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3. 제도의 개혁
  • 1) 정치·군사부문
  • (2) 군사제도의 개혁

가. 군사편제의 변천

서구열강의 통상요구가 거세지는 가운데 집권한 대원군은 집권 붕당세력의 군사권 장악의 수단으로 활용되어, 왕권을 약화시키는 기구로 기능하고 있던 비변사의 권한을 축소하여 유명무실해졌던 의정부의 정치적 기능을 회복시키는 한편 삼군부를 부활시켜 군사·국방문제를 분담하게 하였다.322)≪承政院日記≫, 고종 2년 3월 28일·5월 26일, 5년 3월 23일·6월 8일·6월 18일 참조. 대원군은 삼군부를 의정부와 대등한 1품아문으로 승격시켜 병조에서 독립된 아문으로서 모든 軍令權을 장악하게 하였다. 이어 대원군은 세도정치기를 거치면서 허약해진 훈련도감·금위영·용호영·총융청·어영청 등 5군영의 중앙군을 개편 강화하여 국왕호위를 보강하는323) 車文燮,<舊韓末 軍事制度의 變遷>(≪軍史≫5, 1982), 24∼48쪽. 한편 서양세력의 침입에 대비하여 경기연안에 포대시설을 강화하는 한편 강화부를 진무영으로 승격시키고 주변 요새에 포대와 포군을 배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북의 국경경비도 강화하였다.324)≪高宗實錄≫, 고종 8년 1월 25일·5월 25일. 그리고 각종의 무기를 구입하거나 개발하는데 진력하였다.325)李瑄根,<國防對策과 軍制改革>(震檀學會 編,≪韓國史≫最近世篇, 乙酉文化社, 1973), 208∼218쪽. 이러한 노력을 전개하던 대원군은 1873년 국왕의 친정을 주장하는 세력에 밀려 실각하였다.

대원군을 하야시킨 새 정부는 武衛所를 설치하여 국왕에 대한 호위를 강화하는 등 국왕친위군을 강화하였다.326) 車文燮, 앞의 글, 29쪽. 그러나 외침에 대해서는 별다른 군비 강화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일본이 보낸 운양호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새 정권은 조약의 체결로 일단 병화를 모면하였으나 계속되는 일본과 열강의 위협 속에 새로운 군사체제를 마련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청나라에 새로운 군기제조의 방법을 가르쳐 주도록 청원하였다. 25명의 학도와 13명의 공장을 비롯한 69명의 인원이 김윤식의 인솔하에 天津機器局에 파견되어 신무기 제조기술을 학습하도록 조치되었다. 그러나 학도들은 근대적 기술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고 정부의 재정적 뒷받침도 부족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327)權錫奉,<領選使行에 對한 一考察>(≪歷史學報≫17·18, 1062), 277∼312쪽. 다만 종사관 김명균이 천진에서 공장을 데리고 귀국하여 機器廠을 설치한 것에 만족하여야 했다.328) 金允植,≪陰晴史≫(國史編纂委員會, 1958), 225쪽.

조선의 재정은 강화도조약체결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탈이 심화되는 가운데 어려워지고 있었다. 특히 일본으로 많은 미곡이 유출됨으로써 미곡이 부족하여 군에 대한 녹봉미 지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조선정부는 이런 가운데 군사제도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1881년 5월 통리기무아문의 진언에 의하여 신식 군대로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수신사 김홍집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던 윤웅렬이 통리기무아문 군무사 경리당상 민겸호와 예조판서 홍우창을 설득하여 추진한 것이었다. 민겸호와 홍우창은 국왕에게 새로운 군사훈련의 필요성을 건의하였고, 일본공사관 공병 소위 호리모토(掘本禮造)를 교관으로 초빙하여 5영의 군인 중에서 80여 명을 선발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329) 李光麟,<別技軍의 설치>(앞의 책, 1989), 15∼16쪽. 한편 구식 군대의 편제도 개혁을 추진하였다. 1882년 2월 통리기무아문은 7조로 된<各軍門變通節目>을 마련하여 국왕에게 상주하였다. 즉 종래의 무위소·훈련도감·용호영·호위청을 합하여 무위영으로, 금위영 어영청·총융청을 합하여 장어영으로 하는 2영체제로 축소 조정하였다.330) 李光麟,<軍制改編>(위의 책), 20∼21쪽.

이러한 군제개혁은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무위영 소속의 별기군은 일본교관의 교도 아래 구식 군인과는 달리 국왕의 근위병으로, 민씨 척족의 사병과 같이 여겨져 우대되었다.331)林在讚,<開化期 軍制改編에 대하여>(≪考古歷史學志≫5·6, 東亞大 博物館, 1990), 359∼375쪽. 이에 구식 군대 소속의 군인들은 불만을 나타내었다. 13개월이나 밀렸던 녹봉미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불만을 터뜨린 구훈련도감 군인들을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나 민겸호와 이최응을 비롯한 고관들이 습격을 당하여 희생되고 민비는 충주로 피신하였다.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 掘本禮造도 희생되었다. 임오군란이라고 불리는 이 난을 계기로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게되었다.332) 李光麟,<壬午軍亂>(앞의 책, 1981), 145∼149쪽참조.

임오군란 후 고종은 무위영을 訓局으로 바꾸게 하고 각 營도 복구토록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5군영제는 다시 개편되었다. 청은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파견하여 대원군을 납치하였다. 그리고 종주권을 내세워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특히 군제개편은 군란 뒤 서울에 진주한 청국 광동수사제독 吳長慶의 막료 袁世凱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오장경 휘하의 원세개가 조선의 장정 1,000여 명을 선발하여 1隊는 王得功을 시켜 훈련원에서 교련하고, 또 다른 1대는 朱先民·何增珠 등 청군 장교들을 교관으로 삼아 東營에서 훈련하였다. 이를 新建親軍이라 하는데, 전자는 좌영으로 이조연을, 후자는 우영으로 윤태준을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뒤이어 1883년 10월 23일 교련소를 설치하여 박영효가 廣州에서 양성하던 南漢敎鍊兵隊를 친군 전영으로 재편하고, 1884년 7월 22일 연융대에 이주한 부대를 친군 후영으로 하여 이른바 친군 4영이 성립되었다. 이들 전영과 후영은 일본식으로 훈련된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좌·우영군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333)崔炳鈺,<壬午軍亂後 親軍制의 成立과 그 矛盾>(≪軍史≫26, 1993), 76∼119쪽. 또 그동안 舊京軍4營(용호영·금위영·어영청·총융청)의 군이 1884년 8월 29일 친군 4영에 옮겨 같이 훈련을 받다가 이들 중 금위영과 어영청 군을 합하여 친군 별영으로 조직되었다. 이로써 중앙군인 경군은 형식적으로는 비록 군무사 조련국에 의해 통할 절제되었으나 완전히 청군식으로 편제되고 청군에 의해 훈련되었다.334) 林在讚, 앞의 글, 364∼365쪽. 무기는 이홍장에게 요청하여 천진기기국으로부터 구제 12방, 청동포 10문, 영국제 시조총 1,000정과 탄약 등을 공급받아 훈련에 사용하였다.335)≪高宗時代史≫Ⅱ(國史編纂委員會, 1968), 396쪽.

이후 미국으로부터 군사교관을 초빙한 조선정부는 다시 군제개혁을 단행하였다. 미국의 다이장군 등 4명의 군사교관이 도착한 뒤인 1888년 5월 11일 국왕은 총리내무부사 심순택·김홍집을 소견하여 군제변통을 詢議하였다. 청의 간섭 아래 좌·우·전·후 4영 외에 별영, 해방영 등이 설치되었는데, 각 영이 분치되어 군비가 과다하게 지출되고 또 영마다 5백명은 훈련규칙에도 적합하지 않으니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청의 간섭하에 설치되었던 군영들은 장위영·통위영·총어영의 3영으로 축소 조정되었다. 즉 우영 후영 해방영을 합하여 통위영, 전영과 좌영을 합하여 장위영, 별영을 총어영으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1891년 2월 왕명에 의하여 경리청이 복설되었다336)≪高宗實錄≫, 고종 25년 4월 19일, 28년 2월 27일 참조.. 이는 수도 외곽 방비의 요충지인 蕩春臺와 北漢山城의 수비를 전담하는 군영으로 처음에 통위영에 속해 있던 전 총융군을 다시 분리하여 편성한 것이었다.337) 林在讚, 앞의 글, 366쪽. 이듬해 용호영·총어영·경리청은 합하여 친군으로 불리게 되었다.338)≪高宗實錄≫, 고종 29년 9월 17일.

군제개혁은 주로 중앙군 중심으로 이루어져 지방군은 별다른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만 중앙군이 차츰 신식 군대화함에 따라 지방 요지의 군대는 친군영체제로 신식 군대화하게 되었다. 강화도에 친군 심영, 평안도에 친군 서영, 경상도에 친군 남영 등을 두어 친군영체제를 본받아 훈련하게 하고, 때로는 상경하여 중앙군과 함께 훈련하도록 했으나, 지방은 갑오개혁에 이전까지 그대로 鎭軍이 수비를 담당하였다.339) 車文燮, 앞의 글,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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