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직후 ‘國無一月之儲’725)≪淸季中日韓關係史料≫3, 光緖 10년 9월 8일(臺北;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1972), 910쪽.라는 金弘集의 탄식에서 보듯이 1880년대 조선의 재정은 만성적인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국가의 재정지출은 날로 늘어났으나 수입을 증대시킬 만한 재원이 별로 없어 정부에서는 그 미봉책으로 화폐를 찍어 내는 것을 일삼고 있었다.726) 당오전 주조에 관해 元裕漢,<當五錢攷>(≪歷史學報≫35·36, 1967) 참조. 개화당 요인들은 이러한 국가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외국에서 차관을 얻어 보려고 하였다.727) 김옥균의 대일차관교섭에 대해서는 다음 글들이 참조된다.
李光麟, 앞의 책(1973), 57∼65쪽.
趙璣濬,≪韓國資本主義成立史論≫(고려대 출판부, 1973), 142쪽 물론 여기에는 그들의 활동에 필요한 자금의 확보와도 관련이 있었다. 개화당 요인들이 차관의 도입을 주장하자 고종도 이에 동조하였다.
개화당 인사들은 일본에서 쉽게 차관을 얻어 올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임오군란 직전 1882년(고종 19) 3월 김옥균이 첫 번째 일본시찰 때부터 차관교섭이 있었으나728)≪朝鮮新報≫, 1882년 3월 25일. 일본차관이 처음 도입되는 것은 임오군란 직후 김옥균이 두 번째 파견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임오군란 뒤 1882년 10월 박영효를 정사로 하는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김옥균도 수행하여 이 때 일본정부의 주선으로 일본의 국책외환은행인 橫濱正金銀行으로부터 17만 원의 차관을 들여올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차관의 조건이었다. 17만 원에 대한 이자는 년 8分이고, 그 상환조건은 2년 거치 후 10년 동안에 매년 원금 1만 7천 원씩 상환키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원금과 이자의 상환이 약정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지연되는 경우에는 부산해관의 수입금과 함경도 端川金鑛에서 공동으로 채굴하여 거두어들인 금으로 상환케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정금은행에서 직원을 파견하여 조선관리와 공동의 관리하에 이루어진다는 조건도 붙여 놓았다.729) 日本外務省,≪日本外交文書≫15, No. 157, 明治 15년 12월 18일, 287쪽. 이것은 조선해관의 자주권과 금광채굴권을 침탈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놓은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자만 보더라도 갑신정변 뒤 청국정부와 체결한 전신공채차관이 무이자였고 淸商 同順泰로부터의 차관이 단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월 6리였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김옥균 등은 그 조건이 불리함을 알고 있었으나 사절 일행의 여비도 궁색한 형편인데다가 앞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벌이려면 자금이 필요하였으므로 여유를 갖고 교섭을 벌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한편 일본측에서는 이러한 김옥균 등의 사정을 이용하여 불리한 조건을 내세웠을 것이다. 더욱이 차관 17만 원 중 제물포조약에서 약정한 배상금의 제1회 분할금조로 5만 원을 공제하였으므로 넘겨받은 실제 금액은 12만 원이었다. 그리하여 17만원차관은 수신사절의 경비,≪漢城旬報≫의 간행비, 당시 50여 명에 달했던 일본유학생의 교육비 등에 충당되었다.730)≪漢城旬報≫, 개국 492년 11월 21일,<駐日生徒>.
李光麟,<開化初期 韓國人의 日本留學>(≪韓國開化史의 諸問題≫, 一潮閣, 1986), 54쪽 참조. 따라서 이 차관은 개화정책 수행을 위한 기초적인 사업에 사용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수신사 박영효 등은 3개월간 동경에 체류한 뒤 귀국하였다. 그러나 김옥균과 서광범은 계속 남아 일본정부 요인들과 접촉하면서 또 다른 차관의 도입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결과 조선정부의 국채위임장만 있으면 차관을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믿고 다음해 3월에 일단 귀국하였다.
당시의 국내재정은 여전히 궁핍을 면치 못하고 있었으므로 집권층인 민씨측에서는 協辦交涉通商事務 묄렌도르프의 조언에 따라 當五錢 발행을 서두르고 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김옥균은 당오전과 같은 惡貨의 주조는 국가의 재정난을 타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물가고로 국민생활에 큰 해독을 주게 된다고 반대하면서 차관도입이 유리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개화당 요인들이 내세우는 차관도입 또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에 또 17만원차관의 경우처럼 불리한 조건으로 차관이 도입된다면 도리어 외세를 끌어들이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왕은 양측의 의견을 모두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민씨측의 요구대로 3월 16일 당오전의 주조령을 내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김옥균에게 300만 원 국채모집의 위임장을 부여하여 일본에 다시 파견하였다.
김옥균이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1883년 6월 이었다. 그로서는 세 번째의 일본방문이었다. 그의 사명인 300만 원의 국채모집은 꼭 성공해야만 하였다. 그만한 돈을 끌어들인다면 개화당 요인들은 국왕으로부터 확고한 신임을 얻어 정부내에서 당당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동시에 그들이 계획해 온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자금도 마련되기 때문이었다.
김옥균은 일본에 가기 전인 1883년 4월 18일 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로 임명되었다.731) 김옥균이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로 활동한 데에 대해서는 李光麟,<金玉均의「東南諸島開拓使 兼 管捕鯨事」任命에 대하여>(위의 책) 참조. 당시 울릉도·제주도 지역에는 일인들이 난입하여 벌목과 漁採를 일삼고 있어서 일본측에 여러 차례 항의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17세기 말 이래 網取法과 擲鉾法 등의 기술로 고래잡이가 성하였는데 개항 이후에는 고래가 많이 출몰하는 조선해안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실정을 파악한 김옥균은 외국인의 투자로 그것을 개발해 볼 생각도 했지만, 그것을 담보로 하면 거액의 외채도 모집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일본측이 차관을 제공할 때 필시 담보를 요구할 것으로 내다보았고 이 때를 대비해서 담보로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이나 포경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국왕에게 이 실정을 상주하였고 한편 국왕은 김옥균에게 차관을 교섭할 수 있는 실권을 보강해 주기 위해서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라는 벼슬을 내렸던 것이다.
김옥균은 白春培와 卓挺埴을 수원으로 李允杲를 從人으로 그리고 일인 가이군지(甲斐軍治)를 고용하여 일본에 건너갔다. 그러나 곧 일본에서 30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한다는 것이 용이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김옥균의 주장처럼 그 동안에 일본정부의 태도가 전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임오군란 이후 부임한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부임 초 김옥균의 정치적 역량을 의심하고 조선정계에서 개화당의 지위가 무력하다고 보아 이들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고 개화파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노우에(井上馨) 외무경에게 보고함으로써 차관교섭을 방해하여 결국 차관도입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원인으로서는 당시의 일본정부나 민간재계에서 300만 원이란 거액을 투자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 액수는 당시 일본의 1년간 조세수입의 22분의 1에 해당되었고, 또 일본정부는 자기 나라의 공업화를 위하여 인플레이션정책을 감행하고 있었으며, 한편 민간의 기업체들은 정부의 절대적인 후원 아래에서 운영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정부나 민간에게는 그만한 거액을 투자할 수 있을 만한 여력이 없는 실정이었다.
김옥균은 일본으로부터의 300만 원 차관도입을 기대할 수 없겠다고 판단되자 모오스(James R. Morse)를 통해 미국으로부터의 차관도입을 모색하였다. 모오스가 사장으로 있는 미국무역상사(American Trading Company)는 한때 동양에서 미국인이 경영하는 회사 중 가장 규모가 컸었다. 또한 모오스는 한국으로의 진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김옥균과도 여러 차례 접촉을 가진 바 있었다.
모오스는 김옥균의 제의를 받아들여 차관교섭을 위해 직접 뉴욕으로 갔다. 김옥균은 푸트공사와 주일미국공사 빙햄(John A. Bingham)의 측면 지원도 얻어내어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김옥균은 직접 미국으로 가서 교섭을 벌여 볼 생각까지도 하였으나 푸트공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미국행을 단념하였다. 그 뒤 일본 第一銀行의 시부자와 에이치(澁澤榮一)와 교섭하여 10만 원이나 20만 원 정도의 금액이라도 대부를 받아 보려고 하였으나 이것마저도 역시 실패하였다.
김옥균이 세 번째 도일하여 10개월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차관을 얻어 보려던 노력은 전부 수포로 돌아가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이 되었다. 이 때 그는 귀국하기에 앞서 자신의 심정을 후쿠자와 유키치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자금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지금 빈손으로 귀국하면 집권 사대당은 나를 비판하며 궁지에 몰아넣을 것임을 알고 있다. 어쨌든 우리 개화당은 심한 타격을 받을 것이며 우리의 개혁안도 없어질 것이며 조선은 청국의 영구적 속국이 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우리 당과 사대당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최후의 선택을 택할 지도 모르겠다(石河幹明,≪福澤諭吉傳≫3, 岩波書店, 1943, 302쪽).
김옥균은 1883년 6월에 서울을 떠나 만 10개월간 동경에 머무르고, 다음해 1884년 5월 2일 제물포에 도착하여 다음날 입경하였다. 예기했던 차관도입이 실패함으로써 정치자금을 확보하지 못하여 개화당의 개화정책 추진과 그들의 정치적 활동에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뿐만 아니라 집권파와의 대립 속에서 개화파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위기의식은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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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