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3. 제도의 개혁
  • 2) 경제부문
  • (3) 전환국의 설립과 신식 화폐주조

(3) 전환국의 설립과 신식 화폐주조

조선정부는 1883년 7월 5일(음력) 화폐를 주조하기 위한 새로운 기구로 전환국 설립을 결정하였다.416)≪承政院日記≫, 고종 20년 7월 5일. 조선은 숙종 4년(1678) 이후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사용하여 왔으나 상설 조폐기관이 아닌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임시로 설치한 鑄錢所에서 필요한 만큼 주조하였다. 따라서 전환국은 통화정책의 보다 합리적인 운용을 위하여 설치된 최초의 상설 조폐기관이었다.417) 元裕漢,<典圜局巧>(≪歷史學報≫37, 1968), 49쪽.

전환국을 설치하던 무렵 조선정부는 當五錢 주조를 통해 재정적 어려움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오전의 주조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418) 元裕漢,<當五錢巧>(≪歷史學報≫ 35·36, 1967), 313∼339쪽. 개항 이후 조선정부의 재정수요는 계속 증폭되고 있었고, 수세체제의 문란으로 조선정부의 재정난은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개화당 요인들은 외국으로부터의 차관을 주장하였고, 국왕도 이에 동의하여 박영효·김옥균 등은 일본을 상대로 차관교섭을 전개하였다.419) 李光麟,<借款交涉>앞의 책, 1981a, 168쪽. 그러나 민씨 일파는 당오전의 주조를 통해 당면한 재정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1883년 2월 18일 통리군국사무 홍순목은 근래 경비가 어려워 銀標를 주조하여 통용하여도 오히려 넉넉하지 못한 바 있으므로 당오전을 鼓鑄하여 은표와 더불어 함께 통용토록 하자고 계언하였고, 국왕은 시급한 일이므로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였다.420)≪日省錄≫264책, 고종 20년 2월 18일. 이어 국왕은 경희궁과 창덕궁, 그리고 만리창 등지에 설치된 3개 주전소에서 그 동안 당오전 주용을 적극 주장했던 민태호의 관장하에 당오전을 주조토록 명하였다.421)≪日省錄≫264책, 고종 20년 2월 21일. 그리고 이외에 강화도주전소와 의주의 신설 주전소에서도 당오전을 주조케 하였다.422)≪高宗實錄≫, 고종 20년 6월 3일. 그러나 이상과 같이 설치된 임시 주전소에서 충분한 액수의 당오전을 계속 주조 공급하는데 어려움이 발생하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423) 元裕漢, 앞의 글(1967). 그리하여 민태호가 독판으로 있던 통리군국사무아문의 건의에 따라 국왕은 주전사업을 계속적으로 관할할 수 있는 상설기구의 설치를 명하였던 것이다.424)≪承政院日記≫, 고종 20년 7월 5일.

이는 그 동안 다원화된 화폐주조사업으로 야기되어 왔던 문제, 즉 중앙관서 군영 지방관청 등에 의해 남발되는 화폐의 주조와 악화의 주조 등으로 야기되어 온 통화질서의 혼란 등에 대하여 중앙정부가 화폐주조권을 일원적으로 장악함으로써 통화정책을 안전성 있고 합리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전환국은 설치된 이후 중앙관서와 지방관청에 의해 계속 이루어지고 있던 당오전 등의 화폐주조사업에서, 상설 화폐주조사업의 관리센터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425) 元裕漢, 앞의 글(1968), 54쪽 및 앞의 글(1967), 320쪽.

그러나 전환국의 설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화폐를 발행함으로써 국제통화질서에 순응하고자 하는 데서부터 출발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개항과 더불어 외국과의 통상이 증대되는 가운데 재래의 상평통보와 같은 동전의 사용은 여러 가지 불편을 야기하고 있었다. 1882년 영의정 홍순목은 세계 여러 나라가 금은화폐를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만 각국과의 통상에 동전을 사용하여 곤란한 일이 많으니 金·銀錢이나 紋銀을 사용하자고 건의하였고 국왕도 이에 동의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426)≪備邊司謄錄≫263책, 고종 19년 7월 25일. 이와 같은 국제통상의 불편을 덜기 위해서는 새로운 화폐의 발행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임오군란 후인 1882년 8월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었던 박영효와 그 일행이었던 김옥균 민영익 등은 전환국 설치에 대하여 상당한 논의를 했던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427)柳子厚,<金玉均先生의 貨幣政策에 對한 按想>(≪朝鮮貨幣考≫, 이상사, 1940), 608∼614쪽.

민영익은 그 후 보빙사로 미국을 방문하였고,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개화당과 결별하여 당오전 주조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때 조선에 고빙된 묄렌도르프는 민씨 일파의 당오전 주조에 가세하였다. 묄렌도르프는 금은화폐제 채택론자로서 일시 시급한 재정문제의 해결을 위해 당오전의 발행에 가세하였으나 이어 신식 화폐의 발행을 추진하였다.428) 鄭 喬,≪大韓季年史≫권상, 18쪽. 즉 박영효·김옥균 등과 한때 의기투합하여 신식 화폐의 발행을 위한 전환국 설치의 필요성을 함께 논의했던 민영익과 금은화폐 주용론자인 묄렌도르프의 지지하에 전환국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429) 元裕漢, 앞의<典圜局巧>, 56∼57쪽.

이렇게 출발한 전환국은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는 한편 독일인 기술자 3명을 고빙하고 독일로부터 기계를 구입하여 금·은·동화 등 14종의 신식 화폐를 주조하고자 하였다.430) 元裕漢, 앞의 글(1968), 74쪽.

그러나 신식 화폐 추진사업의 핵심 인물인 묄렌도르프가 1885년 전환국 총판직에서 물러나고431) 元裕漢, 위의 글, 76쪽. 독일로부터 수입한 極印과 種印의 調印鑄刻까지 善美치 못하여 주조상의 문제를 야기하는 등 신식 화폐주조사업은 그 추진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조선정부는 각종의 개화시책을 추진하면서 야기되는 재정수요의 팽창으로 신식 화폐주조사업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었다.432)≪日省錄≫321책, 고종 25년 8월 26일. 그리하여 경성 전환국에서는 1888년 현재 一圜 銀貨 1,300여 매, 十文·五文 赤銅貨 등 합산해서 4,000원 정도를 주조하였을 뿐 통용되지 못한 시험적 주조에 그치고 말았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433) 元裕漢, 앞의 글(1968), 75쪽.

조선정부는 신식 화폐주조사업이 부진한 가운데 전환국으로 하여금 당오전 주조사업을 전관토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당오전 주조정책은 당시에 있어서 다른 정책과 마찬가지로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전환국을 통한 일원적 관리가 제대로 관철되지 못한 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당오전의 주조 구검권이 군영이나 지방관아에 주어지거나 민간에게 위탁 주조됨으로써 필요 이상으로 남조되거나 악화가 주조됨으로써 통화혼란이 야기되었다.434) 元裕漢, 앞의 글(1967), 319∼324쪽.

악화 당오전의 주조유통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폐단이 심각하게 나타나는 가운데 조선정부는 일본에 협조를 요청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전환국 幇辦 安駉壽는 일본 정계와 금융계 요인들의 소개로 大阪製銅會社社長 增田信之를 만나 화폐주조문제에 대한 협력을 요청하였다. 이에 增田信之는 일본정부의 지원과 자기자본을 동원하여 인천에 전환국을 이설하고, 일본국 화폐체제에 맞추어 1892년 말 5냥 은화와 동화 등 신식 화폐를 주조하였다. 그러나 인천전환국 운영권을 둘러싼 조선전환국 관리와의 분쟁 끝에 철수하였다.

신식 화폐주조 및 발행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려던 일본측의 기도는 일단 저지되었으나 이후 운영자금과 기술력의 부족으로 조폐사업은 부진에 빠졌고, 주조된 화폐 마저 청국 원세개의 간섭으로 발행이 지연됨으로써 이 시기 조선의 화폐정책은 난맥상을 면치 못하였다.435) 元裕漢, 앞의 글(1968), 60∼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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