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Ⅲ. 위정척사운동
  • 2.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 1) 병자년의 위정척사운동

1) 병자년의 위정척사운동

조선에 불평등한 국제관계를 강요하는 서구열강의 노골적인 개항의 요구는 18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866년 통상조약 등을 요구하며 프랑스함대가 밀려왔던 丙寅洋擾는 그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병인양요는 단순한 군사적 침략이 아니라 값싼 원료와 넓은 상품시장, 자본의 투자대상을 찾아 나선 서구열강의 경제적 침략이었다. 따라서 병인양요는 자본주의 세계질서에 조선사회를 불평등하게 끌어들이기 위한 서구열강의 도전이었다.

이러한 도전을 맞아서 당시 집권세력은 대외정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재야유림의 대표자인 이항로로부터 방책을 구하였다. 이항로가 병인양요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올린 상소에는 척화주전론과 양물배척론이 피력되어 있었다.

이제 국론이 交·戰 두 가지로 나뉘어지고 있는데 洋賊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측의 주장이요, 양적과 和交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적 쪽의 주장입니다. 전자처럼 하면 우리 나라가 옛 풍습인 衣裳之舊를 보존할 수 있지만 후자처럼 하면 인류가 禽獸之域에 빠지고 맙니다(李恒老,≪華西集≫권 3, 辭同副承旨兼陳所懷疏, 병인 9월 13일).

위와 같이 이항로는 척화주전론을 주장하였다.

대저 洋物이 전래되어 그 종류가 매우 많으나 대체로 奇技淫巧의 물건이니 민생의 日用에 무익할 뿐만 아니라 禍가 되는 것이 심합니다…한 걸음 더 나아가 저들의 물건 만드는 일은 손에서 생산되어 日計로도 남음이 있지만, 우리의 물건 만드는 일은 땅에서 생산되어 歲計로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부족한 것을 여유가 있는 것과 교역한다면 우리가 어찌 곤궁해지지 않겠으며 일계를 가지고 우리의 세계를 접할 수 있다면 저들이 어찌 넉넉해지지 않겠습니까(李恒老,≪華西集≫권 3, 辭同義禁疏, 병인 10월 3일).

또한 이항로는 서양과의 수호통상을 반대하는 ‘양물배척론’을 주장하였다. 당시 집권세력은 이러한 방책을 받아들여 강경한 쇄국정책을 취하였다.

우리 나라 布帛은 아름다워서 원래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없다…근일에 양화가 거의 전국에 편만하여 이미 식자들의 근심거리가 된 지 오래이다. 그러므로 양인들의 교역요구를 심상히 생각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뒷날의 무한한 우려가 될 것이다(≪備邊司謄錄≫251책, 고종 3년 7월 30일).

그리고 조정에서는 10월 ‘三江을 搜驗하여 양화가 적발되면 灣府(의주)에서 先斬하고 뒤에 아뢸 것’516)韓㳓劤,<開港當時의 危機意識과 開化思想>(≪韓國史硏究 2≫, 1968년), 110쪽.을 명령하고 동래로부터 유출되는 양물도 탐찰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交買하는 자는 선참 후계하도록 명령을 내리었다.

1870년대에 들어서자 이러한 상황은 급변하였다. 우선 미국·프랑스에 이어 일본도 조선을 침략해 오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미국이 자기 나라를 무력으로 개항시킨 방식을 모방하여 조선에 대하여 1875년 운양호사건을 도발하고 1876년 초에는 이 사건을 구실로 부산항에 군대를 불법 상륙시켜 조선인을 살륙, 약탈하고 개항을 요구하였다.

당시 집권세력은 민씨와 그 일파였다. 이들은 1873년 11월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새로이 권력엘리트로 등장하였다. 새 권력엘리트로 등장한 민씨와 그 일파는 대원군시기에 확대, 정비했던 군사력을 유지하고 강화시키지 않아서 일본의 무력 위협에 대응할 만한 군사력을 못 갖추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정부관료 중에는 개국통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1866년 제너럴 셔먼호사건과 1871년 신미양요를 경험하고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개국통상론은 김옥균·박영효 등 당시 세도가문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일부 중인층에게로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또 조선의 대신들 가운데는 그 동안 견문을 확대하여 정세의 변천에 따른 정책의 변화를 불가피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1871년 조인된 청일수호조규에서 일본이 청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교섭에 임하였다는 사실이 조선에 전해졌다. 또한 1872년 回還冬至正使 閔致庠은 일본사신이 청국에 가도 신하로 복종하는 나라가 아니므로 신으로 칭하지 않고 대등의 예로써 조약을 체결한 일을 보고하였다. 1873년 回還進賀正使 李根弼은 일본사신이 양선을 타고 가서 양복을 입고 황제를 알현하고 국서를 봉정했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와 같은 보고는 조선의 조정으로 하여금 청이나 일본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민씨 일파 중심의 집권세력은 일본의 무력 위협에 대응할 만한 군사력이 없었고 박규수 등의 개국통상론과 청나라 사신의 권유를 받아들여 문호개방을 해나가기로 하였다. 드디어 1876년 2월 조선은 일본과 ‘朝日修好條規’를 맺고 7월에 그 내용을 구체화한 ‘조일수호조규부록’과 잠정적 통상협정인 ‘조일무역규칙’을 조인하였다.

주지하다시피 병자수호조약은 일본이 특명전권 구로다(黑田淸隆) 일행을 파견하여 강화도담판을 강요함으로써 이루어진 조약이다. 이 조약체결은 일찍이 일본이 1868년 國制一變, 이른바 명치유신을 통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書契문제의 발단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일본은 종전까지 문화적 차등질서 속에서 당연한 것으로 수용해 오던 조일양국 관계에 대한 집요한 개선을 거의 7∼8년 동안 요구해 왔었던 것이다.

병자수호조약체결은 조일양국 관계를 종전의 조선의 일본에 대한 문화적·경제적 우월을 전제로 한 차등적인 교린질서로부터 통상을 전제로 하는 이른바 개항질서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 개항질서의 성격은 ‘형식상 각각 자주권을 갖는 양국의 평등한 외교관계’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양국간의 자유통상을 생산력이 월등한 팽창적인 경제단계와 아직 그렇지 못한 미약한 경제단계를 동등한 경제적 책임으로 묶어 두어 실질적으로는 불평등한 관계가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특히 무관세무역·치외법권·일본화폐사용 등을 허용한 것은 조선의 사회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매우 불리한 조약의 성격을 지녔다.

집권세력의 개항정책으로의 급선회는 당시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었다. 특히 화이적 세계관 속에서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갖고 있었던 유림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왜냐하면 1876년의 개항은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에 기초한 교린질서를 근대 서구적 질서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이미 1854년 개항을 하고, 1868년 명치유신을 단행하여 서구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개항은 바로 서양문물의 도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각 지방의 유생들은 척사상소를 올려 개항정책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특히 병자년의 위정척사운동은 병인년보다 그 강도가 더욱 높아졌다. 이는 상소운동의 방식이 지부복궐의 결사반대나 복합상소와 같은 방식의 반대상소를 올린 것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먼저 병자년 정월 홍재귀를 소두로 하여 경기도와 강원도의 유생들이 집단적으로 상소문을 올려서 당시 일본과의 수호조약체결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일본과의 수호조약체결을 인간과 금수의 갈림길을 결정짓는 위기상황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 상소문에서 수호조약을 반대하는 이유로 두 가지를 제시하였다. 하나는 일본이 들어오면 일본은 우리 나라를 유린하고 말 것이라는 국가적인 자주의 문제이었다. 다른 하나는 일본과 교역하게 될 때 일본의 무한한 탐욕은 우리의 생로를 마구 허물어뜨릴 것이라는 경제적 파멸론이었다.

丙·丁사건(병자호란와 정유호란)은 華夷에 관한 문제이지만 오늘의 사건은 人獸에 관한 문제입니다. 華로서 夷가 되는 것은 오히려 말할 수 있지만, 인류로서 禽獸가 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때에는 名義所關이 크게 문제되었으니 저들의 뜻은 오직 중국을 僭主하고 우리를 臣妾으로 하는데 있을 뿐 財帛과 부녀에 대한 끝없는 탐욕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각각 강역을 지키고 관방을 엄하게 하면, 우리는 오히려 선왕의 예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오늘의 사정은 저들이 비록 군신이란 이름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한번 상통하게 되면 장차 일용으로 상접하여…우리의 풍속을 파괴하고 우리의 生路를 끊게 하는 것이 끝없이 미칠 것입니다(金平黙,≪重菴集≫권 5, 京畿江原兩道儒生論倭洋情迹仍請絶和疏, 疏首:洪在龜 병자년 정월).

개항에 대한 위기인식은 특히 개항반대세력인 유림의 대표로서 상소를 올려서 위정척사운동의 기수가 되었던 최익현에게서 더욱 체계화되어 나타났다.

최익현은 1873년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고서 이 직을 사퇴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대원군의 집정에 반대하고, 같은 해 11월 3일 다시 호조참판을 사직하는 상소에서 국왕의 친정을 요구하는 ‘五條大義’를 개진하여 집권세력의 교체를 도와 주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최익현은 제주도에 위리안치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 후 1875년 3월에 풀려났다.

바로 이듬해 그의 나이 44세가 되던 1876년은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었던 해이었다. 1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기 직전, 그는 당시의 상황을 ‘華夷人獸의 갈림길’이라는 위기상황으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그는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일본과 강화하면 조선은 어지러워져 망할 것이라는 병자개항과 수호조약체결을 반대하는 그 유명한<持斧伏闕斥和議疏>(병자 정월 22일)를 국왕에게 상소하였다.

당시 개항추진세력은 쇄국정책을 바꾸어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기 위하여 외세배척의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왜양분리론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즉 그들이 내세운 왜양분리론은 일본과 옛날의 호의를 잇는 것이지 서양과의 호의를 닦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왜양분리론에 대하여 최익현은 왜양일체론으로 맞대응하였다. 그는 옛날의 왜인들은 이웃 나라였으나 지금은 寇賊이며 그 근거는 이들이 서양옷을 입고 서양대포를 사용하며 서양배를 탔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일본과의 호의를 닦는 것은 바로 서양과 화친을 맺는 것을 결과할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전하의 뜻은 저들이 왜인이고 洋胡가 아니며 그 말하는 것이 옛날 호의를 닦자는 것이고 다른 것이 아니라면 왜와 더불어 호의를 닦는 것이 또한 어찌 道義에 해롭겠는가 하지만…설사 저들이 참으로 왜인이고 양호가 아니라 하더라도 왜인들의 실정과 자취가 예와 지금이 현저하게 달라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의 왜인들은 이웃 나라였으나 지금의 왜인들은 寇賊이니…왜인들이 구적인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서양옷을 입고 서양대포를 사용하며 서양배를 탔으니 이는 서양과 왜가 일체인 증거입니다…그러니 왜와 더불어 옛 호의를 닦는다고 하는 것이 얼른 듣기에는 아무런 해가 없을 것 같으나 왜와 더불어 옛 호의를 닦게 되는 날이 바로 서양과 더불어 화친을 맺게 되는 날인 것입니다(崔益鉉,≪勉菴集≫권 3, 持斧伏闕斥和議疏 병자년 정월 22일).

뿐만 아니라 최익현은 일본과의 화약은 저들이 강함과 주도권을 갖고 우리가 약함을 보여 체결된 것이므로 한번 화약을 맺으면 이는 우리측이 대비가 없어 겁이 나서 청하는 눈앞의 고식지계일뿐이라고 강조하였다.

신은 듣건대 강화가 저들의 애걸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는 강함이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서 우리가 족히 저들을 제어할 것이니 그 강화를 믿을 수 있으나, 그 강화가 우리의 약함을 보인 데서 나온 것이라면 이는 주도권이 저들에게 있는 것으로서 저들이 도리어 우리를 제어할 것이니 그러한 강화는 믿을 수 없습니다. 신은 감히 알 수 없거니와 이번의 강화가 저들의 애걸에서 나온 것입니까, 우리의 약함을 보인 데서 나온 것입니까. 우리가 편하게 지내느라 방비가 없고 두렵고 겁이 나서 강화를 청하여 눈앞의 우선 좋기만 한 계책을 세우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알아 비록 속이려 하지만 될 수 없습니다. 저들이 우리의 방비가 없고 약함을 보이는 실제를 알고서 우리와 더불어 강화를 맺는다면 이 뒤의 저들의 무한한 욕심을 무엇으로 충당할 것입니까.

나아가 최익현은 일본이 강요하는 강화조약의 부당성을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이것이 곧 그의 ‘五不可論’이었다. 최익현이 일본과 통상무역할 수 없는 이유로 들고 있는 다섯 가지 이유를 차례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의 물화는 한정이 있는 반면 일본의 요구는 끝이 없어서 이로 인해 결국 개항이 우리 나라에 난리와 멸망을 가져올 것이다.

우리의 물화는 한정이 있는데 저들의 요구는 끝이 없어서 한 번이라도 맞추어 주지 못하면 사나운 노기가 뒤따르며 침해하고 약탈하며 유린하여 前功을 다 버리게 될 것이니 이는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이루는 바의 첫째입니다.

둘째, 일본측의 물화는 모두가 淫奢奇玩한 것으로서 손으로 만드는 무한한 것이요, 우리의 물화는 모두가 백성들의 생명이 달린 것으로서 토지에서 나오는 유한한 것이므로, 저들의 풍속을 문란케 하는 사치스러운 공산품과 우리의 국민생명에 필수적인 농산품을 교역하면 수년 후에는 국토를 지탱할 수 없도록 나라가 황폐화될 것이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저들이 욕심하는 바가 물화를 교역하는 데에 있습니다. 저들의 물화는 대개가 지나치게 사치하고 기이스러운 노리개로서 손에서 생산되어 한이 없는 것이요, 우리의 물화는 대개가 백성들의 생명이 달린 것으로서 토지에서 나는 것으로 한이 있는 것이니, 유한한 津液과 膏腴로 백성들의 생명이 달린 것으로서 한없이 사치하며 기괴한 노리개 따위의 마음을 좀먹고 풍속을 해치는 물화와 교역해서 해마다 반드시 巨萬으로써 헤아리게 되면, 수년 후에는 우리 나라 국토는 황량한 땅과 쓰러져 가는 집들이 다시 지탱하여 보존하게 되지 못할 것이며 나라는 반드시 따라서 멸망하게 될 것이니, 이는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게 되는 바의 둘째입니다.

셋쩨, 저들은 왜라고 하지만 실은 양적과 다름이 없어서 일단 강화가 성립되면 천주교가 교역중에 들어와서 전국에 포교되어 衣裳(관습)은 타락하고 국민은 금수가 될 것이다.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양적입니다. 이 일이 한 번 이루어지면 사학의 서책과 천주의 초상이 교역하는 속에 혼합되어 들어와서 조금 있으면 전도사와 신자가 전해 받아 전국에 두루 가득찰 것입니다. 포도청에서 살피고 검문하여 잡아다 버리고 베려 한다면 그들의 사나운 노기가 또한 더하게 되어 강화한 지난 맹세가 허사로 돌아갈 것이고 내버려 두고 묻지 않으면 조금 지나서는 장차 집집마다 사학을 하고 사람마다 사학을 하게 되어 아들이 그 아비를 아비로 여기지 않고 신하가 그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게 되어 의상이 시궁창에 빠지고 사람은 변하여 금수가 될 것이니, 이는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게 하는 바의 셋째입니다.

넷째, 강화 후에 저들이 국내에 상륙하여 거주하게 되면 저들은 얼굴만 사람이지 마음은 금수이므로 우리의 재산과 부녀를 마음대로 약탈할 것이며, 우리의 고관들은 화약을 깨뜨릴까 두려워하여 이를 막지 못할 것이므로 백성이 하루도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강화가 이루어진 뒤에는 그들이 육지로 내려와 서로 왕래하고 혹은 우리 강토 안에다 집을 짓고 살려고 할 것인데, 우리가 이미 강화했으므로 거절할 말이 없고, 거절할 수 없어서 내버려 두면 재물, 비단, 부녀의 攘奪과 怯取를 마음대로 할 것이니, 누가 이를 능히 막겠습니까. 또한 그들은 얼굴만 사람이지 마음은 금수여서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사람을 죽이고 누르기를 기탄없이 할 것인데 열부나 효자가 애통하여 하늘에 호소해서 원수를 갚아 주기를 바라도 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강화를 깨뜨리게 될까 두려워하여 감히 송사를 처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유는 온종일 말하여도 다 들 수가 없으며 사람의 도리가 蕩然히 없어져 백성들이 하루도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는 바의 넷째입니다.

다섯째, 강화를 주장하는 자들은 병자호란 때의 강화가 그 후의 평화를 가져온 예를 들지만 청은 夷狄이고 일본은 실은 재화와 여색만 아는 금수이므로 이적과는 화약을 맺을 수 있어도 금수와는 화호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병자호란 때의 남한산성의 일을 끌어서 말하기를, 병자년의 강화 뒤에 피차가 서로 좋게 지내어 삼천리 강토가 오늘에 이르도록 반석 같은 안정을 보전하였으니 오늘날 그들과의 和好가 어찌 유독 그렇지 않겠는가 합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이는 아동들의 소견과 다름이 없다고 여깁니다…청나라 사람들은 뜻이 중국의 황제가 되어 四海를 무마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능히 다소나마 중국의 覇主들을 모방하여 인의에 근사한 것을 가장하였으니, 이는 이적일 뿐입니다. 이적들도 사람이라 곧 도리가 어떠함은 물을 것이 없지만 능히 소로써 대를 섬기기만 하면 피차가 서로 사이가 좋아져서 지금까지 왔고, 비록 그들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관대하게 용서하는 아량이 있어 침해하거나 학대하는 염려가 없었습니다. 저 왜적들로 말하면 한갖 재화와 여색만 알고 조금도 사람의 도리라고는 없으니 이는 곧 금수일 뿐입니다. 사람과 금수가 화호하여 함께 떼지어 있으면서 근심과 염려가 없기를 보장한다는 것은 신은 그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으니, 이는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게 되는 바의 다섯째입니다.

위에서 보듯이 최익현은 개항을 해서 통상을 하는 경우에 도래할 수 있는 일본의 침략과 우리 나라의 손실에 대하여 매우 예리하게 통찰하고 그 폐해를 낱날이 제시하여 지적하였다. 특히 그가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토지에서 생산되는 우리의 농산물과 사치품이 주류인 손으로 제조되는 저들의 공산물을 교역하는 경우에 수년이 가지 않아서 우리 나라가 큰 손실을 입고 나라의 경제가 황폐하게 될 것임을 지적하는 부분은 매우 날카로운 통찰이요 탁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익현과 유림의 주장은 국가의 정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익현의 상소는 환급되었다. 그리고 이 상소로 인하여 그는 흑산도 귀양길에 올라 1879년 고향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유배에 처해졌다.

그리고 집권세력은 1876년 2월 일본과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여 개항을 시작하였다. 개항추진세력은 유림이 주장한 ‘왜양일체론’에 대하여 ‘왜양분리론’으로 맞서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3백년 이래의 구교를 속개하는 것으로 정당화하였다. 즉 “일본과 옛날의 호의를 잇는 것이지 서양과 화호를 닦는 것이 아니다”517)≪日省錄≫176책, 고종 13년 1월 28일.라고 한 고종의 말은 이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었다.

우리 나라가 문호를 개방하게 된 1870년대는 10년 전의 상황과 아주 달랐다. 1860년대는 병인양요를 계기로 일어났던 이항로로 대표되는 재야유림의 척화론이 국가의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집권세력은 유림의 주장을 받아들여 통상거부, 양물금단과 같은 척사정책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병자년에 이르러 유림의 주장은 국가의 정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유림과 집권세력간의 갈등관계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870년대 통상요구나 불평등조약체결과 같은 대외적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으나 그 이후는 대내적인 사회개혁 방향과 방안에 대해서도 일어나게 되었다. 그만큼 두 정치집단간의 갈등의 폭과 강도가 더 심각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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