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3. 제도의 개혁
  • 3) 문화·교육·사회부문
  • (2) 서구식 근대교육의 수용

(2) 서구식 근대교육의 수용

조선의 재래 교육은 서재·서당·서원·향교·학당·성균관 등에 의한 漢學과 經史 중심의 유학교육이 주류를 이루었다. 서재·서당·서원 등은 국가가 아닌 개인이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는 사학이었다. 이들 사학과 달리 지방과 서울에는 初學을 마친 학생들을 받아들여 유학을 교육하는 관학이 설립되었다. 부·목·군·현의 향교와 서울의 4부학당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생원·진사들이 입학하여 고급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인 문과시험을 준비하는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이 있었다. 이들 교육기관은 천자문에서부터 시작하여 4서3경에 이르는 한학 및 경과 사를 교육함으로써 유교적인 소양과 사상을 갖춘 인간 그리고 관료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조선정부는 위와 같은 유학교육 외에 국가운영에 필요한 실무관료들은 해당기관으로 하여금 교육하게 하였다. 실무행정에 필요한 吏文교육은 승문원에서 실시하였고, 외교상 필요한 한어(중국어)·몽고어·여진어·왜어(일본어)는 중앙의 경우 사역원에서, 지방의 경우 요충지에 해당 지역에 필요한 역학원을 설립하여 필요한 鄕通事를 양성하고 중앙의 사역원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의학교육은 각 군현에서도 일부 이루어졌으나 주로 중앙의 전의감에서 담당하여 의관을 양성하였다. 율학교육과 율학시취는 형조의 고율사에서 담당하였다. 지방에도 각 군현마다 율학을 두어 검률 1인씩 배치하고 형률의 적용과 율학교육을 담당하였으나 지방의학과 마찬가지로 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음양학(명과학) 천문학 풍수학(지리학)은 중앙의 관상감에서 전담하였고, 산학은 호조에서, 樂學은 장악원에서, 畵學은 도화서에서 소수의 인원을 상대로 필요한 교육을 실시하였다.456) 李成茂,<교육제도와 과거제도>(≪한국사≫23, 국사편찬위원회, 1994), 279∼368쪽.

농업중심의 유교국가 운영에 필요했던 이러한 조선의 교육체제는 개항 이후 자본주의 세계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조선정부는 188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국제관계에서 세력균형을 위한 열국과의 우호관계 수립이 시급함을 깨닫게 되어,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와 점차적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해 나가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와의 국교가 성립되어 감에 조선정부는 우선 서양어를 할 줄 아는 관료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우선 영어를 가르치기 위한 동문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동문학은 1883년 가을 묄렌도르프에 의해 설립되었다. 묄렌도르프는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의 외교고문으로 부임한 인물이었다. 武備學習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 청에 파견되었던 역관출신 이용숙은 1881년 정월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을 만나 조선의 수호통상 및 관세징수에 관한 문제 등에 관한 자문을 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홍장은 일본에 의한 조선의 海關 장악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서양인의 고용을 권고하였다. 그런데 아직 위정척사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서양인 고용이 어려웠으므로 오히려 근대적인 외교 및 통상관계에 밝은 청국인의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미국을 비롯한 영국·독일 등 서양제국과의 수호조약체결을 추진함에 있어서 일찍이 프랑스에서 국제법 등의 공부를 하고 돌아온 청의 候補同知 馬建忠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임시변통으로 계속 폭주하기 시작한 국제관계에 대응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임오군란 후 청의 북양아문이 복잡하게 전개되는 국제관계를 고려하여 추천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외교통상 및 해관업무를 관장할 책임자로 고빙하였다. 이어 1882년 11월 18일 고빙계약이 체결되어 조선에 온 묄렌도르프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에 임명되자, 해관의 창설, 근대시설을 위한 자금의 차관교섭, 주화사업 등을 추진하는 한편 외교통상과 해관업무에 종사할 인재를 기르기 위한 학교 즉 동문학의 설립을 추진하였다.457) 高柄翊,<穆麟德의 雇聘과 그 背景>(≪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대출판부, 1970), 436∼463쪽.

그리하여 동문학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참의 김만식을 掌敎(學監)로, 묄렌도르프가 중국에서 데리고 들어온 吳仲賢과 唐紹威를 교사로 삼아 40여 명의 학생을 선발하여 1883년 9월 서울의 齌洞에 설립되었다. 이렇게 설립된 동문학은 곧 영국인 핼리팩스가 맡아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교육은 오전·오후반으로 나누어 실시되었으며, 종이·먹·붓 등은 학생 자신이 부담하였으나 책과 서양제 종이와 문구 등은 아문에서 지급하였다. 동문학은 조선 재래의 한학(중국어학)이나 왜학과 같이 어학을 공부하는 역관(통역관)양성소였다. 그러나 동문학의 학생들은 단순한 어학생도의 수준을 벗어나 서양과의 통상확대에 따른 해관업무의 담당자 그리고 기타의 관련업무의 종사자로서 양성되었다. 즉 동문학 생도들은 상해나 홍콩 등지에 유학생으로 파견되기도 하였고, 졸업 후 외교통상·해관사무뿐만 아니라 우편·전신사무 등 국제관련 업무에 종사함으로써 당시 서구문화 수용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458)≪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日記≫, 고종 20년 9월 29일.
≪漢城周報≫4호, 1886년 2월 22일, 國內記事<同文學校>.

영어교육을 위한 동문학의 설립에 이어 본격적인 서양의 근대교육 수용은 육영공원의 설립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미수호조약의 체결에 따라 1883년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 민영익 일행은 미국의 여러 문물제도를 시찰한 뒤 조선이 얼마나 뒤떨어졌는가를 알게 되었고, 이들은 귀국 후 그 곳에서 견문한 바를 국왕에게 보고하고 새로운 정책의 실시를 건의하였다. 이들의 보고를 받은 국왕 고종은 우편제도의 창시, 신식 농장의 설치, 그리고 신식 교육기관 즉 육영공원의 설립 등 새로운 시책을 추진토록 명하였다.459) 李光麟,<育英公院의 設置와 그 變遷>(앞의 책, 1981b), 104쪽.

보빙사 일행이 귀국한 지 3개월 뒤인 1884년 9월 초에 고종은 육영공원의 설치를 명하였고, 미국공사 푸트에게 서양의 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 젊은 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조선의 요청을 받은 미국정부는 1886년 7월 헐버트와 길모어부부, 그리고 벙커를 선발 파견하였다.460) 李光麟, 위의 글, 112∼119쪽.

고종은 이들 교사가 도착하자 내무부소속 修文司로 하여금 학교개설 준비에 착수하게 하였고, 수문사 당상은 3인의 교사와 협의를 거쳐<육영공원설학절목>을 마련하였다. 이와 더불어 국왕 고종은 내외아문의 당상관과 낭청의 子壻弟姪族親 가운데 공원에 입학할 학도를 선발 추천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신식 교육기관 설치에 적극적이었던 고종은 계획에 어긋남이 있으면 학생의 부형들이 큰 죄를 받게 될 것이라고 엄명하였고, 이에 따라 육영공원은 1886년 9월 23일 개교하게 되었다.461) 李光麟, 위의 글, 104∼107쪽. 육영공원의 교육은 좌원과 우원으로 나누어 좌원은 젊은 현직관리 중에서 선발된 학도들로 집에서 통학하게 하고, 우원은 재능이 있고, 총명한 15세에서 20세에 이르는 젊은 선비 20명을 간선하여 기숙사에서 생활케 하였다. 모든 운영비는 호조와 선혜청에서 반반씩 공동 부담하도록 되어 있었다. 교과는 다음과 같이 책읽기와 글쓰기로부터 출발하여 차츰 수학·자연과학·역사·정치학 등을 수학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시험은 월말과 연말, 그리고 大考라 하여 3년마다 치르는 시험 등 세 종류가 있어 대고에 급제하면 졸업시켜 관직을 받도록 조치되었다.462) 李光麟, 위의 글, 120∼121쪽.

1. 讀書 2. 習字 3. 學解字法 4. 算學 5. 寫所習算法 6. 土理 7. 學文法 1. 大算法 2. 各國言語 3. 諸般學法捷徑易覺者 4. 格致萬物(醫學·地理·天文·花卉·草木·農理·機器·禽獸) 5. 各國歷代政治(與各國條約及當國用兵之術)

이렇게 출발한 육영공원은 설립 초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국왕 고종의 지대한 관심과 교사들의 열성, 학생들의 매우 높은 지적 능력으로 설치 후 1년이 지난 첫 여름방학까지는 학생들이 배운 句語가 3천 단어에 달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국왕은 방학중에도 그 동안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5일마다 공원에 나와 시험을 치르도록 하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463)≪高宗實錄≫, 고종 24년 5월 2일. 그러나 당시 조선의 모든 개혁시책이 그러했듯이 육영공원의 운영도 문제를 노출하기 시작하였다. 현직 관료나 양반자제들로 구성된 학생들은 학교의 엄격한 규칙을 싫어하였고, 좌원의 학생들은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결석하는 경우가 흔하였다. 이에 대하여 수문사 당상으로 구성된 학교운영위원회는 방관적 자세를 취함으로서 학교 질서를 문란케 하였다. 또한 학교를 운영하는 관리들이 학교유지비를 횡령하여 학교재정을 곤란하게 만듦으로써 교사들을 실망케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미국인 교사들은 점차 육영공원 교육에 흥미를 잃고 사의를 표명하는 등 학교운영은 난맥상을 보여주었다. 1886년·1887년·1889년 등 세 번에 걸쳐 총 112명 정도의 학생을 모집 교육했던 육영공원은 1894년 2월 배재학당 교사로 초청된 벙커가 마지막으로 사임을 표명함으로써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국왕 고종은 알렌 미국공사에게 새로운 교사를 물색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정부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고빙된 외국인들에게 월급을 제때에 지급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였으므로 교사를 구하지 못한 채 육영공원은 표류하게 되었다.464) 李光麟, 앞의 글(1981b), 125∼132쪽.

이러한 가운데, 그 동안 우정국 혹은 해관에서 일하다가 1893년 3월부터 강화도에 설치되었던 해군무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영국인 허치슨이 조선정부의 고빙에 응함으로써 육영공원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하치슨은 우선 교명을 영어학교로 바꾸고 육영공원의 옛 학생 4명과 자기가 강화도에서 데려온 학생과 정부가 파견한 학생 등 총 64명의 학생을 데리고 수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동문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핼리팩스를 교사로 맞아들여 1895년 말까지 육영공원 자리에서 수업을 진행하다가 관립 한성외국어학교로 발전하였다.465) 李光麟,<舊韓末의 官立外國語學校>(앞의 책, 1981b), 134∼158쪽.

정부의 이러한 학교설립과 달리 원산에서는 1883년 개화파 관료인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 정현석과 민간인들이 합작하여 원산학사를 설립하고 經書와 兵書를 비롯하여 산수·물리·기계·농업·양잠·광산채굴법·법률·만국공법·지리·일본어 등 각종 새로운 학문을 교육하였다.466)愼鏞廈,<우리나라 最初의 近代學校의 設立에 대하여>(≪韓國史硏究≫10, 1974), 191∼203쪽. 그리고 1885년 여름 기독교선교를 위해 입국한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학생들을 모아 영어를 비롯한 서양의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고종은 1886년 6월 8일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하였다. 이 무렵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고아원 형식의 학교(뒤의 경신학교)를, 스크랜턴부인(M. E. Scranton)이 이화학당을 창설하여 서양식 학교교육을 시작하였다.467)孫仁銖,<미션학교의 설립>(≪韓國敎育硏究≫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159∼166쪽

그러나 이러한 학교의 설립들이 근대교육으로서의 교육개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한 근대적 국민교육은 국민 모두가 참된 인간으로서 길러지고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었다. 따라서 개화파 인사들은≪한성순보≫를 통해 서양의 근대교육제도를 소개하고 특히 소학교교육이 국민교육의 기초로서 의무교육제도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468)≪漢城旬報≫15호, 1884년 3월 18일,<各國學業所同>. 그리고 박영효는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하여 국왕 고종에게 ‘6세 이상의 모든 남녀 아동을 취학시켜 교육시킬 것’을 건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469) 朴泳孝, 建白書<敎民才德文藝以治本>(≪新東亞≫, 1966년 1월호 부록, 19쪽). 그러나 이러한 교육개혁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갑오개혁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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