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2)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 (3) 외세의 개입과 운동의 좌절

(3) 외세의 개입과 운동의 좌절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본과 청국은 각각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무력을 바탕으로 조선사회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각축을 벌었다.631)일본과 청국이 군대를 파견한 동기와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아래와 같은 상세한 연구가 나와 있다.
田保橋潔,≪近代日鮮關係の硏究≫상(朝鮮總督府 中樞院, 1940).
申國柱,≪近代朝鮮外交史≫(探求堂, 1965).
權錫奉,≪淸末 對朝鮮政策史硏究≫(一潮閣, 1986).

하나부사공사가 살아 남은 공사관원들과 함께 영국배로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한 날은 6월 15일이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외무성에 군란의 발생을 무전으로 보고하였다. 아울러 부산과 원산도 위험에 처해 있으니, 곧바로 군함을 파견하여 거류민을 보호하고 서울의 상황을 함께 탐지할 것이며, 앞으로 조선정부와의 교섭을 위해서는 강력한 병력시위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덧붙였다.632)金正明 編,≪日韓外交資料集成≫2, 電信:京城暴動事變情報ノ件, 朝鮮國駐箚花房辨理公使ヨリ井上外務卿宛, 93∼94쪽.
田保橋潔, 위의 책, 788쪽.

전보를 받은 외무경 이노우에(井上馨)는 16일 긴급내각회의를 소집하였다. 각의에서는 밤늦게까지 대책이 논의되었지만, 즉시 개전을 주장하는 강경론과 교섭에 의한 처리를 우선하자는 온건론이 맞서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17일 아침부터 계속된 회의에서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천황은 외무대신의 온건론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하였다. 그 내용은 조선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여 전권위원으로 하나부사공사를 파견하되 군대가 호위하고, 외무경이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직접 지휘하면서 세부사항을 판단 결정하고 부산과 원산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군함을 즉각 파견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각의의 결정은 육해군의 무력시위를 배경으로 삼아 조선정부로부터 사죄와 배상을 받아 내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각의는 외교담판은 공사에게, 군사상의 일은 군지휘관에게 맡겨 함께 파견하고, 총지휘를 외무경이 맡도록 결정하였다.633) 田保橋潔, 위의 책, 788∼789쪽.
李光麟,≪韓國史講座≫V 近代篇(一潮閣, 1981).

이노우에의 지시에 따라 외무성 서기관 곤도(近藤眞鋤)가 먼저 군함 2척에 해병대 150명과 함께 선발대로 6월 22일 제물포로 파견되었다. 그 뒤 24일 직접 시모노세키로 온 이노우에가 하나부사와 면담한 다음, 앞으로의 협상 및 행동지침과 함께 출발명령을 내렸다.634)이 때 내려진 명령은 다음과 같다. ① 朝鮮政府는 태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우리 나라에 문서로 사죄의사를 표시함과 아울러 다음 사항을 이행할 것, ② 우리의 요구를 받은 이후 15일 이내에 凶徒의 徒黨을 나포하여 우리 정부가 만족할 만한 엄중한 처분을 할 것, ③ 遭難者를 위하여 응분의 贍卹하도록 할 것, ④ 조약위반 및 출병준비에 따른 비용을 배상할 것, 배상액은 우리측 준비의 實費에 준할 것, ⑤ 장래의 보장으로 朝鮮政府는 향후 5년간 서울주재 日本公使館을 수호하기 위하여 충분한 병력을 준비할 것, ⑥ 우리 商民을 위하여 安邊을 개항장으로 할 것 등 6개 항목이었으며, 이 밖에 협상에 따라서 최대한으로 다음 3개의 요구를 추가하고 있었다. ⑦ 만일 조선정부가 중대한 과실을 범한 사실이 있으면, 巨濟島나 松島(鬱陵島)를 日本에 양여하여 사죄의 뜻을 표할 것, ⑧ 만일 朝鮮政府의 요인 중에 폭도를 비호하는 자가 있으면 朝鮮政府는 곧 그 자를 면직하여 상당한 처분을 하도록 할 것, ⑨ 조선의 정세가 위중할 경우, 배상처분을 강행하는 것은 臨機에 적절히 처리할 것. 하나부사공사의 지휘로 군함 4척, 수송선 3척, 그리고 1개 대대병력 약 1,500명이 6월 29일 제물포로 들어왔다. 이 배에는 일본을 방문하고 귀국하던 김옥균과 서광범이 동승하였다.

한편 청국은 조선에서 봉기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6월 18일 주일공사관의 통지를 받고 알게 되었다. 일본 외무성의 연락을 받은 주일공사 黎庶昌은 사실과 함께 일본정부가 군함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니 중국도 군함을 파견해 사태를 지켜 볼 필요가 있다고 전보로 건의하였다.635) 權錫奉, 앞의 책(1986), 190∼191쪽.
田保橋潔, 앞의 책, 830∼831쪽.
彭澤周,≪明治初期日韓淸關係の硏究≫(東京;塙書房, 1969), 186∼187쪽.
李鴻章이 모친상으로 잠시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대리로 직책을 수행하던 署理北洋大臣兼直隷總督 張樹成은 곧바로 총리아문에 보고하는 한편, 天津海關道 周馥에게 명령을 내려 당시 천진에 머물고 있던 영선사 김윤식과 문의관 어윤중을 만나 사태를 알리고 조선사정에 대한 정보를 얻도록 했다.

주복은 김윤식과 어윤중을 만나 필담을 나누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매우 놀라고 당황하였다. 그러나 사태를 파악하고는 하급 군병이 중심이 된 봉기의 배후에는 대원군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중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국왕을 보호하고 난을 진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636) 權錫奉, 위의 책, 6장 大院君의 被囚.

중국정부는 일본이 군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琉球를 점령했듯이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크게 긴장했다. 그러나 아직 대규모 군대의 파병을 쉽게 결정할 단계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일본측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 먼저 선발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북양함대 제독 丁汝昌이 馬建忠과 함께 군함 3척을 이끌고 6월 22일 천진을 떠나 27일 제물포로 들어왔다. 이 때 어윤중은 이 부대와 함께 돌아왔다.

정여창은 먼저 어윤중을 보내 정보를 수집하도록 하는 한편, 이미 선발대로 와 있던 일본 외무성 서기관 곤도의 방문을 받고 의견을 청취하였다. 어윤중은 대원군이 주모자이며 하루빨리 난을 진압해야 한다는 내용과, 이를 위해 본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수도를 점령하고 주모자를 체포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마건충 역시 정세를 관찰한 결과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므로 청국이 우세한 병력을 동원하여 주모자를 체포하고 반란세력을 진압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사태를 파악한 정여창은 곧바로 천진으로 돌아왔다.637)申基碩,<淸韓從屬關係-壬午軍亂을 前後한->(≪亞細亞硏究≫2-1, 1959), 20∼21쪽.

선발대를 파견한 직후 청국정부는 파병원칙을 결정해 이미 24일 황제의 재가를 받았다. 그리고 25일 주일공사로부터 ‘왕비와 대신 13명이 살해당했고,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있다’는 내용의 전문을 받자, 육군을 파견하기로 하고 廣東水師提督 吳長慶을 책임자로 임명해 淮軍 6營을 거느리고 출동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때 중국정부는 난의 진압을 위해 우선적으로 대원군을 체포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7월 4일 출발한 오장경이 지휘하는 3,000명의 군대는 7일 제물포에 정박 중이던 일본군을 피해 남양만 마산포에 도착하였다. 김윤식은 청국군의 향도관이라는 직책을 갖고 이 부대와 함께 들어왔다. 그는 어윤중과 공동으로 국왕에게 그 동안의 경과를 장계로 보고하였다.638) 魚允中,≪從政年表≫권 3, 고종 19년 7월 초8일, 137쪽.
李光麟, 앞의 책, 150∼152쪽.
오장경은 대기중이던 마건충으로부터 그 동안 수집한 정보를 제공받았다.

하나부사공사는 인천에 머물면서 그 곳에서 사망한 일본인의 시체를 수습하면서 이미 도착해 있던 청군의 마건충과 의견을 교환하였다. 7월 2일 그는 1개 중대의 호위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와 泥峴에 진을 친 뒤,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려 7일 수행원과 함께 창덕궁으로 들어가 고종 앞에 일본측의 요구를 적은 책자를 제시하였다. 일본측의 요구는 주모자 처벌, 피해보상, 개항 및 통상의 확대, 병력주둔을 비롯한 8개 조항이었다.639) 金衡圭,≪靑又日錄≫, 임오 7월 초8일조에 보면 8개항의 요구조건은 다음과 같다.
一. 今十五日內 捕獲凶徒巨魁及其黨與 從重懲辦事.
二. 渠漢遭害者 優禮瘞葬 以厚其終事.
三. 撥支五萬圓 給與遺族並受傷者 以加禮卹事.
四. 凡因凶徒暴擧 日本國所受損害及準備出兵等 一切需費 照數賠償事.
五. 擴元山釜山仁川各港間里程 爲方百里朝鮮里法 新以楊花鎭爲開市場 咸興大邱等處爲往來通商事.
六. 任聽日本國公使領事官及隨員眷從等 遊歷門地各處事.
七. 自今五年間 置日本陸軍兵一大隊八百名 以護衛日本公使館事.
八. 但設置修繕兵營 朝鮮政府任之事.
그는 회답 기일을 3일로 정하고 회답에 따라 국교를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단절할 것인지를 결정하겠다는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태도는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동시에 조선정부에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압박함으로써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본측 요구내용이 알려지자 민심이 크게 동요하고 반일감정이 고조되었으며, 정부에서는 중요 대신들이 격분하였고 일본과 무력으로 맞설 것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대두되었다. 대원군은 이러한 여론을 배경으로 일본측의 요구가 적힌 책자를 되돌려 보내고 무력으로 대항할 강경방침을 세워 군대동원에 착수하면서 마산포에 상륙중인 청국군에게 일본군을 견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단 제물포로 돌아가 무력에 의해 해결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640) 田保橋潔, 앞의 책, 808∼811쪽. 원래 그들의 지시사항에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철수할 때는 일단 무력으로 제물포를 점령한 다음 외무경의 지시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청군이 함께 파견되어 있는 상황에서 무력점령이 자칫 심각한 충돌로까지 번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부사공사는 어쩔 수 없이 함선으로 돌아가 있게 되었다.

청군은 10일과 12일 오장경·정여창 등이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왔다. 일본군에 이어 청군이 서울로 들어오면서 서울 도성 안에는 청군이 들어와 도성을 모두 함몰시킨다는 소문이 퍼졌고, 많은 도성민들이 크게 혼란에 빠져 사대부가는 물론 일반 하층민까지도 가족을 이끌고 성을 빠져 나가 피란하고 있었고, 군병들은 청군들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다.641) 金衡圭,≪靑又日錄≫, 임오 7월 초2일.

서울에 들어온 청군은 대원군정권과 일본측과의 중재를 위해 노력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 7월 13일 진압의 1단계 조치를 취했다.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해 간 것이다.642) 黃 玹,≪梅泉野錄≫, 임오 7월 13일.
金允植,≪陰晴史≫하, 고종 19년 7월 10일.
대원군 납치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權錫奉, 앞의 책에서 검토하고 있다.
군병들을 포함한 도시 하층민들의 기반 위에 세워진 대원군정권은 아직 뚜렷한 체계를 잡지 못했고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대원군의 납치는 대원군정권의 사실상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원군 납치를 성공시킨 청국은 2단계 조치로 밤 사이에 궁궐 안팎은 물론 사대문을 수비하던 조선의 군병들을 몰아내고 서울 시내의 치안을 장악하였다.643) 鄭 喬,≪大韓季年史≫, 고종 19년 7월 17일. 주한청국대표 원세개는 일단의 청군을 이끌고 궁궐을 장악하였고, 오장경은 3,000여 명의 청군을 서울 각처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대원군 납치사건을 합리화시키면서 민중의 소요를 엄금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644) 宋近洙,≪龍湖閒錄≫, 23책 7월 14일 淸將曉諭文·淸兵所付榜文(國史編纂委員會編, 1980, 458∼459쪽).

임오군란을 일으켜 일단 성공시켰고 자신들의 요구가 정치적 차원에서 실현되는 과정을 기대하며 지켜 보던 군병을 포함한 도시 하층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청군에 의한 대원군의 납치는 자신들의 요구가 청군에 의해 좌절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서울의 하층민, 그 가운데서도 특히 군병들은 곧 무기를 들고 곳곳에서 청군과 충돌하여 소규모 전투를 전개하였다. 도시 하층민의 강력한 저항으로 청군이 한때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이에 청군은 포고문을 다시 발표하면서 탄압을 강화하였다. 군병을 중심으로 전개된 하층민 저항은 며칠간 계속되었지만 결국 우세한 화력을 보유한 청군에 의해서 거의 진압되고 말았다.645) 申國柱, 앞의 책, 148∼152쪽.

청군은 대원군정권과 정권성립의 기반이 된 도시 하층민세력의 저항을 약화시키는데 성공한 다음, 이들은 좀더 철저한 진압을 시작하였다. 청군은 조선군의 책임자이며 대원군 추종장자인 이재면을 남별궁에 억류하고, 이경하·신정희를 비롯한 대원군 추종세력을 체포, 투옥함으로써 대원군정권을 붕괴시켰다.646) 金允植,≪陰晴史≫하, 189∼190쪽.

청군은 7월 15일과 16일「임오군란」의 진원지이며 군병들의 집단거주지인 왕십리와 이태원을 공격하였다. 청군은 국왕 고종이 亂黨을 진압해 달라고 청군에게 요청하는 글과 왕십리 일대 주민에게 알리는 고시문을 김윤식을 거쳐 받아 내어 무력진압을 합리화시켰다. 왕십리지역은 張光前·吳兆有·何乘驚 등이 이끄는 부대가, 이태원지역은 오장경이 이끄는 부대가 각각 포위 공격하였다. 하급 군병들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 주민들은 투석과 방포로 용감히 대항해 싸웠으나 결국 많은 희생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로 많은 사람이 죽고 도망가기도 했지만 체포된 자가 왕십리지역 150여 명, 이태원지역 20여 명으로 모두 170여 명에 이르렀다.647) 필자미상,≪日記≫,임오 7월 16일.
金允植,≪陰晴史≫하, 고종 19년 7월 10일.
金衡圭,≪靑又日錄≫, 임오 7월 16일.
鄭 喬,≪大韓季年史≫, 고종 19년 8월.
黃 玹,≪梅泉野錄≫, 고종 18년 7월.
체포된 군병들은 모두 형조와 좌우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고 그 가운데 11명은 7월 23일 斬首刑을 받았다. 주동자 김장손·유춘만 등 8명은 청군이 습격하기 전에 도망했었지만 나중에 체포되어 8월 24일 역시 참수형을 받았다.648)<長孫等鞫案>.
李光麟, 앞의 책, 153쪽.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대원군정권과 민중저항세력은 모두 청군에 의해 진압당하고 말았다. 도시 하층민의 요구가 정치적인 차원에서 실현될 수 있는 기회는 좌절되고 만 것이다.

청군이 치안을 장악한 가운데 정권은 다시 민씨 척족세력에게로 돌아갔고, 사태가 완전히 진압된 이후인 7월 25일 국왕은 민비가 살아 있음을 공식 발표하는 동시에 국상을 치르기 위해 설치했던 도감을 폐지하였다. 이어 영의정 이하 대관들이 長湖院으로 내려갔고, 오장경은 청군 100명을 내려보내 호위하도록 함으로써 민비는 8월 1일 청군의 호위 속에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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