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4) 임오군란의 구조와 성격
  • (1) 참가층의 구성과 동원조직

(1) 참가층의 구성과 동원조직

「임오군란」에는 도시 하층민들이 폭넓게 참가했으며, 그 중심은 하급 군병이었다. 운동참가자의 구성을 보다 체계적으로 밝히기 위해서는 이들의 신분 또는 직업을 분석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점을 보여줄 자료가 부족하다. 다만 사건에 관련되어 조사받은 사람들의 심문기록과 재판기록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推案及鞫案≫5책과≪左右捕盜廳謄錄≫1책이 그것이다. 조사받은 자들은 각각 33명과 27명인데, 양쪽 자료에 겹치는 16명을 빼면 44명의 기록이 남아 있는 셈이다. 여기서는 이 기록을 이용하여 도표를 만들어 보았다.

먼저<표 1>을 보면 군병은 모두 29명으로 전체의 68%를 차지하고 있다. 군병의 80%인 24명이 훈련도감 소속이며 용호영 소속이 1명인데, 이들은 모두 급료병 즉 고용병으로 서울에 상주하는 상비군이다. 총융청 별부료군관 이외의 어영군과 총융청 아병은 번상병이며, ‘마병수역’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번상군으로 생각된다. 훈련도감 군병 가운데 하급 간부이며 운동의 지도자였던 자들은 ‘대총’·‘별기대’·‘취고수’ 등의 직책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군병들 가운데 군병으로 복무하면서 동시에 다른 생업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 심문과정에서 밝혀진 것이다. 李永植은 경기도 양주에 살다가 왕십리로 옮겨 살면서 훈련도감 취고수가 되었고, 동시에 포목상을 하고 있었는데 영동지방에 장사차 갔다가 돌아오자마자 동별영에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곧 참여하고 있다.668)<春永永植鞫案>罪人李永植案. 文昌甲은 훈련도감 牢子 宮旗手로 있으면서 농사를 짓는 한편 마을에서 중임(또는 행수)을 담당하였다. 그는 무·배추 등의 채소농사를 했는데, 그가 거주하는 왕십리 일대에서 채소 중심의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고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그는 바로 상품작물을 재배하는 상업적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인 것이다.669)<長孫等鞫案>罪人文昌甲案. 또한 洪千石은 훈련도감 군병으로 복무하다가 4년 전에 그만둔 자인데 그만두기 전부터 왕십리에 거주하면서 ‘雇賃農業’을 하며 살아가는 임노동자였다.670)≪左右捕廳謄錄≫권 1, 罪人洪千石供案. 그 밖의 경우는 심문과정에서 밝혀져 있지 않지만 다른 군병들도 상업·수공업·농업 등의 각종 직업을 가지고 활동하면서 살고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군 영 직 책 인 원
訓鍊都監 善騎隊 5 23
別騎隊 1
哨 軍 3
旗 手 2
吹鼓手 7
塘報手 1
別破陣隊摠 1
左司牌頭 1
알 수 없음 2
龍虎營 槍 手 1 1
御營廳 哨 軍 1 1
摠戎廳 別付料軍官 1 2
牙 兵 1
馬兵受役 2 2
합 계 29

<표 1>참가 군병의 성분

이 하급 군병들이 대부분 사대문밖 교외지역에 거주한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점이다.<표 2>에서 보듯이 군병들은 왕십리·이포리·안암동 등의 동부 교외지역과 청파·냉동 등 서부 교외지역에서 가족을 거느리고 다른 도시 하층민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특히 왕십리지역에는 군병들이 집단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참가자의 지역적 밀집이라는 환경적 요인이 왕십리지역에서 향촌조직과 군대조직의 결합에 의한 동원의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거 주 지 인 원
東 郊 往十里 19
安巖洞 1
鍾巖洞 1
踏十里 1
鷰尾亭洞 1
尼浦洞 2
馬場洞 1
西 郊 靑 坡 1
冷 洞 2
합 계 29

<표 2>군병의 거주지역

직 업 인 원
商 人 3
農業 兼 商人 1
農業雇傭勞動 1
農 民 1
手工業者 2
使 喚 1
無 職 1
기 타 4
합 계 14

<표 3>일반 하층민 직업

군병이 아닌 일반 하층민들의 성분은<표 3>에서 볼 수 있다. 상인은 모두 4명인데 3명은 술장수(賣酒爲業)·떡장수(賣餠爲業)·국수장수(賣麴爲業)를 하는 소상인으로, 길거리에 좌판을 벌여 놓고 파는 坐商이거나 돌아다니며 파는 行商이다.671)≪左右捕廳謄錄≫권 1, 임오 7월 23일 罪人孫順吉供案·罪人孔致元供案 및 24일 罪人趙應順供案. ‘농민 겸 상인’ 1명은 왕십리 거주자임을 고려한다면 채소를 비롯한 상품작물을 재배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농작물을 직접 팔러 다니는 소상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672)<弘根等鞫案>罪人金興燁案. 수공업자는 2명으로 모두 冶業에 종사하는 대장장이이다. 농업종사자는 3명인데 왕십리의 농업임노동자와 인천지방의 농민 1명이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 별기군교련소에서 사환일을 맡아 보던 敎練所兒와 일정한 직업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부랑자가 각각 1명씩 있다. 기타로 처리된 자 중 鄭景石은 훈련도감 선기대 군병으로 있다가 1874년 무과에 급제하면서 그만둔 자인데, 종루 假家에서 생활하고 있는 점을 미루어 상업종사자로 여겨지며,673)<弘根等鞫案>, 罪人鄭景石案. 許煜은 대원군의 심복으로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여 식객으로 있던 유생으로 생각된다.674)≪左右捕廳謄錄≫권 1, 계미 5월 20일 罪人許煜供案.
<煜等鞫案>罪人許煜案.

위에서 살펴본 대로 운동에 참가한 세력은 왕십리를 비롯한 사대문밖 교외지역에 거주하던 하급 군병·영세수공업자·소상인·고용노동자·사환·부랑자 등 여러 유형의 도시 하층민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은 다른 하층민과 마찬가지로 교외지역에 거주하며 수공업·상업 등 다른 직업에도 종사하던 하급 군병이었다.

동원과정에서는 기존 사회조직과 연결망이 하층민의 결집과 동원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전의 운동들이 어느 한 가지 조직에 의해 하층민을 동원했던 것과는 달리 임오군란에는 향촌조직과 군병조직의 두 가지 유형의 조직이 동시에 작용했는데, 이 두 조직의 결합은 하층민을 보다 많이 재빨리 동원하면서 운동이 보다 지속적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다.

기존 조직의 연결망뿐만 아니라 기존 조직의 지도자가 동원과정에서 차지하는 역할 역시 매우 중요했다. 사대문밖 동교와 서교지역의 하층민 촌락조직의 지도자인 중임(또는 임장·행수)들과 훈련도감의 하급 간부들이 각각 기존 조직내에서 이미 지니고 있던 영향력을 이용하여 동원계획과 준비를 진행시켰다. 이들은 통문을 돌려 연락을 취하는 한편, 잠재적인 불만을 지니고 있던 하층민들을 구체적인 문제로 집중시키고 일관성 있는 방향을 제시해 주면서 그들이 내세운 목표를 달성하는 쪽으로 운동을 이끌어 갔던 것이다.

향촌조직과 군병조직이 결합하여 동시적으로 작용하고 양쪽의 조직지도자들이 함께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운동의 전개과정 전체에 걸쳐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단계에서는 두 조직과 지도자들이 함께 작용했지만, 확산단계로 들어서면서 운동의 중심은 군병조직으로 옮겨졌고, 군병조직의 하급 간부들이 주로 지휘를 담당하였다. 결국 운동이 좌절되는 단계까지 이러한 양상이 계속되어 하급 군병조직을 중심체로 하여 다른 도시 하층민을 이끌어 나가는 형태를 취했던 것이다. 군병들의 경우도 이들이 모두 하급 군병이었으므로 일관된 상하관계와 지휘체계에 의해 하나로 결합된 것은 아니었고, 영향력 있는 하급 간부들의 지휘에 따라 소규모 부대로 나뉘면서 분산적으로 결합된 연합적 형태였다. 이것은「임오군란」에 동원된 하층민들이 하나의 군병조직에 의해 통일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하고 있었으며, 상황변화에 따른 전략적인 문제를 검토 조정할 수 있는 조직적 지도력을 갖추지 못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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