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Ⅴ. 갑신정변
  • 1. 갑신정변의 배경
  • 1) 구미열강과의 외교

1) 구미열강과의 외교

開化黨 인사들은 당시의 다른 지식인들보다 외국사정에 밝았으며 국제사정에 민감하였다. 그리고 복잡한 국제정세하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외국과 적절한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19세기 후반기 국제관계에서 널리 통행되고 있던 均勢 즉 세력균형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균세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번역된 국제법 서적인≪萬國公法≫을 통해 일찍부터 이에 대해 지식을 얻고 있었다.713)李光麟,<開化黨의 形成>(≪省谷論叢≫3, 1972;≪開化黨硏究≫, 一潮閣, 1973), 46쪽. 즉 개화지식인들은 공법 중에서도 “이른바 均勢之法이란 강국들간에 세력균형을 이루어 서로 침범하지 않게 되면 弱國은 이에 의뢰하여 安寧을 얻는다”는 데에 주목하고 이 균세법이야말로 약소국 조선이 당시 위협을 가해오고 있는 주위의 열강들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714)만국공법의 수용에 대해서는 李光麟,<韓國에 있어서의 「萬國公法」의 受容과 그 影響>(≪東亞硏究≫1, 西江大, 1982;≪韓國開化史의 諸問題≫, 一潮閣, 1986) 참조.

개화당 요인 중 외교담당 기관인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는 閔泳翊·金玉均·洪英植은 협판으로 尹致昊는 주사로 근무하였다. 邊燧도 주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즉 그들은 외교문제에 대해 국왕에게 상주할 수도 있고 외국시찰 등을 통해 각국 외교사절과 폭넓게 접촉할 수도 있는 자리를 점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추구하는 바에 따라 외교활동을 펼치는 데 유리하였다.

개화지식인들은 壬午軍亂 뒤 조선의 정치에 대한 청국의 간섭이 노골화되면서 조선의 독립에 위협을 가해오자 외국 특히 구미세력을 끌어들여야 된다고 믿고 있었다. 개화당 요인들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과의 국교수교를 갈망하고 있었다.≪朝鮮策略≫이 들어온 이후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서 미국은 영토에 야심이 없는 공평무사한 나라이므로 맘놓고 신뢰할 수 있는 나라라는 대단히 호의적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이런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은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인 1882년(고종 19) 5월 22일 李鴻章의 주선으로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열강을 한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러일 양국의 한국침투를 막는다는 이홍장의 以夷制夷정책의 산물이었다.

朝美修好通商條約은 1883년 1월 미국의 상원에서 통과되었다. 이 소식을 일본에서 유학중에 있던 윤치호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로부터 듣고 당시 동경에 체류중인 김옥균에게 달려가 전하였더니 김옥균은 뛸듯이 기뻐하였으며 때마침 그 곳에 온 徐光範과 함께 바로 주일미국공사를 방문하여 사의를 표할715) 尹致昊,<壬午日記>(≪開闢≫속간 1호, 1934), 1883년 1월 13일. 정도로 개화당 인사들은 미국과의 국교수립을 크게 환영하였다.

이홍장은 자신의 주선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성립된 지 2주 뒤인 1882년 6월 6일 역시 이이제이정책의 하나로 조영·조독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성사시켰다.716)한영수교에 대해서는 崔文衡,<韓英修交외 그 歷史的 意義>(≪韓英修交100年史≫, 韓國史硏究協議會, 1984) 참조. 그러나 이 조약에 규정되어 있는 관세율이 너무 높다는 아시아주재 영국상인들의 불평으로 영국정부는 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일정부에도 종용하여 비준을 거부케 하면서 조약을 개정할 수 있는 기회만 노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한편 임오군란 뒤 일본에 파견된 박영효·김옥균 등 개화파 일행은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에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였다. 이들은 1883년 10월 13일 동경에 도착한 이후 일본 외무성의 주선으로 주일영국공사 파아크스(Harry S. Parkes)와 가진 면담에서 그에게 청국의 간섭정책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청국의 파병은 분명히 국제법에 위배되는 처사라고 비난하고 청국의 무력개입정책으로 급증한 청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정치적 현실을 개탄하였다. 아울러 만약 영국이 조약수정의 제의를 중국을 통하지 않고 조선정부에 직접 해온다면 영국측이 요구하는 조건을 수락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즉 당시 개화파들은 구미세력을 끌어들여 청의 속박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에만 사로잡혀 조약의 내용이 한국에 유리한지 어떤지를 따지기에 앞서 구미제국과의 조약체결이라는 그 자체에 더 의미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파아크스공사는 이 때가 바로 자국에 유리하게 조약의 개정을 추진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라는 것을 포착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파아크스는 1883년 3월 고베(神戶)주재 영국영사 애스턴(William G. Aston)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약개정에 대해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종래의 관세율에서 거의 절반으로 인하된 내용으로 11월 26일 조영·조독수호통상조약을 다시 조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4년 4월부터 서울에 총영사관을 설치하고 애스턴을 총영사로 상주시켰으며 독일은 6월부터 영사가 주재하였다.

개화당 인사들은 미국·영국·독일뿐만 아니라 조선과 수교를 원하는 모든 나라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공포 또는 증오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던 러시아·프랑스까지도 수교를 맺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고종 또한 이러한 개화당의 생각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1883년 10월 16일에 고종은 주한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에게 다음과 같은 요청을 하였다.

英·獨 양국은 이제 새로운 조약을 체결코자 全權委員을 조선에 파견하려고 하고 있다. 이에 관하여 귀하의 가장 좋은 조언을 구하고 싶다. 나는 이 양국과의 조약이 우리 정부를 강력하게 해줄 것을 믿고 있는데 만약에 그것이 확실하다면 러시아와 프랑스에게도 우리와 조약을 교섭하도록 미국정부가 권고해 주기 바란다(George M. McCune and John A. Harrison ed., Korean-American Relations. Vol. 1,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51, pp. 53∼54, No. 32.).

러시아는 이미 조미조약체결 소식을 듣고 곧 이홍장에게 알선을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한 바 있었다. 청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과의 수교를 알선해 달라는 러시아의 요청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또 러시아는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다가 黃遵憲의≪조선책략≫이 전해진 이래 조선에서는 영토에 야심이 있는 나라로 인식되어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러시아측에서는 달라진 조선 국내의 분위기를 간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교교섭에 나섰다. 1884년 6월 24일 러시아의 대표 베베르(K. I. Waeber)가 조약체결차 내한하자 김옥균은 인천에까지 가서 그를 맞이하였다. 러시아는 개화당 인사뿐만 아니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협판 묄렌도르프(P. G. Mölendorff)와도 교섭을 벌였다. 그리하여 1884년 7월 7일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조약은 청의 세력강화를 위해 청에 의해서 파견된 묄렌도르프의 알선에 의해 이루어졌다. 묄렌도르프는 청일양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제3세력으로 러시아세력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고 느껴 러시아세력을 유치하려고 한 것이었다. 개화당 인사들은 이 러시아와의 조약체결을 환영하였다. 그들은 러시아와의 외교관계 수립도 청국의 압박에서 벗어나 조선의 독립을 보전하는 데에 보템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러시아와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된 것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거의 1년이 지난 1885년 10월이었다. 이 때 웨베르가 총영사 자격으로 내한하여 비준서의 교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717) 李光麟,≪韓國史講座≫Ⅴ, 近代篇(一潮閣, 1981), 118∼119쪽.

프랑스는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잠입한 이래 1866년의 丙寅洋擾에 이르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천주교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에서는 증오의 대상으로 되어 있던 나라였다. 따라서 쉽게 수교를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임오군란 뒤에는 사정이 바뀌어 개화당 요인들을 중심으로 프랑스와도 외교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1883년 말 이래 안남문제로 청불간의 관계가 험악하여 중국은 역경에 처해 있었는데 개화당 요인들은 이러한 시기를 이용하여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718) 李光麟, 앞의 책(1973), 47∼49쪽. 예컨대 윤치호가 劉大致의 교시에 따라서 고종한테 “안남문제로 프랑스와 안남 사이에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이며, 또한 프랑스는 청국이 망령되이 조선을 억누르려고 하는 것도 미워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와 조약을 맺어 청국의 기를 누르고자 크게 바라고 있다. 그런데 조선이 만약에 청국의 위협과 강압을 두려워하여 조약체결을 주저한다면 조선의 국체를 손상시키게 된다”고 상주하는 등719) 尹致昊,≪尹致昊日記≫1, 1884년 (양력)1월 18일(國史編纂委員會, 1973). 개화당 인사들은 조불조약체결의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남문제로 인한 청불간의 험악한 관계, 천주교 포교문제 등으로 프랑스와의 조약은 1886년에 가서야 조인되었다.

이리하여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직전 서울에는 외국공관으로 일본·청국·미국의 공사관 그리고 영국·독일의 총영사관이 있었다. 개화당 요인들은 청국에 대해서 적대시하고 있었던 터이므로 청국공사관과의 접촉은 끊고 있었다.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는 1883년 1월 부임한 이래 시종 개화당에 대해 냉랭한 태도를 보이다가 1884년 10월 말 휴가에서 귀임한 이후에 갑자기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그 동안은 개화당이 일본공사관에 접근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은 주로 미국 및 영국공사관과의 유대를 강화해 나가고 있었다.

개화당 요인들은 미국공사관을 빈번히 출입하면서 푸트공사와 포크(George C. Foulk)무관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미국은 영국과 독일보다 1년이나 앞선 1883년 5월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1883년 5월 초대 주한특명전권공사 푸트가 부임하여 조선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간주한다는 본국정부의 외교정책을 밝혔다. 그리하여 고종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신뢰할 수 있는 미국과의 국교수립이야말로 적어도 정치적으로 청국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로 생각하여 진심으로 그의 부임을 환영하였다.

개화당 요인들은 미국의 힘을 빌려 청국의 세력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빈번히 미국공사관을 출입하면서 푸트공사와 포크무관과 접촉하였다. 푸트공사는 부임한 이래 비교적 개화당 요인들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포크무관은 보빙사가 미국과 유럽을 순방할 때에 안내역을 담당하여 일행과 여행을 함께 하고 한국에 와서 공사관의 무관이 된 사람으로서 한국어에도 능하였다. 그러므로 개화당 요인 가운데 보빙사의 수행원이었던 서광범·변수 등과는 8개월간 같이 여행을 하는 동안에 상당히 친밀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720) Ensign George C. Foulk, Report of information relative to the revolutionary attempt in Seoul, Corea, December 4∼7, 1884, Papers of American Foreign Relations, Inclosure in No. 128(朴日根 편,≪近代韓國關係英·美外交資料集≫ 1866∼1886, 新文堂, 1984, 995쪽). 그는 숙소를 공사관내에 두지 않고 수표교 부근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화당 인사들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또 당시 미국공사관에는 통역으로 개화당에 속해 있던 윤치호가 있었다. 따라서 개화당 요인들은 수시로 푸트공사나 포크무관을 찾아가서 협의하거나 도움을 청하였다.

아시아에 진출이 영국 등 유럽제국보다 늦었던 미국은 아시아 여러 나라의 독립유지가 자기 나라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약비준 당시인 임오군란 직후만 해도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면서 조선에 대하여 뚜렷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정부는 조약의 비준과정에서 주일본영국공사 파아크스의 끈질긴 방해공작을 물리쳤으며, 미국공사의 격을 동경이나 북경주재와 동격인 특명전권공사로 높여 파격적인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은 조선에 대해 점차 흥미를 잃어 가고 있었다. 예컨대 1883년 10월 고종이 군사교관 파견을 요청하고 몇 차례 독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청한 지 만 1년이 경과한 뒤에야 겨우 미국무장관이 이 문제에 대하여 미국방장관에게 조회를 의뢰하였다는 내용의 공식적 회답을 미국정부로부터 받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또 1884년 7월 재가된 외교 및 영사법에 의해 미국무장관은 주한공사의 지위를 전권특명공사에서 총영사급인 辨理公使로 강등시켰던 것이다.721)崔文衡,<한미수교와 友誼 변화>(≪제국주의시대의 列强과 韓國≫, 民音社, 1990), 44∼48·58∼63쪽.

당시 미국정부가 이처럼 조선에 대한 관심이 퇴색되어 있었으므로 조선 주재원들이 개화당을 지지하고 호의를 가지고 있었어도 본국정부의 태도에 따라 그들의 활동에도 상당한 제약이 뒤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푸트공사나 포크무관은 개화당에 확실한 지지세력이 되어 도움을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선 집권파와 개화당 양파간의 화해를 종용해 보았다. 그러나 이 두 파 사이의 대립이 극도에 달하여 도저히 화합시킬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곧 유혈사태가 빚어질 것을 예감하였을 뿐이었다.722) George C. Foulk, 앞의 글.

이러한 상황에서 푸트공사 등은 개화당의 계획을 최대한 늦추어 보고자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는 김옥균에게 잠시 한성을 떠나 上海·長崎 등지를 유람하고 돌아올 것을 간곡히 권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함께 여행을 떠나자는 제안을 해오기까지 하였다.

내가 평양 등지로 유람하고자 한 지가 오래였으나 미처 여가가 없었다. 지금은 비록 추운 계절이기는 하나 내가 공을 위해 춥고 더운 것을 불구하고 잠시 가서 둘러볼까 합니다. 長崎에 있는 우리 군함을 이미 일본우편선 편에 급히 인천에 來泊하도록 하였으니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나와 함께 잠시 평양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金玉均,<甲申日錄>,≪金玉均全集≫, 亞細亞文化社, 1979), 11월 24일).

이처럼 개화당은 미국공사나 무관 등 주재원들로부터 개인적인 지지와 호의를 얻어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정변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이들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얻어내는 데는 실패하였다. 개화당 요인들은 정변 직전까지 미국공사 등을 방문하여 극비에 속하는 정변의 계획까지 털어놓으면서 도움을 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공사나 무관은 예컨대 “동지를 모으면서 조용히 시기를 관망하고 과격한 행동을 삼가야 될 것이며 만약에 그러한 행동을 한다면 도리어 개화운동에 해가 될 것”723)≪尹致昊日記≫1, 1884년 11월 29일.이라 충고하여 개화파의 정변계획을 뒤로 미루어 보고자 하였을 뿐이었다.

개화당 요인들은 애스턴 영국총영사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한국어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까지 하였기 때문에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주한공사의 격을 총영사급으로 하여 주청공사에 예속시킴으로써 청의 對韓宗主權을 외교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애스턴 역시 개화당을 위하여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김옥균이 “조선 내정이 날로 위급해지니 내가 청국과 프랑스가 싸우는 틈을 타서 한 번 내정개혁을 도모하고자 하는데 어떨는지 모르겠다”고 애스턴의 의견을 묻자 조금 더 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724) 金玉均,<甲申日錄>, 11월 24일(≪金玉均全集≫, 亞細亞文化社版, 1979).고 하여 애스턴 역시 미국공사관측과 마찬가지로 개화당에게 계획을 뒤로 미루어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이 개화파들은 구미열강을 끌어들여 국내에서 구미열강이 세력균형을 이룬 가운데에서 조선은 청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어, 구미열강과의 국교수립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개화당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개화당 요인들은 집권파를 제거하고 자신들의 이상에 따라 내정개혁을 하기 위해 정변을 계획하고 미국·영국 등 구미열강의 세력을 이용하여 보고자 끝까지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개화당은 자신들을 불신하여 냉랭하게 대하면서 방해를 일삼던 태도를 청불전쟁 이후 갑자기 바꾸고 적극적으로 접근한 다케조에공사 등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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