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선정부의 대청통상정책

1) 조선정부의 대청통상정책

1876년(고종 13) 문호개방 직후에도 조선정부는 청과 일본과의 관계를 전통적인 ‘事大’와 ‘交隣’이라는 관념으로 규정짓고 있었다. ‘사대’와 ‘교린’ 관계는 조선이 서구 근대문물 수용과 함께 만국공법적인 체계를 수용하고자 할 때에는 극복되어야 하는 인식체계였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개항 직후 한참 동안 일본과의 통상을 이전의 교린관계의 회복이란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었고 청과의 관계도 여전히 사대관념으로 규정짓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대외인식은 조선이 일정하게 서구 근대문물을 수용하면서 국제관계에서의 만국공법적인 세계체제에로 편입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달라지게 되었다. 1880년≪朝鮮策略≫의 전래는 이 같은 조선사회의 전근대적 세계질서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한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책략≫은 개항 이후 몇 해가 지나도록 조선정부 내부에서조차 수교통상에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일부 대신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 매개가 되었다.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었다가≪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온 金弘集이 주일청국공사 何如璋에게 보낸 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깨우쳤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전과 비교하여 달라졌다”676)≪淸季中日韓關係史料≫2, #353-(1), 光緖 7년 2월 3일(臺北: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1972), 463b쪽.
#는 자료에 나타난 문건번호, a는 쪽의 윗단, b는 쪽의 아랫단.
고 당시의 상황을 말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조선책략≫의 전래는 조선정부의 대내외정책의 방향과 추진 속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동아시아 질서체제 즉 조공체제에서 국가와 국가간의 국제관계를 만국공법적인 체제로 간주하게 되는 인식의 전환에 그 동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조선정부는≪조선책략≫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대청관계에서 일정하게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對淸通商要請을 비롯하여 앞으로 시행하고자 하는 문제들에 대해 청에 자문을 구하는 ‘請示節略’을 작성했다. ‘청시절략’은 당시 조선정부가 추구하고자 하는 개화정책에 대한 구상안이었다. 따라서 청시절략이 마련된 1880년은 조선이 비로소 대외관계에서 통상을 기본으로 하면서 대내적으로 개화자강정책의 기틀을 마련하는 시점이 되는 해였다.677) 具仙姬,≪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혜안, 1999), 28쪽.

조선정부에서 ‘청시절략’을 작성한 것은≪조선책략≫의 내용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하지만, 그 근저에는 통상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조선정부가 당면 정세에 대응하여 추진하고자 하는 부국강병책의 모색이 있었음으로써 가능했다. 비록 조선정부관료 모두가 대외통상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678)≪조선책략≫에 대해 두세 사람의 廷臣이 협찬했으나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淸季中日韓關係史料≫2, #353-(1), 光緖 7년 2월 3일, 462b쪽 참조. 이로 보아 오히려 반대하는 조선정부 관료가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을 필두로 한 개화추진세력들은 대외관계에 대한 인식을 만국공법적인 관계로 전환하면서 대외통상에 의한 부국강병책을 이로부터 가시화시키고 있었다.

수신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김홍집이 복명할 때 고종과 나눈 대화를 보면, 고종은 일본과의 현안문제인 관세협정문제를 비롯해서 외국어교육과 군사훈련, 무기, 통상 등 부국강병책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정세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청이 연대하여 러시아에 대처하자는 제의를 하고 있었지만 고종은 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679)≪承政院日記≫, 고종 17년 8월 28일.
≪修信使記錄≫全, 修信使日記 권2, 入侍筵說.
한편 고종은 조선과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맺기 이전에 이미 대청인식에서 뚜렷한 변화를 보이는데, 즉 기존의 主-臣관계이던 대청관계를 동등관계로 바꾸어 보려는 의식적 변모가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안외순,<大院君執政期 高宗의 對外認識-遣淸 回還使 召見을 중심으로->(≪東洋古典硏究≫3, 1994) 참조.
고종에게는 청에 의지하기보다는 자체의 힘을 키워 부국강병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고, 그런 만큼 무비에 대한 관심이 컸다. 김홍집의 경우 당시 현안 문제 중의 하나였던 통상에 더 역점을 두고 대외문제를 풀어 보려고 했다.680)≪高宗實錄≫, 고종 17년 8월 28일. 결국 고종을 비롯한 개화추진세력이 추구한 정책은 내적으로는 무비자강책이며, 외적으로는 대외통상정책이었던 것이다.

조선정부가≪조선책략≫의 전래를 계기로 하여 청에 자문한 ‘청시절략’의 내용은 만국공법체제 내에서 무비자강책과 대외통상정책이라는 기존의 현안문제와 앞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時務’에 관계된 것이었다. 특히 통상문제는 일본과의 문호개방 이후 조선정부가 국내외적으로 당면했던 사항이었기 때문에 청과의 통상제의, 각국수호입약통상장정 세칙액조관과 세관설관범례에 대한 청구, 대일관세협의문제 등의 내용이 있었다.

조선정부는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관세에 대한 인식이 없어 일본과 무관세무역을 하고 있었다. 대일무관세무역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있을 때 李鴻章은 1879년 7월 領府事 李裕元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대외통상을 권유하면서 “만약 관세를 정하면 나라의 경비에 적으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으며 상업에 익숙하면 무기구입도 어렵지 않게 될 것”681)≪高宗實錄≫, 고종 16년 7월 9일.
宋近洙,≪龍湖閒錄≫23, 기묘 7월 9일.
≪淸季中日韓關係史料≫2, #309, 光緖 5년 7월 13일, 368b쪽.
이라고 관세에 대해 언급했다.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던 조선정부에게 국고에 보탬이 된다는 관세에 관한 이홍장의 의견은 조선정부가 이후 관세문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동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 뒤 軍械學造事를 자청하러 청에 파견된 齎咨官 卞元圭를 통하여 다시 이홍장은 관세문제에 대해 의견을 들려주었다. 당시 조선정부가 일본과의 무관세무역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을 안 이홍장은 자신이 의도하는 대외통상에로 조선을 유도하고자 하여 출입구세의 의정 등 자세하게 관세문제를 변원규에게 설명했다.682)≪淸季中日韓關係史料≫2, #341-(2), 光緖 6년 9월 28일, 432쪽. 이런 과정을 통해 통상국간의 관세 성격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인지한 조선정부는 1880년 5월 제2차 수신사의 파견에서 일본과의 무관세무역을 시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권사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관세협의를 하지 못하고 수신사 김홍집은 돌아왔다. 김홍집은 일본에 있는 동안 일본주재 청국공사 하여장과의 필담을 통해서 관세에 관한 많은 정보와 지식을 얻게 되었고, 일본의 관세 운용도 견문할 수 있었다.683)≪修信使記錄≫全, 修信使日記 권2, 大淸欽使筆談, 178쪽.

1880년 8월 28일 수신사 김홍집은 일본에서 견문한 것들을 복명하면서 관세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의 국고수입 가운데 地租와 關稅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재정관세에 역점을 두어 보고를 했다.684)≪修信使記錄≫全, 修信使日記 권2, 復命書, 154쪽. 또한 당시 조선정부는 일본과 인천개항 문제를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었으므로 김홍집은 일본의 使臣駐京 문제에 대해서도 관찰했다. 김홍집은 이에 대해 “일본은 공사를 각국에 파견하여 상주시키고 있는데 朝官은 公事가 아니라도 往遊하여 그 동정을 살피므로 천하형세를 이웃의 일처럼 이야기한다”685)≪修信使記錄≫全, 修信使日記 권2, 復命書, 151쪽.고 고종에게 진언했다. 김홍집의 일본의 사신파견에 대한 상황보고는 일본과의 사신주경 문제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이었다. 이것은 후술하듯이 조선정부가 청에 派使駐京을 제의하게 되는 데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정부는 1881년 1월 청에 보낸 ‘청시절략’에서 청과 통상할 것을 제의했다.686)≪淸季中日韓關係史料≫2, #353-(6), 光緖 7년 2월 3일, 475쪽. 조선정부는 일본과의 무관세무역으로 대일무역이 확대일로에 이르자 이에 따른 대비책으로 일본 이외의 국가와도 교역을 하고자 했다. 그 결과 청과의 만국공법적인 무역개시라는 정책적인 조정으로서 청에 통상제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청측 또한 조선에서의 일본세력의 독주를 막고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조선측에 통상을 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은 조선에 대한 교역확대의 내부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가 대청통상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내세워 청나라 상인이 조선에 가서 무역하기를 바란다면 조선국왕이 청한 후에 처리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687)≪淸季中日韓關係史料≫2, #353-(6), 光緖 7년 2월 3일, 475쪽.
金允植,≪陰晴史≫, 고종 19년 1월 18일.
청은 조선과의 관계에서 조선이 먼저 자청하는 식으로 해서 현안문제를 풀려고 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사대관계를 확인시키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청에 통상을 자청하라는 요구를 듣고 난 후 조선정부는 통상문제에 대해 다각도로 정보를 수집하고 의견을 수렴했다. 특히 일본의 물정을 詳探하기 위해 1881년 1월 파견된 ‘조사시찰단’ 중의 한 사람이었던 어윤중은 같은 시찰단원인 홍영식과 함께 일본주재 청국공사인 하여장과 만나 외국과의 수교에 관하여 많은 논의를 했다.688)≪淸季中日韓關係史料≫2, #365, 光緖 7년 7월 3일, 509쪽 및 #370, 光緖 7년 9월 6일, 518a쪽. 어윤중은 일본을 거쳐 바로 청으로 갔다. 그는 영선사 김윤식과 工學徒를 만나보고 청의 개화정책을 견문했으며, 津海關道 周馥·直隷總督 李鴻章 등과 회담하면서 이미 1881년 1월 ‘청시절략’을 통해 자청한 청과의 통상문제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의논했다.689) 魚允中,≪從政年表≫, 고종 18년 10월 2·6·10일.
金允植,≪陰晴史≫, 고종 18년 11월 28·30일, 12월 26일.
≪淸季中日韓關係史料≫2, #377, 光緖 7년 11월 9일, 525b쪽.
그는 돌아오는 길에 주일청공사로 임명된 黎庶昌과 상해에서 만났을 때 여서창이 부강을 하려면 參用西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자 어윤중도 만국과 통상한 이후에 부강을 논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헛된 말일 뿐이라고 했다. 나아가 당시인이 무비로써 외국을 제압할 수 있음은 알아도 商務로써 외국을 제압할 수 있음은 알지 못한다고 파악했다.690)≪淸季中日韓關係史料≫2, #387-(1), 光緖 7년 12월 8일, 544b∼545a쪽. 따라서 이 시기에 이르면 통상을 통한 부국강병책이 어윤중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윤중의 귀국복명은 1881년 12월 14일에 있었다. 그가 보고한 내용을 종합하면, ① 지금의 국제정세를 돌아볼 때 부강하지 않고서는 나라를 보존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의 상하가 한 뜻으로 경영하는 것은 부강이며, ② 청은 처음 軍務에만 힘을 썼으나 근래에는 招商局을 설치하고 輪船을 이용하는 등 상업을 권장하며 외국과 통상하므로 우리 또한 商務로써 이에 응할 수 있다. ③ 일본은 서양과 통상을 시작한 이후 우리를 隣國으로 보고 있으며, 우리가 부강한 길로 나아가면 일본이 감히 ‘他意’를 갖지 못할 것이라는 것 등이었다.691) 魚允中,≪從政年表≫, 고종 18년 12월 14일. 이렇게 축적된 통상문제에 대한 식견을 바탕으로, 어윤중은 1882년 2월 問議官에 임명되어 청과 통상문제를 담판하게 되었다.

어윤중이 문의관으로서 청으로 가기 전 고종은 어윤중에게 청과의 새로운 통상관계를 맺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면서 조선과 청이 통상해야 하는 이유로 사신문제와 북도의 공동무역 문제를 들었다.692)≪承政院日記≫·≪從政年表≫, 고종 19년 2월 17일. 이것은 對日·對歐美 통상에 대한 견제책으로서의 청과의 통상요구라는 목적과 함께 조선측의 경비부담이었던 조공사절·칙사의 왕래 및 변경개시에 대해서도 통상문제를 협의할 때 개선해 보고자 한 것이었다.693) 秋月望,<朝中間の三貿易章程の締結經緯>(≪朝鮮學報≫115, 1991), 105쪽. 특히 사신문제는 경비부담에 의한 개선 제의에서 나아가 청과의 관계를 이전의 조공체제에서 근대 국제공법체제하의 독립국 대 독립국의 관계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더구나 고종은 일본과 기회균등을 주기 위해 청에도 항구를 개방해야 한다고 어윤중에게 말해 조선과 청을 대등하게 보고자 하는 인식을 드러냈다.694) 具仙姬, 앞의 책, 61쪽.

그러나 고종의 이러한 청에 대한 인식은 조선정부관료들에게서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의정부 전임대신들(領府事 洪淳穆, 判府事 韓啓源, 領敦寧 李最應, 判府事 金炳國과 前領議政 徐堂輔)은 연명으로 箚子를 올려 고종의 어윤중에게 내린 지시가 청에 대한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695)≪承政院日記≫·≪從政年表≫, 고종 19년 3월 8·9일. 당시 고종과 의정부대신과의 정책수립 과정에서 보인 대립은, 만국공법적 세계체제를 인식하면서 청과의 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전환시키고자 한 고종과 전통적 관계를 고집하는 정치세력과의 갈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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