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Ⅲ. 위정척사운동
  • 3. 위정척사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위정척사운동의 영향

1) 위정척사운동의 영향

병자·신사척사운동으로 그 절정에 달했던 위정척사사상과 운동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운동과 그 이후의 국내외 항일독립운동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 말기에 일어난 의병운동은 1894년의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흩어져 분산되어 있던 농민군의 잔존세력을 규합하면서, 위정척사론자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다. 흔히 일부에서는 위정척사에 대해서 고루한 유학자들이 하는 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조선을 침략하여 군대를 투입하고 무력으로 강점을 시도했을 때, 전국 방방곡곡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났는 바, 이러한 항일의병은 한국의 근대적인 민족주의역사에서 중요한 조직적 이념 및 실천운동이 형성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일어난 이러한 항일의병의 선봉이었고, 이론적 지주가 된 사람들은 바로 대부분 위정척사론자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의병운동은 그 전개과정에서 군대 및 평민출신 의병장들이 등장하여 점차 그들의 역할과 비중이 증대되어 갔지만, 원천적으로 보면 의병운동 그 자체는 주자학적 척사론을 사상적 동기로 하여 시작되었으며 또한 위정척사론자들이 그 선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수행된 것이다.529) 姜在彦,≪韓國近代史硏究≫(한울, 1983), 347쪽. 일찍이 조선 후기 위정척사사상과 운동의 초석을 놓았던 화서 이항로가 동부승지직을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에서 외세의 침입을 막고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의병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義旅制度를 두어 국난극복에 임할 것을 제창한 바 있는데, 조선 말기에 일본의 무력침략이 시작되자 위정척사론자들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 비추어 본다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도 하겠다.

이 같이 조선 말기에 의병운동이 위정척사론자들의 주도하에 발흥하여 전개되어 나갔다는 점은 초기와 중기의 의병운동을 이끌었던 의병장들의 인적 구성과 그 사상적 계보를 살펴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예컨대 초기 의병운동에 있어 중요 의병장의 구성을 보면 강원도 춘천에서는 이소응, 충청도 제천에서는 유인석이 일어났으며, 경상도에서는 선산에서 허위, 진주에서 노응규 등이 기병했고, 전라도에서는 기우만 등이 일어났다. 그리고 중기 의병은 1905년 11월의 을사보호조약을 계기로 원용팔·민종식·최익현 등이 봉기하였다. 이들 가운데 유인석·노응규·최익현은 그 사상적 계보를 화서에 두고 있으며, 전라도에서 일어난 기우만은 화서와 함께 조선 후기 위정척사사상의 양대 지주를 이루었던 노사 기정진의 손자로서 그 역시 사상적 뿌리는 위정척사사상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렇게 보면 1907년 8월 이후 후기 의병운동에 접어들면서 의병장의 구성에 있어 중요한 변화가 있었지만, 적어도 1895∼1896년의 초기 의병운동과 1906년 단계의 중기 의병운동에 있어서 위정척사론자들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으며 또한 선도적인 것이었다530) 姜在彦, 위의 책, 346쪽.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위정척사계열의 국권회복운동은 후기 의병항쟁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점차 그 활동과 영향력이 약화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즉 위정척사사상과 그 운동은 1906년 6월 최익현 의병부대의 좌절 이후 점차 그 영향력이 감소하여 갔으나, 이는 표면적으로만 그러할 뿐 내실에 있어서는 해외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의 발판을 마련하면서 계속 끈질긴 항일독립운동으로 발전, 심화되어 갔다. 말하자면 국내에서의 위정척사운동은 국권회복의 계기적 국면의 변화에 따라 적응하면서 발전되어 마침내는 해외 항일독립운동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이는 국내 의병운동이 독립군 전투부대로의 연속성을 가지면서 발전해 간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1909년 여름 이후 일본군의 남한대토벌과 일본의 조선병합으로 국내에서의 의병항쟁이 어려워지자 많은 의병들이 집단적으로 국경을 넘어 중국에 근거를 두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렇듯 해외에서 근거지를 확보하고 국내 의병운동을 독립군 전투부대로 연결, 전환시킴에 있어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 다름아닌 위정척사사상의 거봉 유인석에 의해 주도된 의병부대이었기 때문이다.53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의병항쟁사(1970), 657쪽.

유인석은 백두산 일대의 지리적 조건이 유리하고 무장투쟁을 위한 인적·물적 기반의 조성이 용이하며, 나아가 유사시에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기에 좋은 국제적 환경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곳을 거점으로 하는 근거지 이론과 장기적 구국투쟁의 전략을 내세운 후, 이를 구체화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1910년 6월 13道義軍을 조직하였다. 이 13도의군은 국내외를 망라하여 계몽운동가와 의병운동가가 합류된 전민족적 연합의병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도총재에는 유인석이, 그리고 참여인물로는 이범윤·우병렬·이진룡·이갑·홍범도·안창호·이상설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 13도의군이 실제로 항일구국운동에 어떤 가시적인 공헌을 하였는가는 별도로 논의될 일이지만, 아무튼 1920∼30년대에 백두산에 연결되는 북간도와 서간도의 산악이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던 점을 보면, 조선 후기 화서 이항로와 노사 기정진에서 비롯되어 중암 김평묵과 성재 유중교 및 면암 최익현을 거쳐 의암 유인석에 이르른 위정척사사상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을 보전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에 있어 그 원동력으로 계속 영향을 미쳐 갔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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