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Ⅴ. 갑신정변
  • 2. 갑신정변의 주도세력
  • 1) 정변의 핵심세력

1) 정변의 핵심세력

갑신정변에 참여한 사람 중에서 정변을 계획하고 주도해 나간 핵심인물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는가. 정변에 연루되어 체포당한 李允相의 국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9월부터 玉均·英植·泳孝·光範·載弼이 가끔 모임을 가졌으며 때로는 劉鴻基의 집에서 모였다…광범이 미국에서 돌아온 후 竹洞令監과 사이가 나빠 항상 의심을 품고 있었으며 옥균·영효·영식과 더불어 매번 의논하여 함께 개화를 하고자 하였으며 먼저 죽동부자를 제거한 연후에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고 또 늘 옥균가에 가서 劉大痴(致)·朴怡順·邊樹와 항상 일을 의논하였다(<李允相鞫案>742)≪推案及鞫案≫324책, 大逆不道罪人喜貞等鞫案(亞細亞文化社版 30책, 1978), 이 국안에는 이희정 이외에 1884년 12월에 체포된 金鳳均·申重模·李昌奎·李允相·徐載昌·李點乭·車弘植·崔英植·南興喆·高興宗 등 11인의 국안이 개인별로 들어 있다. 따라서 개인별 국안을<李允相鞫案>등의 형식으로 표기하겠다.).

9월경부터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 등이 유대치·박제경·변수 등과 함께 개화를 하자는 의논을 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우선 민태호·민영익 부자 등을 제거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개화당 요인들은 1884년 4월 말 민영익이 보빙사로 미국을 시찰하고 유럽을 거쳐 귀국한 뒤 개화당 요인들과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여 완전히 개화당에서 이탈하여 집권파로 넘어간 9월경부터 본격적으로 정변계획을 세웠던 것이다.<甲申日錄>에도 이들이 자주 회동한 기록이 보이고 있으므로 이들이 정변을 주도해 갔던 핵심인물이었던 것이다. 이 핵심인물 가운데 양반출신들을 먼저 살펴보겠다.

金玉均(1851∼1894)은 金炳台의 아들로 태어나서 襄陽府使 金炳基의 양자가 되었으며 1872년(고종 9)에 21세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司憲府의 持平, 弘文館의 校理 등을 거쳐 統理機務衙門의 參議交涉通商事務, 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를 거쳐서 吏曹參議에 올랐었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1882년 3월과 10월, 1883년 6월 등 모두 3차에 걸쳐서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주요 목적은 차관교섭이었다.743) 앞의 장 참조.

김옥균은 박영효로부터 “金玉均의 長處는 交遊요. 교유가 참 능하고, 글 잘하고, 말 잘하고, 詩文書畵 다 잘하오”744)李光洙,<朴泳孝氏를 만난 이야기>(≪東光≫, 1931;≪李光洙全集≫17, 三中堂, 1962).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능력이 탁월하고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또 다음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유대치가 국가개혁 등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출중한 인물임을 간파하고 특별히 지도하였던 젊은이들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동지를 규합하고 거사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즉 갑신정변의 전과정을 전면에 나서서 이끌어간 사람은 김옥균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劉大致는…北村방면에 교제를 넓혀 노소를 불문하고 인물을 물색하고 동지를 모으고 있었다. 때마침 청년 金玉均과 만나 세상사를 이야기하는 중에 이 청년의 비범함을 알고 사상·인격·학재가 뛰어나게 출중하여 장래 반드시 대사를 계획함에 족한 인물임을 통찰하고…세계 각국의 지리·역사 번역본과 기타 신간서적을 모두 김옥균에게 주어 읽도록 하였다. 또한 열심히 천하의 대세를 설명하고 조선개조의 긴박성을 역설하였다(古筠記念會 編,≪金玉均傳≫, 東京, 1944, 49쪽).

洪英植(1855∼1884)은 영의정 洪淳穆의 아들이었다. 1873년 19세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명문가의 출신이었으므로 출세가 빨랐다. 1881년에는 紳士遊覽團의 朝士로 일본을 시찰하였고, 1883년 7월부터 12월까지 報聘使의 부사로 40여 일 동안 미국을 공식 방문하고 돌아왔다. 이 뒤부터 개화당 요인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이 해에 兵曹參判으로 郵征局 總辦이 되어 정변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청국 군대가 궁궐로 들어왔을 때에도 끝까지 고종을 호종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朴泳孝(1861∼1939)는 朴元陽의 아들로 1871년 11세로 永惠翁主와 결혼하여 철종의 부마가 됨으로써 錦陵尉에 올랐다. 判義禁府事를 거쳐 1882년 修信使로 서광범과 함께 일본에 다녀와서 漢城府 判尹이 되었다. 1883년 4월 廣州府 留守가 되어 개화당의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南漢敎鍊兵隊를 조직하여 병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집권파 민씨의 방해 등으로 인하여 10월에 남한교련병대는 親軍前營으로 이속되고 말아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러나 뒤에 언급하겠지만 이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행동대원의 다수를 점하였다.

徐光範(1859∼1897)745) 金源模,<徐光範 硏究>(≪東洋學≫15, 檀國大, 1985) 참조.은 조상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출신이었다. 참판 徐相翊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880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待敎·副修撰을 거쳐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가서 김옥균과 함께 6개월간 체류하고 귀국하였다. 1883년 7월 보빙사를 파견하였을 때 서광범은 이 사절의 종사관이 되어 미국시찰과 유럽을 거쳐 11개월 남짓 세계를 일주하고 귀국하였다. 돌아와서 그는 승정원 동부승지와 참의군국사무를 맡았다.

徐載弼(1864∼1951)746)서재필에 대해서는 李光麟,<徐載弼의 開化思想>(≪東方學志≫18, 1978;≪韓國開化思想硏究≫, 1979, 一潮閣) 참조.은 개화파 핵심 중에서 가장 연소하였다. 부친 徐光彦은 별다른 벼슬을 한 것 같지는 않지만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이었다. 서재필은 7촌 아저씨 徐光夏의 양자로 가서 도승지·전라도관찰사·탁지부대신 등을 지낸 외숙 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2년 20세의 최연소자로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883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6개월 정도 慶應義塾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동행했던 17명 중 14명과 함께 동경 陸軍戶山學校에 들어갔다. 이 곳에서 신식 군사기술을 배우고 1884년 4월 말 서울에 돌아와 1884년 6월 操鍊局의 士官長으로 등용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행동대의 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747) 李光麟, 위의 글, 96∼103쪽.

정변이 실패한 뒤 5賊으로 규정되어 체포령이 내려진 위에 열거한 5명748)≪承政院日記≫, 고종 21년 10월 22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는 상소가 있었다.

저 영식·영효·옥균·광범·재필 등은 모두 簪纓之裔로 아직 털도 나지 않았는데 家勢에 힘입어 일찍이 仙籍에 올랐다(≪承政院日記≫, 고종 21년 12월 16일).

홍영식·박영효·김옥균·서광범·서재필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모두 명문가의 자제였다. 또한 부마였던 박영효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관계에 나아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의 나이를 살펴보면 정변이 일어난 1884년 갑신년에 김옥균은 34살, 홍영식은 30살, 박영효는 24살, 서광범은 26살, 서재필은 20살의 젊은 나이였다. 따라서 이들은 명문가의 출신이라는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모두 비교적 젊은 나이에 관직에 올랐던 인물들이었다. 이들 중에서 끝까지 고종을 호종하다가 죽음을 당한 홍영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단 목숨은 부지하였다.

이들 이외에 앙반출신의 개화사상가로서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희생된 사람으로는 다음의 두 사람을 더 찾아볼 수 있다. 정변 직후 체포되어 知情不告罪로 처형당한 徐載昌(19살)이 있다. 그는 서재필의 동생으로 1883년 6월 남홍철과 함께 김옥균을 수행하고 일본에 갔다가 요코하마에 머물면서 양잠과 영어를 배우고 돌아와서 개화당에 관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정변 직후 貫鐵橋 부근에서 민중들에 의해 살해된 吳鑑이 있었다.749) 古筠記念會 編,≪金玉均傳≫, 420쪽. 그는 南原幼學으로서 서양 각국에서 실행하고 있던 경찰과 재판에 관한 제도를 채택할 것을 상소한 바 있었다.750)≪承政院日記≫, 고종 21년 7월 24일. 그러므로 그는 양반출신의 개화사상가로서 정변에 참가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갑신정변을 일으키는데 핵심에 서 있던 인물 가운데에는 김옥균 등 양반출신들 이외에 앞서의<이윤상국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과 함께 정변의 계획을 논의하였던 유대치·박제경·변수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중인출신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劉大致(1831∼1884?)751) 유대치에 대해서는 李光麟,<숨은 開化思想家 劉大致>(앞의 책, 1973) 참조.는 중인의 대표적인 직업의 하나인 漢醫였다. 그의 집은 중인층의 거주지역인 서울의 광교부근 관철동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박식한 학자이자 폭넓은 행동가였고 개화당의 지도자로서, 막후에서 김옥균 등 개화당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정변의 계획에도 깊숙이 간여하고 있었다.

一白衣로 시정에 은거하여≪海國圖志≫·≪瀛環志略≫등으로써 세계의 사정을 卜察하면서 뜻을 내정의 국면 전환에 두고 가만히 귀족 중의 英俊을 규합하여 방략을 가르치고 志氣를 고무하여 준 이가 있으니 당시 知人의 사이에 白衣政丞의 이름을 얻은 劉大致가 그라. 박영효·김옥균·홍영식·서광범과 귀족이 아닌 이로 白春培·鄭秉夏 등은 다 大致 문하의 俊髦로…박영효·김옥균 등이 연래로 일본교섭의 선두에 선 것은 실상 대치의 指劃 중에서 나온 것이요. 세상이 開化黨으로 지목하는 이는 대개 대치의 문인을 이름하였다(崔南善,≪古事通≫, 三中堂, 1943, 218쪽).

朴齊絅752) 박제경에 대해서는 李光麟,<「近世朝鮮政鑑」에 대한 몇 가지 問題>(≪改訂版 韓國開化史硏究≫, 一潮閣, 1969), 253∼258쪽 참조.은 유대치의 제자였다. 그는 일찍이 중국을 여행한 적이 있었으며 일본인들과 친분도 두터웠던 것 같다. 임오군란 뒤 정사 박영효가 이끄는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김옥균·민영익·서광범·유혁로 등과 함께 일본에 갔다가 돌아왔다. 그는≪近世朝鮮政鑑≫의 필자이기도 하다. 정변 당시 별궁을 방화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정변중에 淸溪川 水標橋上에서 피살되었다.753)≪金玉均傳≫, 420쪽.

邊燧(1861∼1891)754)변수에 대해서는 李光麟,<韓國 最初의 美國大學 卒業生 邊燧>(≪新東亞≫, 1982년 10월호;앞의 책, 1986) 참조.는 조선 중기로부터 역관이나 의관에 종사하였던 중인집안 출신이었다. 즉 조부와 부친은 모두 역과시험에 합격하여 역관으로 활약하였다. 변수는 광교 부근의 중인층이 秋琴 姜瑋를 맹주로 하여 맺은 吟社인 六橋詩社의 동인이었다. 육교 즉 광교 부근에는 조선시대 말기까지 역관·의원 등 기술직의 중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변수의 부친 邊晉桓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를 잘하여 그의 집 서재인 海棠樓는 육교시사의 중심처로서 강위를 비롯하여 당대의 이름높은 시인들이 자주 찾아와 같이 시를 짓던 곳이었다.755)鄭玉子,<詩社를 통해서 본 朝鮮末期 中人層>(≪韓㳓劤博士停年紀念論叢≫, 知識産業社, 1981), 510쪽 강위는 또 변수의 집에 머무르면서 5년 동안 변수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 후 변수는 김옥균·서광범과 친교를 맺고 1882년 3월 김옥균이 첫 번째로 일본을 시찰할 때 그를 수행하여 김옥균의 권유에 의해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학교에서 양잠술과 화학을 배웠다. 그 해 7월 즉 학업을 시작한 지 4개월 뒤 임오군란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1883년 5월에는 보빙사의 수원으로 가게 되어 미국시찰과 유럽을 거쳐 10여 개월 만에 귀국하였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서 1884년 7월에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外衙門)의 주사로 임명되었다가 바로 軍國事務衙門(內衙門)의 주사로 자리를 옮겼다. 변수가 이 자리에 임용되어 국왕을 매우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거사 당시에는 국왕 및 궐내의 사정을 정탐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런데<갑신일록>에 개화당이 정변을 모의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회동하고 있는 인물로 유혁로가 보인다. 그는 그 때 오위장이었으므로 중인계층 출신이었다. 그도 정변의 계획 때부터 참여하였으며 거사할 때 연락·정탐·통신의 임무가 부여되었다.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의 부친인 柳相五는 개화당 초기부터 박영효·서광범과 동지 중의 동지756) 閔泰瑗,≪甲申政變과 金玉均≫(國際文化協會, 1947), 37쪽.로 알려져 있었던 사람으로 정변에 연루되어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757) 柳赫魯,<甲申年 亡命에 對해서 생각나는 것>(三城景明,≪韓末을 말한다≫, 朝鮮硏究社, 1930), 14∼17쪽.
李光麟, 앞의 책(1973), 16쪽.
또 오위장이었던 梁鴻在가 있었다. 그는 민영익의 심복과 같은 인물이었는데 김옥균 등과 뜻을 같이하여 민영익의 동정을 김옥균에게 알려주던 인물이었다.758)<甲申日錄>, 11월 18일.

갑신정변이 일어날 당시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으므로 직접 정변에 참여하지는 못하였으나 묄렌도르프가 ‘김옥균의 黨’759) 日本外務省,≪日本外交文書≫18, No. 112, 1885년 7월 7일, 機密 96호.이라 칭한 白春培가 있었다. 그는 김옥균이 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로 임명되자 그의 종사관으로 몇 차례 울릉도를 왕래한 일이 있었으며 김옥균이 일본으로 300만 원 차관교섭을 하러 갔을 때 수행한 인물이다. 그는 갑신정변 직후 일본으로 망명하는 김옥균 일행을 고베(神戶)에서 만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하여 함께 의논하기도 하였다. 그 후 1885년 8월에 김옥균의 밀령을 받고 정보수집차 국내에 잡입하였다가 체포되어 희생된 인물이다.760)≪舊韓國外交文書≫1, 日案 1, No. 621附 金玉均隨員白春培供辭(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1965), 298쪽. 백춘배는 육교시사의 동인으로 해당루 9君子에 끼어있던 인물이며 강위의 4友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761) 李光麟,<姜瑋의 學問과 交友關係>(앞의 책, 1979). 뿐만 아니라 귀족이 아닌 사람 중에서 유대치 문하의 俊髦로 꼽히던 중인계층에서도 출중한 인물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화당의 지도자로서 막후에서 정변의 계획에서부터 깊숙이 관여하였던 유대치를 비롯하여 박제경·변수·유혁로·양홍재·백춘배 등 중인출신들도 적어도 정변의 계획단계에서부터 참여하여 정변을 주도해 나간 개화당의 중요한 인물에 넣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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