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Ⅲ. 위정척사운동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위정척사사상이란 바른것(正)을 지키고 그른것(邪)을 물리치고자 하는 하나의 체계화된 이론과 이념적 정향을 가리킨다. 이러한 위정척사사상은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 중엽 이후 우리 나라가 여러 가지 변수의 작용으로 내부적 변신과 외부적 변화를 겪고 있을 때, 그리고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국가적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굳건한 민족주의적 저항을 선구적으로 보였던 사상이며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위정척사사상은 조선 5백년을 관통하는 주자학적 성리학사상이 거둔 마지막 결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성리학적 배경에 대한 사상적 이해 없이는 위정척사를 논의하기가 어렵게 된다. 말하자면 위정척사사상과 운동은 조선 후기 서구제국과 일본세력의 침투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대두되었지만, 그 사상적 연원은 조선 5백년을 관통하는 주자학적 정치이념에 두고 있으므로, 먼저 이러한 사상적 근원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인 것이다.

위정척사사상의 뿌리가 되는 주자학적 정치사상은 원래 외환에 직면하고 있던 송나라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민족적, 국가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위기에 직면하고 있던 당시 송나라에서는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정치체제의 구축이 요구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군신간의 도덕적 관계의 강화가 외적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긴요한 전제가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주자학은 신분과 계급을 돌보지 않는 충절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주자의 성리학적 정치사상은 이러한 충절이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의무가 아니라 가장 순결한 내심의 발동이며, 이것이 곧 천리라고 역설하기 때문에 성리학의 理氣 논리가 외적의 침입을 당하게 되면, 현실적으로는 민족적 저항을 고취시키는 이념적 배경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었다.478) 金龍德,≪朝鮮後期思想史硏究≫(乙酉文化社, 1977), 527∼529쪽.

이렇듯 민족적 위기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탄생한 주자학적 정치사상은 그러한 위기의식을 역사의식으로 전용시키면서 孔·孟 이후 단절된 춘추대의적 유교정치이념의 정통성을 재확립하고 老·佛 등의 이설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한편, 종래의 세계주의적 중화사상을 민족주의적 정향 위에서 재편성하면서 강력한 배외적 이데올로기를 함축하게 되었다.479)≪中庸≫, 朱子 序文.

이와 같이 송나라 때 이민족에 대항하는 정치이념으로, 그리고 이설에 대해 정통을 지키는 문화이념으로 형성된 주자학적 정치사상은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 때 조선왕조에서 채택된 주자학적 정치사상은 단순한 도덕적 가치체계나 학문체계를 넘어 새로 성립된 정치체제를 정당화하고 통치구조의 원리를 제공하는 국가이성(raison d'Etat)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건국 초에는 새로 받아들인 주자학적 정치이념을 확립하기 위하여 노·불사상은 물론 제자백가의 사상까지도 邪說로 간주하여 이를 신봉하는 자를 斯文亂賊으로 처단할 정도로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후 주자학은 성종조에 이르러 왕조의 지도이념으로 완전히 정착되었으며 동시에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정통사상으로 기능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조선시대에 이러한 주자학적 정치이념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한 정치집단은 士林이라고 할 수 있다. 사림은 국왕의 통치권과 밀착하여 정치적·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던 지배계층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조선왕조 정치체제에서 주자학적 정치사상을 이념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차원에서까지도 책임을 지고 있었다. 사림의 정치이념은 성리학적 德化敎民에 기초한 왕도정치, 그리고 이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방법으로 至治를 강조함과 동시에 윤리적 차원에서 지치의 원리를 邪와 僞를 제거, 척결하는 데서 찾았다.

이와 같은 사림의 정치이념은 사욕이나 形氣에 따르지 않고 吾心에 명백히 변별함으로써, 모든 應事接物의 상황에서 ‘仕止久速’의 時中之義를 강조하고,480)≪孟子≫, 公孫丑章句 上. 정·부정의 정확한 분별에 따라 온당하게 처신할 것을 요구하였다. ‘정의를 보고 행하지 못하는 것은 용기가 없다는 것’481)≪論語≫, 爲政篇.이라는 실천성과 함께 이와 같은 사림의 정치이념은 국내외로부터의 邪·僞·不義·不正의 도전에 대한 저항정신으로 발현되어, 대내적인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시비의 정도를 밝혀 내고 대외적인 도전에 대해서는 민족의 자존과 보위를 사수하는 殉義정신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주자학을 정치이데올로기로 채용한 조선왕조가 이민족의 침략 앞에서 민족의 위기에 대처하여 적극적 저항의 자세를 보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념적 기반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임진왜란 때의 자연발생적 의병운동, 병자호란 후의 북벌사상, 조선 말기의 대외항쟁을 위한 의병운동 등은 모두 그러한 주자학적 정치이념과 연관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이념적 정향은 실천의 면에서도 발견될 수 있지만 적어도 명분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하였음을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림의 정치이념이 조선시대를 관통한 주자학적 정치사상의 맥락인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사림의 주자학적 정치이념이 어떻게 발전되어 조선 후기의 위정척사론에 연결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시대 사림의 주자학적 정치사상을 상황적 조건과의 관련이라는 현실적 차원에서 구체적인 정치체제 운영의 이론으로 재편성한 경세사상가로서 우리는 栗谷 李珥를 들 수 있다. 율곡은 조선 중기의 정치사상가로서 退溪 李滉과 함께 한국사상사에 있어 그 위치를 가지런히 하고 있는데, 퇴계가 형이상학적 사변의 차원에서 성리학에 치중했다면 율곡은 實事實用의 측면에서 성리학에 바탕한 경세론을 체계화한 정치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주자학의 이기철학은 후세에 氣質之性을 위주로 보는 주기적 경향과 本然之性을 위주로 보는 주리적 경향으로 나뉘어 이해되면서, 한국사상사에 있어서도 양자 사이에 끊임없는 논쟁이 제기되었다. 후자의 경향에 철저하게 충실했던 학자가 퇴계라고 한다면, 율곡은 비교적 전자의 경향을 중시했던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율곡이 주기적 입장을 강조했다고 해서 그가 이의 문제를 배제하거나 이의 비중을 경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퇴계가 理發氣發의 理氣互發說을 주장한 반면에 율곡은 氣發理乘의 이원론적 통합론을 제기한 것이다.

율곡은 “이는 形而上者요, 기는 形而下者이다.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 둘이 이미 분리될 수 없으니 그 發用은 하나이며 호발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482) 李 珥,≪栗谷全書≫권 10, 書 2 答成浩原.라고 말한다. 그는 천지 조화와 吾心의 발동이 모두 기의 작용에 의한 것으로 보아 퇴계의 이기호발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천지의 化는 곧 吾心의 發이다. 천지의 理化者와 氣化者가 있다면 오심도 역시 당연히 이발자와 기발자가 있어야 한다. 천지에는 이미 理化·氣化가 없는데 오심에는 어찌 理發·氣發의 차이가 있겠는가(李珥,≪栗谷全書≫권 10, 書 2 答成浩原 壬申).

그는 위와 같이 반문하면서 ‘理氣元不相離 似是一物’이라고 철저하게 생각하였다.

이는 器材的인 有形有爲의 기 가운데는 활량한 無形無爲의 이가 기의 주재자로서 乘之하기 때문에 양자가 별개의 것으로 존재할 수 없고 통합된 일체로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즉 이것은 “理氣雖二物而其體則一也 蓋一而二 二而一者也”라는 ‘一而二’·‘二而一’의 논리가 되는 것이다.483)李乙浩,<一而二의 構造的 性格>(≪韓國思想論叢≫1, 栗谷思想硏究院, 1978), 147∼175쪽 참조. 이와 같이 율곡의 성리학에 있어서는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거부하면서 理乘氣發一途說을 주장하여 이의 우위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상계에 있어서 기의 역할을 중시하였으니, 이것은 이성적 인식과 동시에 감정적 인식을, 관념과 동시에 경험을, 도덕과 동시에 물질의 합일을 지향하고자 하는 균형적 통합론을 제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율곡이 실사실용에 치중했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균형논리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율곡의 철학적 기조는 그로 하여금 성리학적 정치사상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상황적 변수에 대응하여 그 융통성 있는 적용을 주장하게 한 것이다. 즉 그의 정치사상은 이념과 경험의 조화를 향한 철두철미한 정치적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종조 이후 정치적 안정이 계속되면서 오랫동안 태평무사한 세월을 보낸 나머지 점차로 사회적인 문약과 퇴폐, 문란이 증대하여 위로는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아래로는 토지·병역의 제도가 문란해지기 시작한 선조조에 이르러 이러한 폐단의 시정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율곡이 생존했던 16세기, 특히 그 후반은 대내적으로 정치사회적 폐단이 증가하고 대외적으로는 남방의 倭와 북방의 胡의 침략의 전조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율곡은 경연에서 講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中衰期로 규정하였다.

우리 나라의 건국이 200년이 되었으니 이는 바로 中衰期에 들어선 것인데 거기에다 權姦들의 濁亂의 禍마저 있어 오늘날에 와서는 마치 노인과 같이 원기가 거의 쇠진하여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李珥,≪栗谷全書≫권 30, 經筵日記 今上 14년 10월).

그는 ‘變法·更張’을 이러한 중쇠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제기하였다. 그는 종조의 법통을 지키는 길은 시의의 중요성에 비추어 정책을 결정하고 수행해 나가는 因時制宜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율곡의 정치사상이 성리학적 치도를 중시하면서도 실용에 바탕한 점진성이 결여되었던 趙光祖의 이상주의적 정치이념을 수용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인시제의와 致用을 또한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그의 십만양병설 등은 이와 같은 정치적 리얼리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다.

율곡의 사상은 沙溪 金長生을 거쳐서 尤菴 宋時烈에게 정통으로 이어진다. 우암은 이기론과 인성론에 있어서 철저하게 율곡의 설을 취하였다. 그러나 우암의 사상이 퇴계의 이기론을 따르지 않고 율곡의 그것을 따랐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정통적 성리학사상의 변용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암은≪朱子語類≫에서 제시된 주자의 이기론이 ‘四端理發 七情氣發’이라고 하여 사단과 칠정이 각각 이발·기발이라고 한 것은 후세의 잘못된 기록이라고 보고, 율곡의 이기론이야말로 주자사상의 가장 정확하고 정당한 해석이라고 판단하였다. 우암은 이 문제에 관한 주자 자신의 진의를 구명하고자≪朱子言論同異攷≫라는 고증적 연구에 착수한 바 있다.484) 朴忠錫,≪韓國政治思想史≫(三英社, 1982), 38∼39쪽의 주 34.
玄相允,≪朝鮮儒學史≫(民衆書館, 1978), 226∼229쪽.
裵宗鎬,≪韓國儒學史≫(延世大 出版部, 1978), 136∼138쪽.

우암은 주자학사상의 본의를 추구하는데 주자학의 內省的·主情的 측면을 강조하였던 퇴계사상의 맥락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주자학사상의 기반 위에 서 있으면서도, 자기의 독자적인 해석을 관철하려 했던 율곡의 사상을 취한 것이다. 우암은 율곡의 사상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사상가로서 “퇴계의 理發而氣隨之라는 논리는 큰 착오이다. 理는 情意·運用·造作이 없는 것이다. 이는 기 안에 있다. 고로 능히 운용·작위하며 또한 거기에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하면서 이는 전혀 조작작용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또 그는 “性은 心의 理요, 情은 心의 動이며 意는 心의 計較이고, 心은 性·情·意의 主宰이다”라고 하고, “動하는 것은 心이요, 능히 動하게 하는 所以가 되는 것은 性이다”라고 하여 氣動理無動, 즉 心發性不發의 논리를 세웠다. 결국 우암은 ‘心是氣’을 주장한 것이다.485) 裵宗鎬, 위의 책, 136∼137쪽.

이 ‘심시기’의 견해는 실은 율곡이 먼저 제기하고 우암이 승계한 것인데, 이들이 심시기라고 한 것은 심의 작용이 기에 속하기 때문에 다만 심을 기라고 설명한 것이지, 심을 兼理氣의 뜻으로 專言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사상적 기조는 花潭 徐敬德이나 鹿門 任聖周 등의 唯氣一元論과는 다른 것으로 구별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율곡의 정치사상이 주기적 경향의 철학적 기조 위에서 형성된 정치적 리얼리즘이라고 한다면, 율곡의 사상적 맥락을 정통으로 계승한 우암의 정치사상 역시 주기적인 성리학적 기조 위에서 전개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율곡의 정치사상이 상황적 조건을 현실적 차원에서 고려한 정책적 대안의 제시에 보다 많은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데 비하여, 우암의 정치사상은 이념적 차원에서 명분론적 색채가 강화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를 테면 율곡이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면밀히 분석하고 실사실용의 관점에서 십만양병설을 구체적 정책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비하여, 우암은 춘추대의에 따른 尊中華攘夷狄의 논리를 친명배청의 정치적 이념으로 원용하여 호란의 원한에 차 있던 효종의 密諭에 응해서 북벌을 계획하였으니, 이러한 우암의 이념적 정향은 실사실용의 차원에서보다도 정치적 명분론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조선왕조의 이러한 주자학적 정치사상의 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바로 19세기 후반의 위정척사론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즉 조선 후기 성리학의 학통과 이에 기초한 정치사상의 맥락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을 수 있으나, 특히 19세기 전반에 와서 조선왕조의 정통적 성리학사상이 華西 李恒老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림에 의해서 재정비됨으로써 그 학통이 이어지고, 19세기 중엽 서세동점의 충격이 시작되자 조선 성리학사상의 정통성을 승계한 이들 사림은 성리학적 정치사상의 기조 위에서 척사 논의를 강력하게 제기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주자학적 정치이념에 뿌리를 두면서 조선 후기에 등장한 위정척사론은 처음에는 서양의 이질문화가 도전해 오는 위기상황에서 이단에 대해 正學을 지킨다는 교학적 차원에서 하나의 사상운동으로 발흥된 것이었다. 위에서 보았듯이 조선왕조의 국가적 지도이념이면서 동시에 사림의 정치이념으로 기능했던 주자학적 정치사상은 이후 퇴계와 율곡, 그리고 우암을 거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점차 형식화·전통화함으로써 성리학으로서의 본질을 잃어 갔다. 그리하여 이를 시정하기 위한 실사구시의 실학이 등장하였으나 그 근본정신은 유교적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비판이나 배척의 대상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서학이라 일컬어지던 천주교가 영·정조시기에 서세동점의 물결을 타고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는 전통적인 예교질서를 파괴하는 교리 및 행동을 수반하고 있었다. 부모와 선조의 제사를 부인하고 전통적으로 최고선으로 존중되어 오던 효와 충의 가치를 절하시키며 삼강오륜의 질서체계를 파괴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천주교는 주자학적 사상으로 규율되어 오던 전통사회를 위협하는 위험사상으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그 교세가 점차 커지고 반유교적 정신과 행동이 실천적 차원으로 드러나게 되자 이를 邪學으로 규정하여486)천주교를 邪學으로 규정한 것은 정조 때 蔡濟恭의 箚子에서 비롯된다(鄭喬,≪大韓季年史≫권 1, 고종 3년 참조). 배척하는 동시에 주자학적 정치윤리사상을 정학으로 지키고자 하는 위정척사론487) 衛正斥邪라는 말은 館儒 宋道鼎 등의 상소에 대한 정조의 批答 속에서 처음 발견된다(≪承政院日記≫, 정조 15년 11월 정축).이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주자학의 한 특성으로서의 위정척사사상은 조선 후기 천주교(서양문명)라는 이질적인 문화가 도전해 오는 위기의식의 상황에서 주자학적 유교사상을 수호하기 위한 하나의 사상운동으로서 대두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까지만 해도 위정척사사상은 이질적 문화의 충격에 부딪쳐 전통적 유교사상을 지키려는 정통의식의 반발작용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렇듯 처음에는 교학적 차원에서 하나의 사상운동 수준에 머무르고 있던 위정척사론은, 조선왕조 말기에 이르러 점차 서구열강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노골화되고 그것이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전반적인 변화와 파괴를 강요하는 구체적인 물리적 힘으로 다가오자, 강력한 민족적 자존의식을 바탕으로 한 구국의 지도이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사실 조선왕조 말기에 등장한 이러한 위정척사사상은 춘추대의와 벽위론을 양대 지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화이론적 세계관과 사대주의적 모화사상, 그리고 보수성과 배타성을 강하게 담고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른것(正)을 지키고 그른것(邪)을 물리친다는 위정척사사상에서 正·邪의 내용과 성격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적 여건에 따라 변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주자학적 정치이념을 정으로 하여 지키고 천주교를 포함한 서양문명을 사로 규정하여 물리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동시에 사대성과 보수성을 기본성격으로 하던 위정척사론이 그 후 서구열강과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민족의 자존과 자주를 지켜야 할 정으로 설정하고, 반면에 물리쳐야 할 사를 서구열강과 일제의 침략세력으로 규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던 위정척사사상의 성격도 민족자존과 구국애족의 민족주의사상으로 승화, 발전하여 나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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