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1) 임오군란의 배경
  • (1) 서울의 사회경제 구조와 하층민

(1) 서울의 사회경제 구조와 하층민

조선 후기에서 한말에 이르는 시기의 서울은 정치·군사·행정기능이 중심인 도시에서 상공업 중심의 도시로 바뀌고 있었다. 도시 규모가 커지고 인구가 증가하는 한편,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관련해서 상업·수공업을 비롯한 각종 생산부문이 발전하자, 지리적으로 수륙교통의 요충지인 서울은 남북의 물산이 잇따라 모여들고 다시 각 지방으로 보내지는 상업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19세기의 서울은 호구 45,000에 인구 20만 이상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고, 인구의 유입이 끊임없이 계속되면서 많은 부동층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는데, 한말이 되면 서울의 실제 인구는 20만을 훨씬 넘어 30만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성내의 京中五部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인구가 주변지역인 성저 각 면에 흩어져 거주지를 형성했다. 특히 한강 연안의 용산·마포·서강·동작·서빙고·두모포·뚝섬 등이 점차 경제적으로 활발한 활동무대가 되면서, 이농민들이 상인·수공업자·임노동자와 같은 도시 하층민으로 정착하는 신흥촌락이 형성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용산·마포·서강을 포함한 서부 교외지역의 주민은 호구 9,750, 인구 34,125명으로 다른 지역보다도 유난히 밀집되어 있었는데, 이는 한강 연안지역이 활발한 경제적 활동과 관련하여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고용기회 또는 호구지책을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538)조성윤,<조선후기 서울의 인구 증가와 공간 구조의 변화>(≪한국 사회구조의 전통과 변화≫: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 43, 문학과지성사, 1994).

19세기 서울의 경제구조는 농촌사회의 변동―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농민층 분해과정의 진행에 따른 계층구조의 재편성―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변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구조가 상당한 정도로 해체되고 있었고,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이 상업, 수공업, 기타 제조업 부문을 중심으로 확대되면서 자본주의적 경제구조로 이행해 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개항을 전후한 시기까지는 여전히 이행기의 과도적인 형태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여줄 뿐, 급격한 변동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개항 이후 이러한 조선사회 내부의 변동과정, 특히 서울의 사회경제구조의 변동은 일본세력의 침투에 따라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면서 전개되어 갔다. 당시 우리 나라의 개항은 세계 자본주의시장의 동아시아지역에서의 마지막 개항이라는 점에서 필연적이었고 오히려 뒤늦게 실현된 셈이었다. 이미 자본주의 열강에 종속되어 있던 절대주의체제의 일본에 의해서 불평등조약에 의한 개항이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비록 구미 자본주의 열강과의 직접적인 수교통상은 아니었지만, 우리 나라가 일본을 매개로 자본주의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개항 후 일본과의 무역구조는 일방적인 일본측의 특권과 無關稅貿易이었고, 일본 상업자본이 거류지를 중심으로 해로무역을 독점하여 영국의 자본제 섬유제품을 비롯한 각종 洋貨를 중계 유입시키는 한편 우리 나라의 곡물과 金·地金을 유출시키는 형태였다. 관세의 장벽 없이 유입된 서구상품은 일반 농민과 도시 하층민의 생활을 직접 위협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각종 서구상품과 맞서 싸우는 織布業者를 포함한 많은 수공업자들을 몰락시키고 있었다.539)姜德相,<李氏朝鮮 開港直後における朝日貿易の展開>(≪歷史學硏究≫265, 1962).
김경태,<개항과 불평등조약 관계의 구조>(≪한국근대경제사연구≫, 창작과비평사, 1994).
梶村秀樹,<李朝末期 綿業의 流通 및 生産構造>(≪韓國近代經濟史硏究≫, 사계절, 1983).

또한 우리 나라의 주식인 쌀이 대량 유출되었는데, 이는 곡가의 앙등을 가져와 개항 이후 1882년 사이에 곡가가 약 3배 이상 급등하는 현상을 빚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곡가가 물가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물가상승은 도시경제의 구조를 뒤흔들어 놓을 뿐만 아니라 모든 물자를 시장을 통해 구입하여 생활하는 도시민, 특히 하층민들에게는 생계를 직접 위협하는 심각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일본과의 무역은 이익에 민감한 일부 특권상인들이 미곡의 수집·중계와 양화의 유통과정에서 성장하게 만든 반면, 도시 하층민들에게 집중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540)金敬泰,<對日不平等條約改正問題發生의 一前提―開港前期의 米穀問題에서 본 外壓의 實態>(≪梨大史苑≫10, 1972).
吉野誠,<朝鮮開國後の穀物輸出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12, 1975).

서울주민의 계급구성도 바뀌고 있었다. 농촌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전입인구가 도시 하층민으로 정착하면서 계속 축적되어 감에 따라 상인·수공업자계급이 크게 늘어났고, 이들이 분화함으로써 거대한 자본을 축적하는 富商과 성장하는 수공업자들이 존재하는 한편, 소상인, 영세수공업자, 수공업노동자와 잡역노동자, 상품하역 및 선적작업과 토목공사 등 각종 공사에 고용되는 임노동자, 일자리 없이 떠도는 부랑자 등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회계급이 출현하고 있었다.

이러한 서울주민의 계급구조 변동은 주로 경제구조의 변동에 의해, 그리고 급격히 진행되고 있던 신분제도의 해체현상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세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인 사회신분제도의 해체현상은 신분구조의 逆階層化로 나타나고 있었다. 양인 및 천인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양반 또는 중인으로 상승하는 반면, 일부 양반인 대지주, 특권관료들에게 부가 집중되면서 많은 양반들이 경제적으로 낮은 지위로 떨어져 하층민으로 편입되고 있었다.541)四方博,<李朝人口に關する身分階級別的考察>(≪朝鮮社會經濟史硏究≫中, 東京;國書刊行會, 1976.
金容燮,<朝鮮後期 身分制의 動搖와 農地所有>(≪증보판 朝鮮後期農業史硏究[I]≫, 지식산업사, 1995).
김인걸,<조선후기 신분사 연구 현황>(近代史硏究會 編,≪韓國中世社會 解體期의 諸問題≫하, 한울, 1987).

19세기 서울의 하층민542)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도시 하층민이다. 하층민이라는 개념은 물론 엄밀한 사회학적 개념은 못된다. 그러나 그들이 도시사회의 계급구조 내에서 정치적·경제적으로 힘을 갖지 못한 자들로서 저소득, 또는 불완전 취업상태에 있는 소상인, 영세수공업자들과 실업자, 부랑자 등의 여러 집단을 포괄하는 범주로는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은 농민층 분해과정에서 몰락한 농민들이 도시로 들어와 정착하는 자들과 도시 안의 상업·수공업 등 각종 부문에서의 경쟁과 분화과정에서 몰락하는 자들로 구성되었는데, 두 부문 가운데서도 특히 이농민들의 도시유입에 의해서 계속적인 충원과 증가가 이루어졌다. 토지로부터 밀려난 유민이 서울로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지만, 서울에서는 유휴노동력을 흡수하여 역동적인 생산부문으로 고용할 수 있는 자본주의 부문이 크게 확대된 상태가 아니었다. 수공업을 비롯한 각종 생산부문과 유통부문의 광범위한 고용구조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전국적인 시장권을 대상으로 대량 상품생산을 수행하는 공장제 수공업단계로의 이행,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폭넓은 침투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 시기 서울은 아직 이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세의 신분제도와 계급관계는 해체되고 있었지만, 자본주의 특징을 지닌 새로운 계급은 아주 부분적으로만 형성되고 있었고, 중세사회 해체기의 과도기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범람하는 과잉 노동력 때문에 과잉 실업현상이 계속됨으로써 낮은 임금수준이 유지되었고, 한 직업에 지속적으로 취업하는 경우보다는 계속 일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는 日雇的인 형태의 임시 불완전고용이 주된 고용형태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도시 하층민의 불완전고용형태와 높은 수평이동율은 그들의 수입을 매우 낮은 수준으로 묶어 놓았고 낮은 수준의 생활조건을 감수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었다.543)尹用出,<17∼8世紀 土木工事의 募軍-役夫動員形態의 變質問題를 中心으로>(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82).

서울 하층민의 주요 구성부분은 크게 보아 소상인·영세수공업자·임금노동자·관청 말단직책 담당자·하급 군병·부랑자 등의 여러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 각각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해 볼 수 있다.

① 영세소상인:도시에 새로 정착하는 하층민들이 과잉 실업상태에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생계유지 방식의 하나는 소상인으로 활동하는 길이었다. ‘無依窮民’·‘窮村僻巷의 남녀행상’ 등으로 표현되는 이들은 매우 영세한 자본으로 상업활동을 하는 가난한 자들이었다. 이들의 상업행위는 바구니에 물건을 담아 가지고 돌아다니는 행상, 한두 필의 말등에 물건을 싣고 팔러 다니는 馬販子, 도성 안팎 길거리의 곳곳에 변두리 마을마다 길목마다 假家를 짓고 상업행위를 하는 좌상 등의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소상인들 중에서 중간도매 또는 시전을 설립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는 경우도 일부 있었지만, 시전과 사상 모두가 심하게 도고를 전개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발전을 저지당한 채 몰락하거나 영세한 상업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544)≪備邊司謄錄≫170책, 정조 11년 정월 15일.
≪各廛記事≫地卷, 영조 47년(건륭 30) 10월·정조 5년(건륭 46) 4월.
柳壽垣,≪迂書≫, 四民總論.
林仁榮,≪李朝魚物廛硏究≫(숙명여대 출판부, 1977).
② 영세수공업자:수공업자들은 대부분 동업조합을 구성하여 관부의 賃傭私工에 응하는 한편, 서울 시내 각처에 흩어져 있는 작업장인 匠房에서 상품을 제조하여 貢人 또는 상인들에게 넘기거나 소비자들에게 직접 판매하며 소상품 생산활동을 하고 있던 자영수공업자였다. 이들의 대부분은 영세한 규모였으며, 그 중 몰락한 영세수공업자들이 상인자본의 지배하에 예속되면서 상인들에게 원료와 판로를 봉쇄당한 채 선대제에 의한 생산을 하는 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545) 宋贊植,≪李朝後期 手工業에 관한 硏究≫(서울大 出版部, 1973). ③ 임노동자:이들은 고용 주체에 따라 민간부문 고용노동자와 관부 고용노동자들로 나눌 수 있다. 한강 연안에서 상품하역, 선적작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그리고 농업노동자들은 민간부문 고용노동자이며, 관부의 각종 행사와 토목공사에 고용되거나 한강 연안에서 세곡·공물운반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관부 고용노동자들이었다.
국가에 의한 고립·고용노동자는 과거의 징발부역군과는 달랐지만, 고용주체가 중세국가이고 노동이 가치증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중세적 성격의 고용관계를 벗어났으면서도 아직 자본주의 노동자라고 보기 어려운 과도기적인 형태의 임노동자였다.546) 尹用出, 앞의 글. 이에 비해 민간부문 고용노동자는 가치증식을 전제로 한 생산부문, 또는 유통부문의 고용이라는 점에서 근대 자본주의적 성격에 접근하는 형태로 볼 수 있다. 특히 부분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한 수공업공장에 흡수되어 수공업노동자가 될 경우에는 자본―임금노동의 자본주의적인 고용관계에 속하는 근대적 노동자가 나타나고 있었다.547)金泳鎬,<朝鮮後期 手工業의 發展과 새로운 經營形態>(≪大東文化硏究≫9, 1972). ④ 관청 말단직책 담당자:皂隷·羅將·禁隷는 물론 使喚·日守 같은 관청의 각종 말단직책이 역제의 변동과정에서 부역으로부터 대부분 고립화되고 있었으며, 그 밖에도 관청뿐만 아니라 각 궁궐내의 곳곳에서 일하는 자들이 모두 부역이 아닌 고립으로 충원되고 있었다.548) 姜萬吉,<朝鮮後期 雇立制發達-差備軍과 造墓軍의 雇立化를 중심으로>(≪韓國史硏究≫13, 1976).
―――,<朝鮮後期 雇立制發達-皂隷·羅將을 중심으로->(≪世林韓國學論叢≫1, 1978).
“궐내 각처 고립군이 모두 동서 곳곳에서 온 오합지배”라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549)≪正祖實錄≫권 12, 정조 5년 10월 정유. 이러한 하급 말단직책의 전문직업화 추세에 따라 많은 도시 하층민들이 이 부문에서 생업을 찾고 있었다.
말단직책은 대부분 고용조건이 나쁘고 苦役이었으므로 경제수준이 아주 낮은 자들이 주로 고립에 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대민접촉이 잦은 일부 직책―보기를 들면 좌우포도청의 校卒,550)≪備邊司謄錄≫247책, 철종 11년 5월 10일. 五部의 吏屬551)≪備邊司謄錄≫222책, 순조 34년 11월 28일.
≪日省錄≫, 고종 1년 정월 18일.
―의 경우는 비교적 사정이 달랐다. 이들은 국가 수취구조의 하부 기능을 담당하면서 중간착취를 통하여 민중들로부터 온갖 종류의 잡세를 받아 내서 자신들의 낮은 급료를 보충하고 있었다. 특히 많은 부분의 횡령 또는 착취가 가능한 직책의 경우는 일정한 권리금이 붙어 매매되기도 하였다. 균역청 庫直이 그러한 경우이다.552)≪左捕廳謄錄≫권 6, 을사 4월 罪人金串致案. 이들은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볼 때 그들의 수탈대상인 도시 하층민들과 대립관계에 서 있는 복합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⑤ 하급 군병:각종 관청·궁궐의 말단직책에 고용되는 자들과 기본적으로는 같은 성격의 고용부문으로서 대부분 도시 하층민들 가운데서 모집에 응모하여 군병이 된다. 하급 군병은 특히 이 글의 분석목표인「임오군란」의 주체세력으로서 중요한 집단이므로 따로 자세히 검토하도록 하겠다. ⑥ 부랑자:농촌으로부터 흘러 들어와 뚜렷한 거처와 일자리 없이 떠돌아다니는 流丐, 또는 간헐적으로 취업은 하지만 대체로 일정한 직업이 없는 ‘道下相賤之 浮浪無賴輩’ 등으로 표현되는 자들이다. 이들 중에 일부는 말단관리 또는 양반사대부들에 私募되거나, 작당되며 그들과 결탁하여 대민수탈의 무력행사자로 동원되고 있었다.553)≪備邊司謄錄≫203책, 순조 13년 12월 10일 및 247책, 철종 11년 7월 10일.

이상과 같이 도시 하층민들은 각 직업이 지닌 성격과 노동조건에 따라 다양하고 복합적 구성을 보여주면서 이행기의 과도기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조건과 생활방식은 대체로 동질적이었다. 이들은 도성내의 빈촌이나, 교외의 변두리 마을, 또는 강촌에서 신흥촌락을 형성하며 집단거주하고 있었으며, 그렇지 못한 자들은 남의 집에 貰居·借居하거나 진흙집 또는 움집에 기거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농민들과 달리 쌀을 비롯한 각종 농산물, 수공업 생활필수품을 시장으로부터 구입해서 생활하는 소비자였으며, 그것도 그날그날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細窮民들이었다. 때문에 물가의 극심한 변동, 특권상인들의 독점행위는 이들의 생계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서울주민들 중에서 각종 세와 요역의 주담당자로서 국가가 필요하는 재정과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조세수취를 담당하는 말단관리들로부터 온갖 종류의 잡세를 착취당하는 위에 토착양반들에게도 침학을 받고 있었다.554)≪備邊司謄錄≫193책, 순조 2년 정월 20일, 204책, 순조 14년 5월 10일 및 247책, 철종 11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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