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3. 제도의 개혁
  • 3) 문화·교육·사회부문
  • (3) 근대적 우정·전신·전기시설

(3) 근대적 우정·전신·전기시설

근대식 우정사업은 홍영식에 의해 연구되고 추진되었다. 그는 처음에 봉수 역마와 같은 기왕의 비능률적인 통신제도를 고쳐 활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개항장의 우편사업을 장악하여 이익을 취하고 있는 사실에 우려하여 새로운 우정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郵征司가 설치되자 협판에 임명되어 다음해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시찰하면서 뉴욕의 서부전신국과 우체국을 방문하고 미국의 우편제도를 조사하였다. 그는 귀국한 뒤 고종에게 근대적 우정제도에 대한 보고를 하였고, 이에 고종은 郵征總局을 설립하도록 명하였다.470)≪高宗實錄≫, 고종 21년 3월 27일. 이어<우정총국장정>이 마련되었다.471)≪高宗實錄≫, 고종 21년 5월 15일. 그리고 10월 1일(양력 11. 18) 근대적 우정사무를 개시하였다.472)≪高宗實錄≫, 고종 21년 10월 1일. 그러나 동 17일 우정국 개국축하연을 계기로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우정사업은 일단 중지되었다.473)≪高宗實錄≫, 고종 21년 10월 17·21일.

갑신정변으로 우정사업은 중단되었으나 조선진출 문제와 관련되어 청일의 각축 속에서 근대적 통신사업인 전신사업은 활발히 추진되었다.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부산에 전신국을 가설하고 1883년 1월 조선정부와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을 체결하고 이듬해 부산과 나가사키 사이에 해저전선을 개통시켰다. 덴마크의 대북부전신회사가 가설한 이 전신시설은 일본이 조선진출에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청국도 조선정부에 요구하여 고종 1885년 6월 조선전선조약을 체결하고 전선가설을 추진하였다. 청은 한성전보총국(일명 華電局)을 설치하고 서울과 인천, 서울과 평양·의주에 이르는 서로전선을 개통하였다.474) 李光麟,<開化·斥邪運動>(앞의 책, 1981a), 244쪽.

청의 이러한 조치에 일본은 서울∼부산간의 전신가설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일본과 부산구설해저전선조약속약을 체결하고 서울∼부산간의 남로전선을 착공하였다. 조선정부는 조선전보총국을 설치하고 독일상사 세창양행과 교섭하여, 각종 기구를 구입하고 영국인 기사 핼리팩스를 감로위원으로 하여 1888년 초에 착공, 6월 1일부터 전신사무를 개시하였다. 조선정부는 한글로 된 전신부호 ‘국문자모호마타법’을 제정하고 독자적인 전보장정을 마련함으로써 남로전선은 독자적인 운영을 하게 되었다. 이후 외교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데니 등에 의해 북로전선이 추진되어, 우여곡절 끝에 1891년 6월 서울∼원산간에 전신이 가설되었다.475) 李光麟, 위의 글, 245∼246쪽.

이 무렵 경복궁에는 전등이 가설되었다. 보빙사로 미국을 방문했던 민영익은 당시 뉴욕에서 동양무역에 종사하던 프레이저상사를 통해 조선에 전기를 가설해 주도록 주문하였다. 이는 에디슨이 1879년 전등을 발견한 지 5년 뒤의 일이었다. 따라서 1887년 초에 전등기기와 기술자 맥케이가 도착함으로써 경복궁 건청궁에 전등이 가설되었다.476) 李光麟, 위의 글(앞의 책, 1981a), 243∼244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