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Ⅲ. 위정척사운동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2) 위정척사사상의 보급
  • (2) 위정척사사상의 심화와 확산

(2) 위정척사사상의 심화와 확산

重菴 金平黙은 그 학통으로 보아 화서 이항로의 사상을 정통으로 계승한 인물로서 조선 후기 위정척사론을 이론적으로 집대성하면서 심화, 확산시킨 사람이다. 그는 학문적 입장에서 철저하게 화서의 주리론적 입장을 전승하였으며, 정치사상의 측면에서도 화서의 어양척사론을 한층 정교하게 심화시킴으로써 그 이후의 위정척사운동의 이념적 지주가 되었다. 그의 이론은 화서와 마찬가지로 주리이원론의 철학적 기초를 토대로 하고 있었으며, 이로부터 비롯된 인간관과 세계관 위에서 그의 정치사상의 핵심인 어양척사론을 전개하였다.

중암은 화서와 마찬가지로 인심도심의 문제를 이기의 개념과 연결시켜 그의 성리학적 기초를 구성하였다. 즉 그는 도심에도 이와 기가 있고 인심에도 이와 기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유리론이 아닌 주리적 이원론에 입각하였다.504) 金平黙,≪重菴集≫권 34, 雜著 海上筆語. 그리고 중암은 이 같은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도심에 있어서는 理가 주가 되고 인심에 있어서는 氣가 주가 되기 때문에, 도심에 인심이 복종할 때 비로소 모든 질서는 바른 관계로 안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理命氣從의 주리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인심과 도심을 각각 음과 양에 비유하여 도심에 인심이 따를 때를 음양관계가 바르게 되는 상태로, 그리고 인심이 도심을 지배할 때를 음양관계가 바르게 되지 못하는 상태로 각각 보았다. 따라서 인심과 도심은 본래 서로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반대된 관계로 바뀔 때에는 인심은 도심의 적이 되기 때문에 그 양자는 결코 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암의 이러한 논리는 그의 대서양관을 포함한 위정척사론을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논리의 기반이 되었다. 그에 의하면 서양과 조선의 관계는 본래 상호 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당시의 서양은 이미 우리의 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결코 함께 병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서양이 조선의 적이라는 이유를 그는 서양이 사사로운 욕심에만 빠져 다른 나라를 침략하려는 욕망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서구세력을 가장 해로운 금수류로 단정하고 만약 그들과 교통한다면 경제가 침식되고 사교가 만연하게 되며 미풍이 추락되고 질서가 파괴되는 해독과 위험이 있을 것임을 지적하고 이에 척사의 절대적 당위성을 강조하였다.505) 金平黙,≪重菴集≫권 38, 雜著 禦洋論. 또 유학적 가치관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四端五品論과 五行說에 의하여 서양을 금수의 도로 규정하는 동시에 서세가 통교를 요구하는 이유를 경제·종교·정치의 측면에서 구명하고 어양의 절대적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나아가 그는 이와 같은 본말론적 논리의 틀을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내재적 질서를 분석하는 데에도 적용하여, 당시의 조선은 末利만을 추구할 뿐 本實을 소홀히 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당시 서양세력이 횡행하게 된 것도 바로 이 같은 잘못된 내부상황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렇듯 중암은 화서에서 이어받은 주리이원론적 인식의 논리 위에서 당시의 국내외 상황과 서양세력의 본질을 파악하면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그는 조선 후기의 내재적 피폐와 외세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內更張·外防禦의 내수외양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결국 自强我事만이 위기극복의 정도임을 천명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는 서양을 비롯한 모든 이질적 세력들이 내침, 도전할 수 있는 틈을 준 것은 실은 대외적 원인보다도 누적된 내재적 모순들로 인하여 정치체제의 능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정치체제 능력의 강화, 즉 자강아사를 통해서만이 척외·척사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중암의 위정척사론의 핵심은 자강아사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중암은 이러한 자강아사의 구체적 정책들을<治道私議>506) 金平黙,≪重菴集≫ 권 35 雜著, 治道私議.에서 개진하고 있는데, 그 요지는 첫째 反經과 正君, 둘째 養士詰戎, 셋째 정치적 충원과 관료체제의 재정비, 넷째 사회경제적 개혁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반경과 정군의 측면에서 그는 군주를 포함한 국민 모두가 도덕성을 회복하고 유교적 常經을 회복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내재적 모순이 심화된 원인이 조정과 백성 모두가 유교적 원리에 입각한 마땅한 도리를 다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자강아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를 바로잡아 조정의 정치와 백성들의 일상생활에서 정치이념과 유교적 인륜도리를 새롭게 세우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특히 그는 ‘임금이 어진 정사를 행하면 백성들이 윗사람들에게 가까이 하고 그들의 어른을 위해 죽게 될 것’507)≪孟子≫, 梁惠王章句 下.이라는 논리에 따라서 최고 통치자로서의 군주의 正心正身이 선행되어야 조정이 바로잡히고 조정이 바로 설 때에야 비로소 개혁을 통한 경장과 시정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중암의 이러한 정군론은 궁극적으로는 통치리더쉽의 쇄신과 강화를 통해 당시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내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양사힐융론은<치도사의>의 내용을 구성하는 헌책 중에서 특히 적극적인 斥邪自尊의 이념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이는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자존을 위해서는 실용적 인재를 배양해야 하고 이와 동시에 서세의 도전에 물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武備를 강화해야 한다는 양면적인 정책이었다. 즉 養士란 사악한 이질적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정도를 행하는 실천 주체를 육성해야 한다는 방안이며, 詰戎이란 서세라는 도전세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대항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그것을 제압해야 한다는 적극적 척사의 방안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암이 힐융을 강조하여 국방의 강화를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점은 화서의 척사론이 소극적 국방론을 제시한 점에 비하면 상당한 진전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서의 척사론이 대외적 위기에 직면하여 비록 戰守說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전통적 국방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던 점에 비한다면, 중암의 詰戎論은 현실적 시각에서 진일보한 대안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정치적 충원과 관료체제의 재정비는 일종의 행정개혁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척신들의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관의 기강이 문란하고 부패와 무능이 상당한 지경에 달하여 있었다. 중암은 이 점을 주목하여 사람의 재능에 앞서 문벌과 척족을 우선하는 병폐를 통박하면서 군주가 용단을 내려 기존 관료들의 자질을 품평하고 부패를 척결하는 동시에 전국에서 유능한 인물을 뽑아 적재적소에 등용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조선왕조 5백년 동안 하급 관리에게는 녹이 없었는 바, 중암은 녹을 주지 않는 이러한 제도 자체가 곧 부패를 조장한다고 보고 이의 개선을 촉구하였다. 즉 그들이 녹을 받지 못하니 가렴주구로 살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관원들은 물론 胥吏들에게도 충분한 녹을 주어야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고 제안한 것이다.

사회경제적 개혁의 측면에서는 토지제도의 개혁과 농업생산성의 증대, 그리고 건전한 사회기풍의 진작을 강조하였다. 조선은 인구의 8할 이상이 농민으로 구성된 절대 농업국가이면서도 농토의 대부분은 농민이 아닌 명문대가와 호족이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생활은 빈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중암은 바로 이러한 모순된 토지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보아, 그 방안으로서 농가에 농토를 분배해 주고 井田法을 시행하여 토지의 매매를 금하며, 여러 대를 두고 나라의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世家에는 分田制祿을 주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농업생산성을 증대하기 위해서는 소를 함부로 잡는 일과 산야를 마구잡이로 개간하는 일을 금하고 산림보호와 양곡의 증대를 가져오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러한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개혁에 성공을 거두려면 사회적 낭비와 퇴폐를 막고 올바른 사회풍조를 형성해 가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렇듯 자강아사를 통한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내부개혁을 주장하면서, 중암은 이를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인 척양·척사의 논리를 심화시켰다. 그는 화서와 마찬가지로 외양을 위한 선결조건으로서 내수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 정책 대안의 제시는 화서에 비해 좀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즉 그는 “洋夷는 邪요 曲이고 朝鮮人民은 正이요 直이니, 洋夷는 禽黙인데 朝鮮人民은 人類”라는 위정척사의 전제 아래서 어양의 실천적 방안으로 政刑·築城·甲兵·軍糧·海防 등의 실제적인 물량면의 대비와 함께 지도자와 국민의 親上死長하는 不二心의 정신적 단결력을 강조하였던 것이다.508) 金平黙,≪重菴集≫권 38, 雜著 丙寅回咨私議.

나아가 그는 서양의 도전이 미치는 폐단을 종교 및 사상적 측면, 문화와 기술의 측면, 경제적 측면, 그리고 사회윤리의 측면에서 분석하였는데, 구체적으로는 서양의 종교와 사상은 유교적 법도에서 벗어나 있고, 그 기예는 천박함을 근본 속성으로 하고 있으며, 물자의 교역에서는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고, 그 윤리는 위계질서와 상하구별이 없어 마땅치 못하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서양세력의 침투 중에서도 경제적 측면의 폐해를 보다 더 유념하였는데, 무엇보다도 교역을 앞세운 서양의 자본주의적 팽창에 대하여 소극적이지만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서양세력이 가져올 해로움 중에서 통화의 폐해에 특히 관심을 보이면서, 그 폐단을 부정축재와 무리한 이득추구의 측면에서 지적하는 등 서양세력의 자본주의적 팽창에 따른 불공정한 경제관계의 추구가 가져올 부정적 결과를 막연하게나마 예견하고 있었다. 즉 경제적 측면의 통화가 通色을 수반하고 나아가 서양의 사상과 종교가 유입되어 사회문화적 주체성의 위기가 조성될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중암은 서양 내침의 영향 가운데에서도 특히 경제적 측면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이와 아울러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엄격한 양물금단론을 제안하였다. 그는 통화의 해악을 막기 위한 어양의 실천방안으로서 遠物(異物)을 배척하고 국산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경제적 자립책을 강조하였다.509) 金平黙,≪重菴集≫ 권 35, 治道私議. 물론 그가 통화의 폐단을 지적하고 양물배척을 주장한 것이 서구 자본주의세력의 팽창에 대한 근대적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보는 데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오히려 그의 주장은 화이론적 틀에 입각한 이질문명의 수용거부라는 고전적 이단배척론의 관점에서 볼 때 더욱 적합성 있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대내적 경제질서의 안정과 경제적 자립의 터전 위에서 사회경제적 개혁과 군사적 대응책을 제시하고, 이러한 대내외적 대책의 실천을 통해 자강아사를 이룩하는 것이 어양척사에 관한 정책수립의 바른 길이며 정치의 대도임을 역설한 것은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정통성과 주체성의 보전이라는 논리적 전제에서 보면 19세기 후반의 격동기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중암에 이르러 종전의 대청관계 및 대일관계에 있어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것이 후일의 위정척사운동의 발전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찾아볼 수 있다. 화서에 이르기까지의 대청관계에 대한 인식은 청나라가 夷狄에 속한다는 전통적인 화이관에 입각한 것이었으나, 중암에 이르러 배청의식은 병자·정묘호란 이후 물리적으로 주종관계를 강요한 적대세력이라는 현실적 이유에서 나오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적이라 하더라도 중국을 지배하고 있고, 나아가 그들이 한반도에 침공할 때 조선왕조 정치체제가 이에 대항할 능력이 없다면 以小事大할 수밖에 없다는 정치적 현실주의를 묵시적으로 시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510) 金平黙,≪重菴集≫ 권 39, 雜著 鷺江隨錄.

이러한 논리는 강자 앞에서는 굴욕적이지만 무릎을 꿇어 생존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는 소극적 수세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강아사하여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적극적 자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조선 후기 위정척사론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말하자면 물리적 복속을 요구한 청에 대한 굴욕을 씻어야 한다는 민족적 자존의식을 표명한 것으로서, 동아시아에 있어서 전통적인 국제관계 이념으로 기능했던 화이관이 정치적 민족주의의 이념으로 전이되어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중암에 이르러 대일관계의 인식 역시 변하였으니 화서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왜양일체론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는 1870년대에 이르러 일본이 조직적으로 무력을 앞세워 침략해 오자 이에 대한 대항을 위해 척사의 대상이 확대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암의 이 왜양일체론은 면암 최익현 등의 척사론자들이 척사운동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출시킬 때 이론적 지주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511) 柳重敎,≪省齋集≫ 권 58, 年譜.
柳麟錫,≪毅菴集≫, 年譜.
金平黙,≪重菴集≫, 年譜.

전체적으로 볼 때 중암의 위정척사론은 조선왕조 정통적 성리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세기 후반의 급박한 대내외적 상황에서 이러한 전통적 유교정치사상에 입각하여 난국을 타개하려 했던 중암의 논리에는 여러 가지 모순과 무리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암의 위정척사론이 당시의 척사파를 중심으로 한 유림의 정치사상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때 이는 19세기 후반 개항을 전후하여 전개된 위정척사운동의 이념적 한계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위정척사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그와 같은 보수적 정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주체성이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되는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각오로 분연히 일어서서 그러한 도전에 적극적으로 저항을 계속한 사실은, 그 후 일본의 한국침략과 더불어 형성되기 시작한 근대 한국민족주의 운동의 뿌리를 이루어 주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중암의 위정척사사상은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이념의 한 연원이 되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병인양요를 계기로 촉발된 위정척사론은 중암에 이르러 보다 심화, 확산되어 갔는데, 그 후 운양호사건을 빌미로 무력을 앞세운 일본이 개항 압력을 가해 오고, 조선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논의를 정하자 이에 격렬히 반대하는 이른바 병자척사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암은 오늘과 같은 국가존망의 일에 당하여 그대로 좌시할 수 없다512) 柳重敎, 위와 같음.는 각오 아래 일어나 문인 윤정구·유인석·유중악 등으로 하여금 척화소를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관의 저지로 뜻을 못 이루자 화서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면암 최익현에게 서신을 보내어 斥和議疏를 내도록 권고하였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持斧伏闕斥和議疏>이다. 중암과 면암은 화서 이항로가 살아 있을 때 그를 스승으로 한 동문이었으며, 또 화서의 학통을 이어받아 중암은 이론적인 면에서, 그리고 면암은 행동적인 면에서 위정척사사상을 확산, 발전시켰다. 지부상소는 이 두 사람의 협력관계에서 나오게 된 것인데, 실제로 당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조선 말기의 정치적 개혁 속에서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개항에 반대하였던 사림의 위정척사운동은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계속되다가 김홍집이 청나라의 황준헌으로부터 받아 온≪조선책략≫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신사척사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1881년에 일어난 이 신사척사운동은 嶺南萬人疏라는 대규모의 집단적 위정척사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중암은 만인소를 올린 유생들을 찬양하는 격려문을 지어 성재 유중교와 연명으로 그들을 고무하면서 계속 척사운동을 펴면 각 도의 士民들이 이에 호응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격려문은 후일 위정척사운동에 상당히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밝혀졌다.513) 金平黙,≪重菴集≫, 年譜 및 柳麟錫,≪毅菴集≫, 年譜.

그 후 중암이 영남만인소에 대해 격려하면서 예측한 대로 위정척사운동은 각 도의 유생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확대되어 나가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그 이전의 어떤 상소보다도 격렬한 내용을 담은 홍재학의 상소로 발전되었다. 이 상소의 내용은 당시 조정에서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하던 중신은 물론 국왕에 대해서도 죽음을 각오한 추상 같은 탄핵을 가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으니, 마침내 홍재학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후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으며 중암은 먼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그리고 동학혁명이 일어나 모두 좌절을 겪는 동안 위정척사운동은 잠잠했으나,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위정척사운동은 의병운동으로 동태화되면서 항일구국운동으로 발전되어 가게 되었다.

<李澤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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