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Ⅲ. 위정척사운동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2) 위정척사사상의 보급
  • (1) 위정척사사상의 정립

(1) 위정척사사상의 정립

조선 말기에 대두된 이러한 위정척사사상은 華西 李恒老와 蘆沙 奇正鎭, 그리고 화서의 제자인 重菴 金平黙 등에 의해 크게 보급되었다. 특히 화서의 위정척사론은 중암에 의해 보다 발전적으로 집대성되는 동시에 勉菴 崔益鉉에 의해 실천적 차원의 의병운동으로 확산되었으며 毅菴 柳麟錫에 의해서는 의병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항일구국 독립운동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조선 후기에 위정척사론의 중요한 기초를 놓았던 중요한 몇 사람을 살펴보면서 한말 위정척사사상과 운동의 특성과 보급과정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조선 후기에 위정척사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화서 이항로에 의해서였다. 화서의 위정척사론이 제기되던 19세기 후반은 조선왕조 정치체제가 서세동점의 국제적 격랑과 갈등 속에 휘말려 들어가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 당시 서구열강세력의 한반도에의 침입은 단순한 군사적 위협의 정도를 넘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질서에 기초한 불평등한 국제관계의 틀을 조선에 강요하는 것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경제와 사회, 문화체계의 전반적인 파괴를 수반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서구제국의 침략의 징후는 그 이전부터 있어 왔으나 그것이 위정척사운동을 촉발시킬 만큼 구체적이고도 물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1866년(고종 3) 프랑스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이른바 丙寅洋擾에 이르러서이었다. 병인양요는 서구열강의 자본주의적 팽창과 물리적 도전으로 조선이 처음으로 체험한 국제관계상의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이는 조선의 자기안보와 경제적 자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화서는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성리학적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위정척사론을 제기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왕조 사상의 큰 흐름은 개국 초기에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정착시키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데 공헌한 조선 초기의 학자들은 이상적인 국가운영 원리를 제시하면서 이를 실제로 한 번 실현시켜 보려고 시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암 조광조이었다. 이들의 사상과 정책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사상적 맥은 퇴계·율곡을 거쳐 조선 후기까지 연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것인데, 바로 이러한 성리학사상의 대하적 흐름이 배경이 되어서 화서의 위정척사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통의 관점에서는 화서의 경우는 평지돌출과 같아서 어떤 스승에게서 직접적으로 학문을 전승받지는 않았다. 단지 그는 율곡과 우암을 사숙한다고 스스로 말했을 뿐이다. 화서는 자신의 학통을 율곡과 우암에게 붙이고는 있지만 사실상 우암의 영향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화서는 19세기 중엽에 활동하면서 조선의 성리학을 정비하는 데 진력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조선 후기 국가적 위기상황을 맞이하자, 성리학을 학문적 바탕으로 하여 이를 외세에의 저항을 위한 실천운동의 논리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사실 19세기 후반의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화서를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은 비록 서구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분명하게 인식했다고는 볼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막연하게나마 서구 자본주의의 도전을 국가적인 위기로 판단했던 것은 확실하다.488) 李恒老,≪華西集≫권 3, 疏箚 辭同義禁疏. 그들은 이러한 판단에 입각해서 이 위기를 극복할 대응책을 강구했다. 즉 우리의 전통적 이념이나 체제를 고수하기 위해 장기적 대책으로 자강아사의 이념에 따른 내수론을 전제로 하면서 단기적으로는 밀려오는 외세를 저지하는 척외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보았는데, 조선 후기의 위정척사론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제시되던 이러한 內修外攘論의 선두 주자가 바로 화서이었던 것이다.

화서는 당시 주자학적 성리학에 입각하여 철저한 主理二元論과 理主氣客의 입장에서 19세기 중엽 조선의 대내외적 정치상황을 인식하였다. 즉 그는 기를 이에 복종시키는 주리적 理尊氣卑의 논리 위에서 조선왕조 본래의 정치체제와 질서를 이로 보고 외세라는 객체를 기로 보아 이에 대처하려는 자존적·자기수호적 의식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의 국난을 타개하려 했던 것이다. 이 때 화서가 그의 정치사상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이기론적 사유가 질서가치로서의 측면에서 가지는 의의에 대한 인식으로서489) 朴忠錫, 앞의 책, 202쪽. 이것은 궁극적으로 1860년대에 있어서의 대외적 위기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그 위기를 극복해 나가기 위한 타개책의 수립방향을 그러한 성리학적 기조 위에서 모색하고자 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리학적 기조 위에서 전개된 화서의 위기타개책은, 첫째는 민생의 문제 및 이와 관련된 내수적 통치론과 개혁론이요, 둘째는 대외관계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척사론이었다. 대내적 측면에서 내수를 위해 화서가 강조하였던 것은 민본주의적 정치이념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통치윤리 및 내정의 쇄신이었다. 그는 민생을 제일차적인 국가적 과제로 보고 정치체제 운영에 있어서 백성의 생활안정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고 말했다.490) 李恒老,≪華西雅言≫ 권 9, 嚮背. 백성은 현실적으로 국가운영의 중요한 과제인 경제와 국방의 원천이며 본원적으로는 통치자의 근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민본·위민사상은 곧바로 통치론과 내정개혁론으로 이어져 내수의 요체이며 척사의 전제로서의 군주의 수기정심과 극기정신을 역설하는491) 朴忠錫·柳根鎬,≪朝鮮朝의 政治思想≫(平和出版社, 1980), 178∼182쪽. 한편, 토지제도의 정비와 부의 공평한 분배, 吏道의 쇄신, 그리고 단결된 민심을 바탕으로 한 국민의 사기진작과 일종의 민병조직에 의한 국방을 강조하였다.

한편 대외적 측면에서 화서가 내세운 대응책은 적극적인 척화론이었다. 즉 병인양요를 계기로 이에 대한 대책이 분분할 즈음 동부승지로 부름을 받은 화서는 그 직을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에서 프랑스의 침입을 종사존망의 위급한 국가적 위기로 규정하는 동시에 이를 싸워서 물리쳐야 한다는 主戰斥和論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오늘날(양적의 침입을 당하여) 국론이 交와 戰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런데 양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은 내 나라쪽 사람, 즉 國邊人의 주장이고, 양적과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은 적국쪽의 사람, 즉 賊邊人의 주장이다. 전자를 따르면 나라의 衣裳之舊(조선문화의 전통)를 보전할 수 있지만, 후자에 따른다면 인류(한국인)가 금수의 지경으로 빠지고 말 것이다. 이 점이 양적과 싸우느냐 화친하느냐 하는 차이가 된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근본을 잡는 신념, 즉 秉彝之心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는 일이다(李恒老,≪華西集≫권 3, 疏箚 辭同副承旨兼陳所懷疏).

이렇듯, 그는 당시의 국론이 화친하자는 주장과 싸워서 물리치자는 양설로 나뉘어져 있는데, 후자에 따르면 조선의 고유질서를 보전할 수 있지만 전자에 따르면 인류가 금수의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니 싸워서 지키는 것이 떳떳한 도리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서구세력에 의한 고유질서의 파괴는 곧 조선왕조 정치체제가 유지하여야 할 정통성에 대한 도전이요 주체성에 대한 파괴 위협을 의미하였던 것이므로,492) 崔昌圭,≪近代 韓國 政治思想史≫(一潮閣, 1981), 15쪽. 이러한 서구세력은 마땅히 물리쳐야 할 양적에 불과하다는 인식논리가 바로 화서의 위정척사론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화서가 이러한 戰守論을 내세우게 된 배경에는 전제왕조의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려는 근왕적 충의사상과 유교의 춘추학적 존양사상이 깔려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대적 상황과 동향을 모르는 단순한 경계심과 배타성만이 작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서구 물질문명과 열강의 침략이 갖고 있는 그 본질적 성격에 대한 나름대로의 안목에 기초하여 조선왕조 정치문화의 정통성과 민족의 경제적 자존을 보존하려는 입장에서 그러한 전수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즉 그는 서구열강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邪學을 퍼뜨리는 이유는, 우리 내부에서 자신들의 동조자를 구하고 우리의 실정을 탐지하여 후에 군대를 이끌고 와 우리의 아름다운 풍속을 진창 속에 쓸어 넣고, 우리의 재물을 약탈하여 저희들의 탐욕을 채우려는 데 있다고 경고하였다. 또한 서양의 물건은 민생의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물건은 공업품들인데 비해 우리의 물건은 농산품인 관계로 교역이 이루어지면 마침내는 경제적 측면에서 우리가 매우 불리하게 될 가능성이 많음을 지적하였던 것이다.493) 李恒老,≪華西集≫권 3, 疏箚 辭同義禁疏. 결국 화서의 주장은 단순한 화이론적 존양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 자체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자존을 지키기 위한 민족의식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19세기 후반 외세의 침입이 점증하던 시기에 주리이원론과 이주기객의 성리학적 기조 위에서 대내적으로는 내수론을,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외양론을 전개하면서, 화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서학금단책과 양물금단책, 그리고 군사적 방어책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들을 제시하였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먼저 서구는 사상과 학문, 그리고 종교, 특히 천주교를 통해 조선인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문화적 침투로부터 시작할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서학의 금단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 다음에 서양은 通貨通色을 통해 奇貨巧物을 만연시킴으로써 우리의 일용품을 고갈시키는 경제적 침투를 획책할 것으로 보아 양물금단책으로서 서양제품의 사용금지와 불용불매론을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서양이 조선을 송두리째 삼키려는 무력약탈을 자행할 것으로 보아 서양세력의 직접적인 도전에 맞서 물리칠 수 있는 양병과 국민단합의 구축을 제창하였다.

특히 그는 율곡의 10만양병설과 임진왜란의 선례를 인용하면서 양병을 역설하였는데, 구체적으로는 정규군이 아닌 일종의 민병조직에 해당되는 義旅制度를 주창하였다.494)李恒老,≪華西集≫ 附錄 語錄, 권 4, 金平黙錄 4 및 권 3, 疏箚 同副承旨兼陳所懷疏. 이렇게 볼 때 화서의 어양척사론은 초기에는 성리학적 본말론에 입각하여 철저하게 내정개혁을 위한 논의에 치우쳤으나, 서양의 침공이 빈번해지고 이것이 위기로 파악되자 점차 군사적 차원의 방위론으로 구체화되어 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내수외양론의 구체적 정책들을 제시한 화서에게 있어 정과 사의 판별기준은 춘추대의적 명분을 계승하는 존화양이론에 바탕을 두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전혀 이질적이고 또 열등하다고 판단된 서양의 정치문화가 사로 규정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서의 존화양이론이 전적으로 모화적 사대사상에 기초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존화양이론에 따르면 만주족인 청나라 역시 北虜로서 夷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넓은 의미의 外, 즉 邪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은 주자학을 정통으로 수용하여 발전시킴으로써 중국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여 소중화로 자처했다.495) 李恒老,≪華西集≫ 권 25, 雜著, 闢邪錄辯 用夏蠻夷說.

여기서 우리는 화서가 조선의 문화적 우위를 전제로 문화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탈종속의 자주적 이념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그가 그의 문인인 김평묵과 유중교를 시켜 찬술하도록 한≪宋元華同史合編綱目≫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는 이 책에서 원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고려의 자주성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청에 대해 조선이 독립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이념적 정향은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적극적 저항을 강조하는 사상으로 연결되어 후일 저항적 민족주의운동의 한 연원을 이루게 되었다.

화서의 위정척사론은 그것이 비록 보수적이긴 하였지만 19세기 중엽 조선이 처한 대내외적 상황과 변수들을 고려하면서 은연중에 민족적 자존을 내포하고 서양열강의 침투에 대해 일종의 민족주의적 반응을 보였음을 인정할 수 있다. 더욱이 양물금단에 대한 그의 정책 건의는 결과적으로는 그가 서구 자본주의의 팽창 추세에 따른 폐해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위정척사론은 외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동시에 아무런 사전 준비없이 외세와 손을 잡음으로써 나타날 피해를 내다보면서 내수외양을 강조했다는 점496) 李光麟,≪韓國史講座≫Ⅴ 近代篇(一潮閣, 1988), 137쪽.에서 현실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무튼 이렇게 화서에서 발흥된 위정척사론은 이후의 위정척사사상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었으며, 장차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항일투쟁의 민족자주운동의 원동력으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조선 후기 화서와 함께 위정척사사상을 전개하였던 두 기둥 중의 한 사람으로서 蘆沙 奇正鎭을 들 수 있다. 화서와 노사는 조선 후기의 위기상황에서 위정척사를 통해 정치체제와 민족을 보위하려는 방향에서는 같았지만 이를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는 성리학적 기조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즉 화서가 理主氣客의 주리이원론적 입장에서 이기론을 전개한 데 비하여 노사의 이기론은 기를 이 중에 포함되는 것으로 봄으로써, 일원론적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그는 이와 기를 분리시키지 않고 기를 이 속에 포함시켜 하나(理一)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기를 一物로 생각한 것이다.

이 같은 노사의 唯理論은 이주기객의 주리이원론적 성리학체계를 대표하던 당대의 화서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화서가 주리적 입장에 서면서도 이기합일설에 반대함으로써 율곡적인 맥락을 잇고 있는데 비해, 노사의 유리일원론은 매우 독특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유리론은 “모든 日用形器에는 理가 담겨 있지 않는 것이 없다”는 唯理遍在論을 수반하게 되는데, 이 관점에 의하면 어떤 형기든 그것은 이를 담고 있는 것으로서, 그 상면은 道로 그리고 그 하면은 器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와 기의 구분만을 명확히 한다면 이가 하나로서 불변함은 근심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497) 奇正鎭,≪蘆沙集≫권 12, 納涼私議. 노사의 이러한 도기설은 그의 척사론 형성에 있어서 직접적인 논리적 기초가 되었음은 물론, 개국 직후에 대두한 ‘東道西器’의 논의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理主氣僕을 주장한 노사의 유리론은 서양의 충격이라는 상황적 변수와의 관계에서 위정척사의 대응논리로 발전된 것이다.

이렇듯 노사는 서양세력의 침략을 맞아 이에 대응하는 성리학적 논리의 기조에서는 화서와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서양의 도전이 마침내는 조선의 질서에 의해 극복되어져야 할 대상으로 본 점에서는 일치한다. 화서가 주리이원론의 입장에서 19세기 중엽의 대내외적 정치상황을 인식하고 존화양이의 논리를 통하여 서구세력을 洋敎와 洋賊이라는 두 개의 측면으로 구분한 후, 그것을 각각 이단과 이적이라는 화이적 성격으로 파악한 데 비해, 노사는 기를 이 중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 유리론적 이주기복의 논리 위에서 서구세력이 마침내는 조선에 의해 극복되어질 것으로 보았다. 즉 화서와 마찬가지로 노사에 있어서도 조선은 이이고 서구세력은 기로 파악되었는데, 서구세력은 비록 물질의 면에서는 조선보다 우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기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며, 이에 반해 조선은 비록 현실적으로는 취약한 듯이 보이지만 천명과 인륜에 따르기 때문에 이의 주체라고 보며, 기는 이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므로 결국 서구세력의 도전은 조선의 질서에 의해 극복되고야 만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인식에 기초하여 노사는 서양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대비책과 국력배양을 위한 내수론을 제시하였는데, 특히 그는 장기적 안목에서 제시한 내수론을 통해 사회경제적 측면의 구조적 모순을 과감하게 분석하고 그것의 극복을 위한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498) 奇正鎭,≪蘆沙集≫권 3, 疏 壬戌擬策. 그런데 그의 내수론은 대내적인 부패와 혼란 그리고 이에 따른 체제능력 상실의 상황에서, 대내적 정비를 통해 정치체제의 자기규제력을 회복하고 외양을 위한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으로, 장기적 대안으로서는 종래까지의 사변적 정치사상의 맥락에서 비교해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노사는 1866년 병인<척사소>에서 서양의 내침을 보고, 이러한 도전의 상황을 海寇東來之兆라 하여 침략의 직전 단계로 판단하고 심각한 위기의식을 토로하였다. 그는 서양인이 내침, 상륙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으로서 표면적으로는 서양신부의 살해에 대한 진상조사 및 그 해결을 목적으로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내면적 욕구는 다른 데 있음을 신랄하게 지적하면서, 서양인 내침의 내면적 의도를 첫째 정치적 예속, 둘째 경제적 착취, 셋째 문화적 예속, 넷째 사회적 파괴, 다섯째 도덕적 추락 등에 있다고 분석, 단정하였다.499) 奇正鎭,≪蘆沙集≫권 3, 疏 丙寅疏一.

이러한 상황인식에 기초하여 노사는 서양세력의 도전에 대처하는 방책으로서 먼저 조정의 정책을 신속하고 확고하게 수립할 것을 역설하고 이 정책의 중점을 交通禁絶에 두며 교통금절의 세부적인 방안으로서 양물금단론과 내수외양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교통금절의 현실적 대책으로서의 양물금단론에서 서양문명이 우세한 물리적 세력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기의 현상으로 보면서, 그러한 서양세력의 도전도 문제가 되지만 그것보다도 더 근본적인 문제는 밀려오는 서구세력에 흡입, 동화될 가능성이 있는 우리의 태도에 있다는 자성론을 제기하였다.

최근에 와서 양물을 좋아하고 탐하는 폐단이 있는 바, 이는 매우 상서롭지 못한 일로서 아마도 해구(서양)가 동래할 징조이니 관에 명하여 장사꾼이 거래하는 양물을 수색하여 거리에서 불사르고 이후에 거래하는 자는 외구와 통한 죄로 다스리면 백성의 뜻이 안정될 수 있을 것…(奇正鎭,≪蘆沙集≫권 3, 疏 丙寅疏一).

이러한 자성적 논리는 그 자체로만 보면, 성리학적 본말관에서 맴도는 것으로서 소극적인 위정척사론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지만, 또 한편으로 대내적인 부패와 혼란 그리고 이에 따른 체제능력 상실의 상황에서 대내적 정비를 통하여 정치체제의 자율성을 회복하고 외세극복을 위한 능력을 확보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노사는 “내수의 절목을 열거하자면 매우 번다하겠지만 그 요체는 結人心에 있다”고 하여,500) 위와 같음. 내수 측면에서의 방책을 먼저 민중의 내면적 의지를 단합시키는 데서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민중의 단결만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 또한 백성을 착취하는 정치를 금하고 사치하는 관습을 버리며,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된 연후에야 양적을 물리치고 국가를 보위할 수 있다고 역설함으로써, 내수에 있어서 군주의 본분에 충실함을 무엇보다 중시하였던 것이다.

1890년대의 대외적 위기에 직면하여 노사를 포함한 척사론자들이 내수외양의 근본으로서 군주의 養民德治를 강조한 것은, 당시 군주를 둘러싸고 정치를 농단한 집권층의 도덕적 타락이 심화되어 가고 있었으며, 이러한 지도층의 도덕적 퇴폐가 민중의 단결력을 약화시키고 대외적 위기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사는 결인심의 동인을 군주 자신의 실천으로부터 파급되는 유교적 大同之心의 이념으로 귀결시키고자 했다. 즉 그는 군주를 중심으로 한 집권층에 의해서 국민과의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이 밀폐되었던 당시 정치체제의 운영원리를 비판하면서, 민심을 모으는 일이 급선무라고 보고, 서양의 무력도전에 대응해서 양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민심의 동향이 가장 중요한 관건임을 인식하였으며, 최악의 경우 일선에서 외구를 맞아 싸우는 것은 상민출신의 병사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사기가 국운을 좌우한다는 점을 절감함으로써 민중의 차원에서 구제도의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던 것이다.501) 朴忠錫·柳根鎬, 앞의 책, 185쪽.

나아가 노사는 그의 이러한 내수론을<壬戌擬策>502) 奇正鎭,≪蘆沙集≫권 3, 疏.을 통하여 실천을 요청하는 구체적인 정책으로 제시하였다. 이<임술의책>은 노사가 진주민란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 대책을 상소형식으로 개진한 의책으로서, 이는 사변적 이기론에 입각한 종래의 유교적 선정론에 비하면 상당한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 이 의책은 당시 지배계층의 정치적 부패에 대한 준엄한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즉 그의 내수외양론은 국가적 위기의 원인이 대외적 도전에도 있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오히려 정치체제 내의 내재적 모순으로 인한 체제의 약화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아가 노사는 극도로 문란해진 삼정의 문제를 제도적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촉구하면서, 심지어는 다산 정약용의≪목민심서≫까지 인용하여 당시의 민요의 원인이 지배계층의 가렴주구에 의한 농민의 빈곤화에 있다고 지적하고, 특히 조세와 군역의 불공정한 부과가 결국 정치체제의 약화를 초래하는 정치적 불안의 근본적인 동인이 된다는 것을 신랄하게 파헤쳤다. 그리하여 그는 조세와 군역을 지배계층인 士族에게 면제시키고 있는 제도를 포함한 전면적인 사회경제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민심을 모아 결인심하는 것이 정치체제의 안정을 기하고 그 능력을 강화하는 길인데, 이러한 결인심은 무엇보다도 정치체제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전면적으로 개혁하는 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개혁을 주장한 사회경제적 폐단은, 첫째 서원과 이에 기생하는 유생의 민폐문제, 둘째 대토지의 사유화로 인한 공전제 이념의 붕괴, 셋째 배분의 불공정과 일부의 사치와 낭비풍조의 문제, 넷째 군역과 군포에 있어서의 불평등의 심화, 다섯째 과거제도의 모순에 따른 부패와 낭비문제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503) 朴忠錫·柳根鎬, 앞의 책, 186∼187쪽.
崔昌圭, 앞의 책, 94∼95쪽.

유리론자로서의 노사는 이와 같이 당시의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는 장단기적 대안으로서 ‘양물금단론’과 ‘내수외양론’을 제시하였는데, 특히 장기적 안목에서의 내수론이 사회경제적 측면의 구조적 모순을 과감하게 분석하고 그 극복을 위한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은 종래까지의 사변적 정치사상의 맥락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정치체제의 자강을 위한 그와 같은 사회경제적 개혁의 논리가 근왕적 정치질서의 구조적 변혁을 지향하는 논리로 전개되지 못한 한계점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적어도 이러한 내수론에 집권층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민중에 대한 새로운 기대가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정치적 정향이 1890년대의 외세의 도전에 대항하여 척사론을 중심으로 전개된 의병운동에 민중의 동원을 가능하게 한 이념적 동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뜻에서 조선 후기의 위정척사사상과 운동이 비록 근왕적 정치질서의 고수라는 보수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당하여 민중과 함께 최후까지 반제투쟁을 전개한 역사적 역할의 의미를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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