10월 20일 減省廳을 설치하였다. 감생청은 국왕의 식사·복식에서부터 형식과 낭비를 줄이는 한편 왕족과 공신 후예들을 대우하기 위해 만들어진 필요 이상의 관청이나 인원을 줄이는 작업을 전개하였다. 더 나아가 행정절차를 간소화하고 중앙과 지방의 관청과 인원, 그리고 군사조직을 축소 조정하고 문벌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여 효율성을 높이고 재정낭비를 줄일 수 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국왕에게 건의하였다. 또 收稅혼란과 공물납부의 폐해도 시정토록 조치하였다. 이에 국왕은 각 기관과 관료들에게 감생청의 조치를 철저히 이행토록 명령하였다.320) 李鉉淙,<高宗때 減省廳 설치에 대하여>(≪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1969). 그러나 이렇게 과감하게 추진되었던 정부의 개혁작업은 실제에 있어서는 성과를 거두지 못함으로써 개화정책의 추진을 어렵게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321)≪高宗實錄≫, 고종 20년 9월 23일.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