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2)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 (2) 정치적 차원에서의 운동의 실현

(2) 정치적 차원에서의 운동의 실현

앞에서 검토하였듯이 저항운동이 서울 시내 전역은 물론 왕궁까지 휩쓸었고 더 이상 무력과 기존 정치세력집단에 의한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까지 발전하였다. 이에 고종은 대원군의 집권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크고 작은 모든 일은 대원군이 품결한다”는 왕명이 내려짐으로써 대원군은 사실상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615)≪左右捕廳謄錄≫권 1, 위와 같음.
金衡圭,≪靑又日錄≫, 임오 6월 초10일.
≪政治日記≫권 14, 임오 14년 6월 초10일.
대원군은 집권하자마자 운동에 참가하고 있던 군병을 비롯한 도시 하층민들을 무마하기 위하여 그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1단계 정책을 내놓았다. 고종의 自責敎旨를 반포하여 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한편,616) 金衡圭, 위와 같음.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여 三軍府로 바꾸며,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폐지하고 2영을 다시 5영으로 복구시킴으로써 민씨 척족정권이 추진한 개화정책을 백지화시킨 것이다.617) 위와 같음.

대원군이 이러한 내용을 알리고 동시에 급료의 정상적인 지급을 약속하자 운동은 점차 가라앉았다. 그러나 민씨 척족정권의 핵심인물인 민비를 살해할 목적으로 궁궐에 침입했던 군병을 비롯한 하층민들이 민비를 찾아내 처단할 것을 계속 주장하며 왕궁에서 물러갈 것을 거부하였다. 결국 대원군은 민비의 國喪을 선포하였고, 비로소 이틀에 걸친 대규모의 운동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618) 위와 같음.

민중들의 힘에 의해서 민씨 척족정권이 무너지고 대원군 2차정권이 성립되었다는 사실은 한말의 사회변동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민중들의 힘을 기반으로 대원군정권이 들어섬으로써 이들의 사회변혁의 요구가 정당성을 획득하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실현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대원군 2차정권은 6월 10일부터 청군에 의해 납치당한 7월 13일까지 33일간 지속되었는데, 대원군정권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군병들의 실질적인 힘의 장악과 도시 하층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기반 때문이었다.

운동이 일단 가라앉으면서 일반 하층민들은 모두 흩어졌지만 군병들은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군병들은 자신들이 지녔던 무기는 물론 무기고에 남아 있던 무기들까지도 모두 탈취해 내어 무장하면서 사대문과 성안 곳곳을 경비하고 서울의 치안을 장악하였다.619)≪承政院日記≫, 고종 19년 6월 11일.
金衡圭,≪靑又日錄≫, 고종 19년 6월 24일.
또한 尹雄烈이 10일 저녁 도망갈 때 이미 사대문은 군병들이 경비하면서 도망자를 잡으려고 기찰하고 있었다고 한다(金正明, 앞의 책, 권 7).
군병들이 쉽게 흩어지지 않고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군조직체계에 의해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은 모두 하급 군병들이었으므로 일관된 상하관계와 지휘체계에 의해 하나로 결합된 것은 아니었고, 영향력 있는 하급 간부들의 지휘에 따라 분산적으로 결합된 연합적인 형태였다. 군병들은 소규모 부대로 나뉘어 활동하면서 도성경비를 담당하는 한편 민씨 척족세력과 개화파, 중인 부호 등에 대한 보복을 계속하였다.

군병들은 서울의 곳곳을 경비하면서 민씨 관련인물과 개화파의 색출작업을 벌여 “일본인에게 친한 자와 개화에 뜻을 두었다고 알려진 자들을 체포하고, 옥에 가두거나 죽이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으며”620) 金正明, 위의 책(권 2), 梅津中尉聽取朴永圭情報, 141쪽. 그리고 “군병들이 정동으로 가서 이미 살해된 민씨 척족대신 閔致庠의 집을 부수고, 倭別技에 소속된 자, 또는 나라에 유명한 무당과 박수의 집 등을 부수지 않음이 없었으며” 중인 부호가를 70여 채나 부수는 등의 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다.621) 金衡圭,≪靑又日錄≫, 고종 19년 6월 11일.
鄭 喬,≪大韓季年史≫, 고종 19년 7월.
또한 민비의 국상으로 설치된 望哭處所에 분향하려고 나선 양반관료들을 군병들이 길 위에서 가로막고 붙잡아 봉욕을 주며 가마를 부수고 있었기 때문에 곡하러 가는 양반관료들도 찾아보기 어려웠다.622) 필자미상,≪日記≫, 임오 6월 11일. 양반지배층과 부호들은 계속되는 보복과 폭력행사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며 몰래 시골로 도망가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 때 보부상집단이 서울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져서 대원군은 하층민들에게 무기를 모두 풀어 주어 군병들과 함께 도성을 방비하도록 했고, 도시 하층민들은 무기를 들고 도성을 수비하였으나 그것은 소문임이 밝혀졌다.623) 보부상침입설에 관한 기록은 각종 사료에 나타나 있다.
朴周大,≪羅巖隨錄≫, 고종 19년 6월 12일.
金衡圭,≪靑又日錄≫, 임오 6월 12일.
필자미상,≪日記≫, 임오 6월 12일·13일.
보부상과 승도들이 도성으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은 비록 헛소문으로 그쳤지만, 중요한 것은 대원군과 도시주민들이 이 소문을 사실로 받아들였으며, 이 때문에 도시주민들이 도망가느라고 일대 혼란에 빠졌고, 다른 한편 침입에 대비해 방어준비를 지시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대원군, 도시 하층민(군병 포함), 그리고 보부상과 민씨 척족정권 각각의 이해관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한 좀더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미 민영익·윤웅렬을 비롯한 민씨 척족세력과 개화파 부호들의 상당수가 서울 사대문을 빠져나가 도망하였으므로 대원군은 전국적으로 수색령을 내렸다. 중요 인물의 容貌把記를 전국에 띠우는 동시에 포도청 포교들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어사를 전국 8도에 내려보내 피난간 자들을 조사시켰다.624) 金衡圭,≪靑又日錄≫, 고종 19년 6월 24일.
金正明, 앞의 책(권 7), 135∼140쪽.
한편 군병들은 서울 시내 각처에서 도망간 자들의 가산을 모두 찾아내고 있었고, 성밖으로 나아가 도망간 자들의 색출작업을 펴면서 곳곳에서 보부상의 왕래를 금지시키고 근교의 유명한 사찰들을 파괴하고 다녔다.625) 필자미상,≪日記≫, 임오 6월 22일. 하층민의 대규모 운동과 정권이 바뀐 소식은 이미 전국적으로 알려져 그 여파를 미치고 있었다. 전국 각처에서 土匪들이 봉기하고 있었던 것은 그 한 표현이었다.626) 필자미상,≪日記≫, 임오 6월 29일.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원군은 정권수립에 따른 많은 문제에 부딪치면서 민중들의 사회개혁의 요구를 반영하는 개혁안을 내놓고 있었다. 군병을 포함한 도시 하층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립되었지만, 대원군정권은 결코 이들의 요구를 충분히 받아들여 개혁을 수행할 수 있는 정권은 못되었다. 대원군정권은 어디까지나 지배층의 입장에서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봉건적인 사회체제를 회복 강화하려는 정권이었다.627)대원군정권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상당히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잠정적으로 일정한 한계가 있지만 개혁적인 입장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아래와 같은 글들의 견해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金容燮,<韓末日帝下의 地主制-事例1:江華金氏家의 秋收記를 통해서 본 地主經營>(≪東亞文化≫11, 1972).
―――,<朝鮮後期 軍役制 釐正의 推移와 戶布法>(≪省谷論叢≫13, 1982).
梶村秀樹,<朝鮮近代史若干の問題>(≪歷史學硏究≫288, 1964).
藤間生大,≪近代東アジア世界の形成≫(東京;春秋社, 1977).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이 대원군정권의 수립을 바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대원군정권은 민씨 척족세력과는 달리 양반귀족관료·대지주·특권 상인세력을 견제하면서 도시 하층민을 포함한 민중들의 요구를 상당한 수준까지는 수용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는 점이다. 1차 집권시기에 대원군정권이 실시했던 여러 개혁의 내용은 현 지배층의 이익을 일정하게 줄이고 도시 하층민과 농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감소시킴으로써 사회체제를 안정시키고 왕권강화를 꾀한 것이었다.

둘째, 대원군에 대한 민중들의 기대가 실체보다 훨씬 컸다는 점이다. 1차 대원군 집권시기 동안 민중들에게 부각되었던 대원군의 이미지는 대원군이 민중들의 요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선 형태로 남아 있었으며, 민씨 척족세력이 일본세력을 끌어들이며 실시한 개화정책과 경제의 혼란은 쇄국정책을 고수했던 대원군의 이미지를 한층 이상적인 형태로 높여 주고 있었다.

셋째 이유는 도시 하층민들의 정치의식의 한계에 있었다. 그들은 민씨 척족정권을 무너뜨렸으면서도 새로운 권력관계의 창출로 나아가지 못하고 기존 세력관계의 틀 안에 있던 대원군세력에 자신들의 요구의 실현을 기대하였다. 그들의 정치의식은 아직 자신들의 요구를 명확히 제시하고 정치적 차원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세력집단을 형성시키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요구를 대변하여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정리하고 세련화시키는 지식인들의 영향력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세 가지 이유로 민중들은 대원군정권이 적어도 일본을 포함한 자본주의세력을 막아 줄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일본세력을 끌어들이고 민중을 외면한 민씨 척족정권과 개화파·대지주·특권상인세력을 누르고 민중적인 방향으로 내정을 개혁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대원군정권은 정권수립에 따른 많은 문제에 부딪치면서 계속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대원군은 민비의 국상을 예정대로 진행시키기 위해 國葬都監·殯殿都監·山陵都監 등을 설치하여 장례절차를 강행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대신들이 민비의 시체가 없는 가운데 장례 치르는 것을 반대하거나 신중론을 폄으로써 장례절차가 지연되고 있었다.628) 權錫奉,<壬午軍變>(≪한국사≫16, 국사편찬위원회, 1975), 405∼406쪽.

또한 대원군은 신정권을 수립하면서 민씨 척족세력을 제거하고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는 인사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고종 친정 10년간 대원군세력이 철저하게 제거당한 결과 신정권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크게 부족하였다. 대원군이 우선 등용한 인물은 남인계열에 속하는 노정치가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그들 가운데는 임명을 받고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때문에 대원군은 친대원군계열의 정객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투옥되었거나 정배당한 죄수들을 석방시키는 비상수단을 썼다. 그러나 이들 석방된 인물들은 대부분 대원군정권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집권기간이 한달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이다.629)≪日省錄≫, 고종 19년 6월 10·11·14·15일.
權錫奉, 위의 글, 406∼407쪽.
사실상 대원군이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개혁을 추진하기에는 이미 그의 세력이 지나치게 약화되어 있었으며, 재정비하기에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원군정권이 제시한 몇 가지 개혁안은 대체로 민씨 척족정권이 개화정책으로 추진했던 것들을 이전의 상태로 복귀시키고 각종 제도적 모순, 즉 부차적인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민중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내놓은 것이었다. 몇 가지 보기를 들면 ① 군병급료의 정상적인 지급, ② 과다징수한 세금을 국가에 미납한 10읍 수령체포, ③ 鑄錢의 금지, ④ 각종 都賈금지, ⑤ 辛甘菜와 海紅菜진상을 비롯한 잡세금지 등이었다.630)≪日省錄≫, 고종 19년 6월 10·11일.
金衡圭,≪靑又日錄≫, 임오 6월 26일.
보다 상세한 내용은 金正起, 앞의 글, 482쪽.
이러한 정책은 대원군 1차집권 당시의 정책노선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으로서 아직 새로운 방향에서의 개혁안은 제시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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