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4) 임오군란의 구조와 성격
  • (3) 정부 및 지배층의 대응

(3) 정부 및 지배층의 대응

훈련도감은 서울 도성의 수비의 핵심 군영이었다. 그러나 훈련도감의 중요 구성원인 하급 군병에 대한 대우는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점차 나빠지고 있었다. 더구나 군제개편으로 인한 하급 군병들의 지위 하락, 급료의 13개월 미지급, 신식 군대에 밀려 곧 도태되리라는 위기감으로 하급 군병들의 불만과 사기 저하는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그리고 개항 이후 악화되어 가던 경제사정은 도시 하층민의 생계를 위협했고, 일본공사관 설치와 별기군 창설은 일본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개된 유생들의 상소운동은 서울 하층민들의 폭넒은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정부관료들은 이러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부는 유생들의 상소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했으며 별기군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이런 조건 속에서 도봉소사건에 관련된 군병 4명을 체포, 구금한 강압적 조치는 하급 군병들의 잠재적인 불만과 저항의식을 폭발시켰고, 군병들이 집단등소를 전개하는 단계에 이르러서도 이들의 요구를 일정한 부분이나마 수용하려는 자세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사태가 확대된 다음 급료지급책임자를 파직시키고 군 지휘책임자를 교체함으로써 이들을 희생양을 삼으려 했던 조치는 오히려 적대감을 확대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민씨 척족정권은 계속 무력에 의한 진압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서울의 수비를 담당한 주력부대인 훈련도감의 하급 군병들이 저항의 중심세력이 된 상황 속에서 이들을 통제할 방법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운동이 계속 확산되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지도층의 통제력은 마비상태로 빠져 들어갔으며, 결국 하층민의 저항을 통제하지 못한 민씨 척족정권은 무너지고 정치권력이 대원군세력으로 넘어갔다.

새로 들어선 대원군정권에 의한 개혁안 제시와 민비의 국상 결정과 같은 일련의 조치들은 효과적인 것이었으며 대부분의 하층민들에게 보상심리로 작용한 듯하다. 물론 대원군정권의 개혁안이 도시 하층민의 요구를 전적으로 만족시켜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전의 민씨 척족정권의 정책에 비하면 하층민의 눈에는 과단성 있는 개혁이었고 자신들의 요구가 상당한 정도로 반영된 것이었다. 이 조치로 확대되던 저항운동은 일단 가라앉았다. 그러나 하층민 중에서 군병조직은 쟁취한 결과를 지키고 강화하기 위해 계속 유지되었다. 하층민 군병조직을 기반으로 서 있던 대원군정권으로서는 이들에 대한 더 이상의 통제가 불가능했으며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거나 협조하였다.

도시 하층민의 운동은 외세에 의해 진압되었다. 일본군과 청군이 제각기 자국의 이익과 관련해서 우리 나라로 들어오자 민씨 척족세력과 개화파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청군의 힘에 의지하여 대원군세력을 밀어내고 하층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결국「임오군란」은 실패하고 말았다. 운동구조의 내적인 한계―즉 이념과 조직상의 한계―와 함께 외세의 개입에 의해서 좌절된 운동이었다.

외세에 의지하여 정권을 회복한 민씨 척족세력과 개화파는 도시 하층민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무력으로 억누르며 정권을 회복할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식의 정권회복은 외세의 침투를 더욱 크게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점차 청국과 일본 양대세력이 깊이 침투해 들어오는 길이 터놓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趙誠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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