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3. 제도의 개혁
  • 3) 문화·교육·사회부문
  • (1) 박문국의 설치와≪한성순보≫·≪한성주보≫의 간행

(1) 박문국의 설치와≪한성순보≫·≪한성주보≫의 간행

조선정부는 고종 20년 7월 15일(1883년 8월17일) 신문과 각종 서적의 간행을 위하여 博文局 설치를 결정하였다.436)≪承政院日記≫, 고종 20년 7월 15일. 박문국은 同文學에 예속된 新聞報社로 동문학 掌敎 金晩植에 의해 그 설립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새로운 형태의 신문 간행은 처음 박영효 등에 의해 시도되었다. 조선정부는 일찍이≪朝報≫를 발행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관리의 임면이나 중요행사 등을 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용자와 그 내용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개항 이후 외부와의 접촉이 확대되면서 일본과 청나라를 비롯한 외국의 신문을 접하게 된 인사들은 새로운 형태의 신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찍이 漢學 역관출신으로 중국에 자주 출입한 적이 있는 현령 金景遂는 상해에서 미국인 알렌목사에 의해 간행되고 있던≪萬國公報≫를 토대로≪公報抄略≫을 만들어 신문의 유용성을 인식시켰고, 강화도조약체결 후 일본에 파견되었던 金綺秀는 그의 보고서≪日東記游≫에서,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趙準永은≪日本聞見事件≫에서 신문의 발행 사실과 그 효용성에 대하여 논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437) 李光麟<漢城旬報와 漢城週報에 대한 一考察>(앞의 책, 1981b), 60∼102쪽.

신문에 대한 효용성이 알려지고 있는 가운데 1882년 박영효가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었다. 박영효는 3개월 이상 일본에 체류하면서 공공기관을 시찰하고 각 방면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국민대중을 계몽시키기 위해서는 신문의 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길에 福澤諭吉의 추천을 받아 신문제작을 도와줄 수 있는 몇 명의 일본인들을 데리고 귀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438) 李光麟, 위의 글, 61쪽. 서울에 돌아온 뒤 박영효는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439)≪高宗實錄≫, 고종 19년 12월 29일. 한성부판윤에 임명된 박영효는 국왕에게 아뢰어 신문 발간에 대한 명을 받았고,440)≪承政院日記≫, 고종 20년 1월 21일. 한성부에 새로 국을 설치하여 신속히 신문을 발간할 것과 신문 간행에 관한 제반규칙을 아뢰어 정할 것을 품신하였다.441)≪承政院日記≫, 고종 20년 2월 5일. 신문 발간을 맡게 된 박영효는 1881년의 신사유람단에 참가한 뒤 일본에 남아 후쿠자와(福澤)가 설립한 慶應義塾에서 새 학문을 공부한 바 있는 유길준에게 협조를 요청하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유길준은 외교사무를 돌보는 한편 박영효와 협의 끝에<漢城府新聞局章程>과<新聞創刊辭>, 新聞에 대한<解說文>등을 마련하였다.<한성부신문국장정>에 의하면, 신문국의 이름은 박문국으로 하기로 하고, 명석한 아동들을 선발하여 교육하는 한편 신보와 책들은 새로 간행될 때마다 먼저 승정원에 바쳐 왕이 열람토록 하고, 일부는 시강원에 바쳐 왕세자가 열람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나머지는 중앙과 각 지방의 관청에 배부하고, 또 국민들로 하여금 구독할 수 있도록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442) 李光麟, 앞의 글(1981b), 62∼66쪽.

그러나 이와 같이 신문 발간을 추진하던 박영효는 3개월 뒤 돌연 한성판윤에서 체직되었다.443)≪日省錄≫265책, 고종 20년 3월 4일. 그리고 10여 일 뒤 광주유수로 임명되었다.444)≪日省錄≫265책, 고종 20년 3월 17일. 이는 외척인 민씨세력이 급진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하려는 박영효를 견제하려고 한 데서 취해진 조처였으므로 신문의 발간도 불투명하다고 생각되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유길준은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고, 박영효가 일본에서 데리고 왔던 일본인들도 사태를 관망하기 위하여 이노우에(井上角五郞)만을 남기고 귀국하였다. 이로써 박영효 등에 의한 박문국의 설치와 새로운 신문의 발간은 중단되었다.445) 李光麟, 앞의 글(1981b), 67쪽.

일단 중단되었던 신문의 발간은 수신사 박영효의 부사로 일본에 갔다 왔던 통리아문 참의 동문학 장교 김만식에 의해 다시 추진되었다. 점진적 개화론을 펴고 있던 김윤식의 사촌형인 김만식은 동문학 장교에 임명된 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장정 동문학조에 있는 ‘並開設新聞報舘’의 규정에 근거하여 박문국의 설립과 신문의 간행을 추진하였다. 그는 자기의 일가 친척인 김인식을 담당 주사로 추천하여 왕의 윤허를 받은 뒤 1883년(음력 7월 15일) 박문국을 설립하고, 다시 박문국 司事로 張博·吳容黙·金基俊 등을 추천하여 윤허를 받는 한편 신문 발간에 대한 사태를 관망하기 위해 남아 있던 일본인 이노우에를 고용하였다. 그리고 이노우에가 기숙하고 있던 苧洞의 가옥에 박문국의 사무실과 인쇄소를 설치하여 같은 해 8월 20일 본격적인 신문 발간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어 신문에 기재할 원고의 작성 편집, 인쇄기계와 신문용지의 구입 등 준비를 완료하고 10월 1일(1883년 10월 30일) 드디어 역사적인≪한성순보≫창간호를 간행하였다.446) 李光麟, 위의 글, 70∼74쪽.

≪한성순보≫는 세로 25cm, 가로 9cm 크기에 18면으로 오늘날의 잡지와 유사하게 간행되었다. 내용은 순한문으로 창간사에 해당하는<旬報序>, 정부소식의 內國記事, 외국소식의 各國近事, 교양을 위한 특별해설과 박문국 자체의 公告 등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박문국을 개설하고 순보를 간행하는 목적은 국내소식과 아울러 외국의 사건을 번역 소개하고, 세계 각국의 정치·법률·재정·과학·기술·물가 등을 모두 실어 세계의 실정을 독자들에게 알림으로써 낡은 것에만 매달려 새 지식에 어둡고 시세에 어두운 사람들을 개화시키고자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447) 李光麟, 위의 글, 74∼76쪽. 그러나 10일마다 틀림없이 간행되던≪한성순보≫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이후 그 간행이 중단되었다.448) 李光麟, 위의 글, 76∼78쪽.

갑신정변으로 간행이 중단되었던≪한성순보≫는 정변이 수습된 후 통리아문 독판 김윤식에 의하여 다시 그 간행이 추진되었다. 김윤식은 우선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도망쳤다가≪시사신보≫통신원 자격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 이노우에를 박문국 직원으로 계속 고용하는 한편 신문 속간에 필요한 조치들을 강구하였다. 김윤식의 이러한 노력과≪한성순보≫를 통해 신문의 필요성을 알게 된 국왕을 비롯한 상하의 관심으로 박문국 부설의 합당 여부가 논의된 끝에 국왕은 순보의 속간을 명하였다.449) 李光麟, 위의 글, 78∼80쪽. 그리고 신문의 인쇄 간행은 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출판사로 생각되고 있는 廣印社를 이용하도록 윤허되었다.450)≪承政院日記≫, 고종 22년 3월 28일. 그러나 광인사를 통한 신문의 간행이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이 많아 실행되지 못하게 되자, 통리아문독판 김윤식은 새로운 인쇄기계를 구입하여 박문국을 중건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이노우에에게 일본 인쇄기계를 구입토록 의뢰하였다.451) 李光麟, 앞의 글(1981b), 81쪽. 인쇄기계의 구입과 더불어 순보 발행 당시의 직원 외에 6명의 직원을 동문학 주사로 차하하여 충원하였고, 다시 3명의 직원을 박문국 주사로 추가 충원하였다.452)≪統理衙門日記≫, 고종 22년 9월 11일·10월 16일.

신문의 간행은 인쇄시설을 비롯한 모든 시설이 갖추어지고 담당직원도≪한성순보≫간행 때보다 대폭 늘어나게 되자 10일에 한 번씩 내는 과거의 순보보다 1주에 한 번씩 내는 주보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재건된 박문국은 中部 慶幸坊 校洞에 위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1886년 1월 25일≪漢城周報≫창간호가 간행되었다.453) 李光麟, 앞의 글(1981b), 83쪽.

≪한성주보≫는 순보와 달리 기사를 순한문으로 작성하지 않고 국한문혼용 또는 한글전용 기사를 같이 게재하였다. 이는 당국자들이 국민대중을 의식하고 개화를 위한 계몽지로서≪한성주보≫를 간행하고자 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하여≪한성주보≫는 순보 간행 때와는 달리 농공상업과 여러 가지 영업에 종사하는 자로서 광고를 내고자 하는 자는 박문국 직원과 상의하도록 광고하고 있으며, 내외의 士商들에게 신문을 구독하도록 공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454) 李光麟, 위의 글(1981b), 83∼84쪽.

이와 같이 개화정책 추진을 위한 기구와 계몽지로서 역할 하던 박문국과≪한성주보≫의 간행은 정부의 재정난과 수세제도의 혼란, 周報代의 미납 등에 의한 적자운영을 견디지 못하고 1888년 7월 7일 문을 닫음으로써455)≪高宗實錄≫, 고종 25년 6월 6일.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개화정책 추진에 대한 조선정부의 취약성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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