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Ⅴ. 갑신정변
  • 2. 갑신정변의 주도세력
  • 2) 정변의 행동대원

2) 정변의 행동대원

정변을 일으키는 데에는 전면에 나서서 거사를 이끌어 가는 행동대원들이 있다. 그러면 갑신정변에는 행동대원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가. 거사 당일인 1884년 12월 4일 밤 국왕을 景祐宮으로 옮겨 놓고 그 正殿을 중심으로 행동대들이 다음과 같이 포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영 소대장 尹景(啓)完은 당직 병졸을 거느리고 殿庭 안팎에 늘어서 있고 徐載弼은 사관생도 鄭蘭敎·朴應學·鄭行徵·林殷明·申重模·尹泳觀·李圭宅(完)·河應善·李秉虎·申應熙·李建英·鄭鍾振·白(樂)雲 등 13인을 거느리고 殿上에 시립하고, 李寅鐘·李昌奎·李奎禎(喜貞)은 李殷鑑(種)·黃龍澤·金鳳均·尹景純·崔殷童(恩同)·高永錫·車弘植을 거느리고 殿門 밖에 시립하였으니…(<甲申日錄>, 12월 4일).

정전을 중심으로 포진하고 있던 행동대 가운데 국왕에 가장 가까이 전상에 시립하여 있었던 사람들은 서재필을 비롯하여 14명의 사관생도들이었다. 이 14명의 사관생도 가운데 박응학·정행징·윤영관·하응선·이병호·이건영·백낙운 등 7명은 청군의 공격을 받을 때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국왕을 호종하다가 피살되었다. 서재필·이규완·정난교·신응희·임은명 등은 일본에 망명함으로써 목숨만은 건졌다. 이들 가운데 체포되어 처형된 사람은 신중모 단 한 사람이었다.762) 정종진에 대해서는 단지<甲申日錄>에 정변이 일어난 날 경우궁 정전에 시립하였다는 14명의 사관생도 중 그 이름이 들어 있을 뿐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즉 망명한 자, 피살된 자, 체포된 자, 체포령이 내린 자, 1908년 이후 정변으로 희생된 자들에 대한 追贈이 있을 때 등 어느 기록에서도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정변에 참여하였다면 이 기록들 가운데에서 그 이름을 적어도 한 번은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정종진이 과연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는지 의심이 간다.≪大韓帝國官員履歷書≫(國史編纂委員會 영인본, 1972, 252쪽)에 보면 1865년생으로 갑오경장 이전의 경력은 생략된 채 그 이후 學部·軍部·武官學校의 主事를 역임한 정종진이 있는데 동일인인지 모르겠다.

이 사관생도들은 1883년 5월에 박영효가 신문을 발간해 보고자 초청하였던 우시바 다쿠조(牛場卓藏)와 미쓰오 미요타로(松尾三代太郞)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할 때 따라서 유학을 갔던 17명 중에 14명이다. 이들은 처음 6개월 정도는 후쿠자와가 경영하는 慶應義塾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그 해 10월 3일 陸軍戶山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정규 사관학교가 아니라 하사관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이들은 1884년 5월에 졸업하고 7월 말에 귀국하였다.763) 李光麟,<開化初期 韓國人의 日本留學>(앞의 책, 1986), 53쪽.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해서 일본의 사관학교에 유학을 가게 되었을까. 당시 문과에 급제하여 校書館의 副正字의 벼슬을 하고 있었던 서재필은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나에게 제일 강한 인상을 끼친 이는 김옥균이었다…하루는 그가 나에게 國防을 충실히 하자면 정예한 군대 밖에 없는데 현하 우리의 급무로 그 右에 出할때 무엇이냐 하며 日本으로 건너가 무예를 배우라고 권하였다(徐載弼,≪回顧甲申政變≫(閔泰瑗, 앞의 책, 부록, 84쪽).

즉 서재필은 국방을 충실히 하는 데에는 정예한 군대밖에는 없으므로 일본으로 건너가 무예를 배우라는 김옥균의 권고에 의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중모는 유길준의 권고에 의해서 일본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764)<申重模鞫案>. 이규완의 경우는 자격이 미달하였지만 박영효의 집에 머물고 있으면서 선발시험관이었던 박영효에게 강청하여 그의 주선에 의해서 가까스로 이 유학생 일행에 끼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765)박영효의 집에서 사환으로 있던 이규완은 일본유학생을 선발하는데 그 선발 시험관이 박영효라는 사실을 알고 박영효에게 강청하여 겨우 유학생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행 중에는 이규완의 신분이 천인이라 하여 같이 가는 데에 불만이 있는 자가 있었으나 이규완이 시종처럼 위험하고 힘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여 줌으로써 융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李圭完翁百年史≫, 批判新聞社, 1958, 42∼44쪽). 이러한 몇 사람의 예로 미루어 보아 이 일본유학생들 중 다수는 유학생으로 선발되기 이전부터 개화당 요인들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들에 의해서 일본유학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유학생으로 선발된 자는 이규완을 제외하고는 한문의 실력과 소양이 있는 명문가의 자제였다는 것이다.766) 위의 책, 42쪽. 또 박응학·윤영관·이건영은 과거급제자이며 그 밖에 생도들은 閑良이라는 것이다.767)≪高宗實錄≫, 고종 21년 8월 28일. 여기서의 한량은 단지 과거급제자와 구분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박응학은 전 목사 朴鼎和의 아들이었으며, 윤영관은 慶尙左兵使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사관생도 가운데 서재필을 비롯하여 박응학·윤영관·이건영은 분명히 양반출신이었다. 그런데 이규완은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박영효의 겸인이었다.768)이규완은 臨瀛大君의 15대손이었다고 하지만 집안이 몰락하여 폐가상태에 이르러 숙부집에서 풀베기, 가축 돌보기 등 아주 비참하게 지내다가 상경하여 박영효의 집에 사환으로 있게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李圭完翁百年史≫, 28∼29쪽), 또 蠶島의 나무꾼의 아들로 태어나서 택견(脚蹴)의 명선수였으며 박영효의 청직이로 있었다고 한다(金振九,<甲申變亂의 急先鋒>,≪別乾坤≫4-4, 1929). 신중모는 이미 호산학교에서 수학하고 갑신정변에서 행동대의 지휘관 역할을 한 申福模의 동생으로 常漢이었다. 임은명은 강원도 홍천사람으로 체력이 매우 강해서 10여 명을 능히 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서재필의 문하에 있었다는 것이다.769)<甲申大變亂의 回想>(≪韓國近世史論著集≫2, 太學社, 1982, 484쪽). 이 세 사람은 뒤에 언급하겠지만 거사 때 평민 이하 천민출신들과 함께 정부대신을 제거하는 자객으로서의 임무가 부여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평민 이하의 신분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생도들은 대부분 양반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사관생도들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는 동안에 김옥균과 빈번한 접촉을 하고 있었다. 사관생도 중에서 유일하게 체포된 신중모를 국문하는 가운데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 몸은 원래 常漢으로서 兪吉濬의 권고로 일찍이 일본에 가서 어학을 배우다 귀국하였다. 그 때 일본에 간 20여 명 중 나를 비롯한 14명은 1년 반 士官공부를 배웠다. 그 후 김옥균이 왔다. 매 7일에 한 번씩 만났으므로 자주 가서 상종하였다. 따르며 얻은 것을 말하면 서양 각국은 모두 독립국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나라가 독립한 연후에 가히 친교를 할 수 있는데 조선은 홀로 중국의 속국이니 심히 부끄럽다. 조선은 언제나 독립하여 서양 여러 나라와 같은 위치에 있을 수 있겠는가(<申重模鞫案>).

즉 김옥균이 300만 원 차관교섭을 위해 세 번째로 도일하였을 때 서재필 등 사관생도들은 1주일에 한 번씩 그를 찾아가 만났던 것이다. 그 때마다 김옥균은 조선은 청국의 간섭에서 벗어나서 서양의 여러 나라와 동등한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켰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관생도들은 김옥균을 추종하게 되어 개화당의 핵심세력을 이루었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들이 귀국한 직후 국내의 상황은 그들에게 좋지 않은 쪽으로 펼쳐져 가고 있었다. 서재필은 1884년 7월 귀국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우리가 戶山學校를 마치니 朝鮮士官들에게 신전술을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귀환명령을 받았다. 우리는 1884년 4월에 서울로 돌아와 보니 정계는 떠나기 전보다 가일층 험악한데 조정 내외가 우리를 호의와 적의를 가지고 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께서는 우리 일행을 인견하시어 일신한 군복에 창검을 꼬진 총을 메고 御前에 나타났다. 禁掖(闕內內庭)으로 들어가서 柔軟體操와 다른 운동을 해보라고 하명하신 것으로 보아 확실히 고종께서는 우리들의 복장과 모든 것에 怡悅을 느끼신 것이었다. 그 때 새 兵學校가 韓圭稷大將 지휘로 조직된다는 것을 들었다. 우리는 그 실현을 학수고대하였으나 徒勞이었었다. 六七朔의 뒤에야 그 신학교 설립의 기회를 잃게 된 것을 알게 되었는바 그리하여 사관훈련의 꿈도 따라서 사라져 버리었다(徐載弼,<回顧甲申政變>, 85쪽).

이 회고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고종은 신식 군사기술을 배우고 돌아온 이들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새로이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이들을 교관으로 수용하고자 하였다. 이 사관학교 설립을 고종한테 상주한 사람은 尹致昊였다. 하지만 윤치호를 이렇게 움직이도록 그의 뒤에서 작용한 사람은 김옥균인 것으로 보인다.770) 尹致昊,≪尹致昊日記≫1, 1884년 8월 9일(國史編纂委員會, 1973).
李光麟, 앞의 책(1979), 102쪽.
그러나 사관학교 설립계획은 청군의 압력과 집권파 민씨측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관생도들은 군에서 밀려나야만 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민영익은 조선군대 훈련을 위해 청국으로부터 5명의 교관을 부르게 되었다. 이 조치는 개화당 요인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그러나 가장 불행하게 된 것은 14명의 사관생도들이었다. 그들은 청국군 교관을 고빙하게 됨으로써 적어도 한국인으로서 그들의 계급에 걸맞는 군관으로서의 직위를 유지할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규직)장군의 군영에 채용된 3명을 제외하고 사관생도들은 군에서 떨려나 개화당 인사들에 의하여 반자선책으로 홍영식 밑에 있는 우정국의 하위직이 주어졌다(Ensign George C. Foulk, Report of information relative to the revolutionary attempt in Seoul, Corea, December 4∼7, 1884, Papers of American Foreign Relations, Inclosure in No. 128;朴日根 編,≪近代韓國關係英·美外交資料集≫1866∼1886, 新文堂, 1984, 996쪽).

민영익이 청국교관을 부르게 됨으로써 사관생도들이 대부분 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옥균을 추종하고 있던 이들은 집권파에 대해 불만은 점점 더 커져 갔을 것이며 마침내 정변에서 행동대원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을 것이다. 이들을 정리해 보면<표 1>과 같다.

이 름 나이 신분/지위 정변시 임무 정변후 상황 비   고
徐載弼 20살 兩班/領官 행동대 지휘 일본망명 과거급제
鄭蘭敎 21살 閑良    〃  
朴應學   兩班   피살 과거급제
前牧使 朴鼎和의 아들
鄭行徵   閑良    〃  
林殷明    〃 營使암살 일본망명  
申重模 23살  〃, 常漢  〃 謀反大逆不道 申福模의 형
尹泳觀   兩班   피살 과거급제
慶尙左兵使의 아들
李圭完   閑良, 常漢 별궁 방화, 營使암살 일본망명 朴泳孝의 傔人
河應善    〃   피살  
李秉虎    〃    〃  
申應熙 26살  〃/副領官   일본망명  
李建英   兩班   피살 과거급제
鄭鍾振   閑良     정변에 참여?
白樂雲    〃   피살  

<표 1>갑신정변에 참여한 사관생도

앞서 정변 당일 밤 경우궁에서 행동대들이 포진하고 있는 상황을 살펴보면 정전 문밖에는 李寅鐘·李昌奎·李奎禎(喜貞)이, 李殷鑑(種)·黃龍澤·金鳳均·尹景純·崔殷童(恩同)·高永錫·車弘植을 거느리고 포진하여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갑신일록>에 보면 정변이 일어나기 며칠 전인 1884년 12월 1일 박영효의 집에서 거사 때의 임무 분담이 이루어졌으며, 그 다음날에 이인종으로 하여금 일본인 4명과 각각 얼굴을 익히기 위해서 압구정의 박영효 별장에 가서 사냥을 하는 모임을 가졌다는 것이다. 당시 압구정으로 갈 때까지의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내(윤경순)가 인종의 집에 가보니 인종과 은종·황용택·최은동·김봉균·이규완·신중모 모두 있었다. 나한테 함께 놀러가자고 하였으므로 같이 갔다. 水口門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步轎 2대에 일본인이 타고 있었다. 또 한 사내가 장총을 가지고 따라오는데 옥균가의 床奴 永石이라 하였다. 왜인 또한 각각 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일행은 함께 압구정으로 갔다(<尹景純鞫案>771)<尹景純鞫案>에는 윤경순 이외에 이응호·전흥용·윤계완·김창기·민창수·최성욱·이상록·신흥모 등 1886년 체포된 9명의 국안이 들어 있다.).

즉 이인종의 집에 모였던 이은종·황용택·최은동·김봉균·이규완·신중모·윤경순·이희정·박삼룡772)<申重模鞫案>에 보면 12월 2일(음력 10월 15일)에 신중모가 이규완과 함께 이인종의 집에 가보니 이인종·이은종·이희정·최은동·윤경순·박삼룡이 모여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희정·박삼룡도 압구정모임에 참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사람에게도 영사의 암살 임무가 주어졌다. 등과 수구문 근처에서 합류한 고영석과 일본인들이 함께 鴨鷗亭에 있는 박영효의 별장으로 가고 있었다. 이들은 사냥을 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실제로는 일본인 자객 4명과 서로 얼굴을 익히면서 거사의 예행연습을 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바로 4영사 등 정부요인을 살해할 때 호령 즉 지휘를 맡은 이인종·이희정과 직접 살해하는 임무가 부여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압구정에서 정부요인들을 살해하는 예행연습을 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거사 당일 박영효의 집에 모여서 우정국으로 함께 가 그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정국에서 민영익이 나오자 일본인이 해를 입히고 연이어 이인종·윤경순 등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 왕십리에 거주하는 河포교 등 30여 명이 방망이를 들고 나타나 이들은 도주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다시 박영효의 집에 모였다가 변수를 따라 경우궁으로 가서 대신들을 제거하게 되었던 것이었다.773)<尹景純鞫案>.

이들이 계획을 세울 때는 별궁에 방화를 하여 우정국 연회에 모였던 4영사 등이 별궁의 화재를 끄러 나타났을 때 이들을 제거하기로 하고 영사 한사람당 두 사람씩 자객을 배정하였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놓친 영사들을 일본인 자객이 뒤에서 제거하기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774)<甲申日錄>을 보면 12월 1일에 거사시 각각의 임무를 분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 4명의 영사를 모두 살해하기로 하고, 영사 한 사람당 두 사람씩 맡기로 하였던 것이다. 즉 민영익은 윤경순·이은종, 윤태준은 박삼룡·황용택, 이조연은 최은동·신중모, 한규직은 이규완·임은명이 맡기로 하고 별도로 일본인 4명으로 배수를 치기로 하였으며 이인종·이희정의 신호에 맞추어 시행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계획한 그대로 실행하는 못하였다. 거사 첫날인 12월 4일에 4영사 등 정부요인을 암살한 상황을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나(김봉균)와 이규완이 함께 李(조연)營使를 해쳤다. 황용택·윤경순이 함께 한(규직)영사를 해치고 최은동·고영석이 함께 윤(태준)영사를 해쳤다. 민(영목)판서는 이규완·황용택·윤경순·고영석이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필시 여기에서 해쳤을 것이다. 조(영하)보국·민(태호)보국 또한 4漢과 최은동이 세 문 사이에서 下手하였다(<金鳳均鞫案>).

계획에서 짜여진 그대로 자객들이 배정된 영사를 각각 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압구정에 모였던 그 사람들이 4영사와 민영목·민태호·유재현 등 정부요인들을 살해하였던 것이다.775) 4명의 영사를 암살하는 임무를 분담하였을 때 영사마다 짝지워진 계획 그대로 암살이 실행되지는 않았던 것 같으며 또 국안마다 그 내용에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압구정에 모였던 사람들이 암살의 임무를 수행한 것은 분명하다(<甲申日錄>·<尹景純鞫案>·<申重模鞫案>참조).

지휘의 임무를 부여받은 이인종은 종5품직인 判官을 지냈으며 4년 전에 박영효의 집에 賣菘業을 하는 윤경순을 소개한 것으로 보아 그는 상당 기간 박영효의 집과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일찍부터 거사 모의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776)매숭업을 하는 윤경순이 박영효 집에 4년간 배추를 팔 수 있었던 것은 이인종에 의해서였다고 하였으며 또 그 대금을 이인종이 주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인종이 박영효의 겸종으로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軍伍之賤·常漢下流라는 이희정·이창규와 결의형제를 맺었던 것으로 보아 이인종의 신분도 평민 이상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역시 지휘의 임무가 부여되었던 이희정은 59세의 연장자였는데 군인이었으며 僉使를 지냈다. 거사 당시에는 부영관을 제수받았다. 그는 이인종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으며 함께 충의계777) 충의계는 忠義隊 즉 보부상을 일컫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제시해 놓은 것이 있다(李光麟, 앞의 책, 1986, 106∼107쪽). 북한 사학에서는 충의계를 개화파의 모태이며 부르조아혁명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정치적 비밀결사요 개화파의 핵심조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 근거가 빈약하다(申福龍,<北韓 史學에 나타난 甲申政變의 吟味>, 韓國政治外交史學會 編,≪甲申政變硏究≫, 평민사, 1985, 87∼88쪽 참조). 계원이기도 하였던 그에 의해서 거사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정변 직후 체포되어 국문을 받는 도중에 사망한 吳昌模(34살)도 충의계에 가입한 사람이었다. 그는 兵使를 지낸 吳晋泳의 庶子였다.

그러면 이인종과 이희정의 지휘하에 정부대신들을 살해하는 임무가 부여되었던 사람들을 어떠한 사람들이었는가. 尹景純(慶淳)(29세)은 동대문 밖에서 배추장사를 하면서 사는 常漢이었다. 그는 이인종과 동대문밖 같은 동리에서 거주하였던 적이 있었으며 이인종의 집에 자주 왕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3년 정도 이인종의 집에 기식하기도 하였던 사람이었다. 이인종의 소개로 박영효의 집에 4년간이나 배추 등을 팔았으며 1884년 10월에는 이인종이 자기 집으로 배추값을 받으러 오라고 하여 갔다가 거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윤경순은 이인종으로 인하여 거사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崔恩同(殷童)은 윤경순·윤계완 형제와 같은 마을에 살았다는 것으로 보아 이들과의 인연으로 인하여 거사에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金奉(鳳)均(26살)은 박영효의 傔從이었다. 賤人출신으로 1880년부터 박영효의 집에서 지냈다. 1882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그를 따라 일본에 갔다 온 적도 있었다. 그는 정변 당시에 仁政殿을 방화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778)<甲申日錄>, 12월 1일·4일. 그리고 高永錫(石)은 김옥균 집의 床奴였다.

그런데 압구정에서 사냥을 하러 나가면서 윤경순은 이인종과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閑生들이 만약 관직에 오르게 된다면 우리들만 원통하지 않은가 하고 내(윤경순)가 물었더니 (이인종이) 대답하기를 장차 큰일이 있으면 마땅히 世道人을 모두 제거하고 박영효가 好官이 되면 너희들 또한 마땅히 好任을 얻게 될 것이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尹景純鞫案>).

정변에 똑같이 참여하였으면서도 ‘한생’들은 관직에 오르게 되고 압구정에 모였던 윤경순 등은 관직에 오르지 못할 것이므로 원통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에서 압구정에 모였던 사람들이 관직에 오를 만한 신분이 되지 못하는 천한 신분출신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생’은 아마 사관생도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상한 또는 천인출신으로 부상·군인·겸종·상노로서 신분이 밝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밖의 사람들도 평민 이하의 신분출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규완·신중모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관생도였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사관생도들과는 달리 자객으로서 평민 이하 천민까지 포함된 사람들과 함께 정부대신들을 살해하는 데 가담하였다. 이규완은 박영효의 겸인으로 명문자제들로 구성된 일본유학생으로의 자격이 미달되어 박영효의 주선으로 가까스로 유학생에 합류하게 된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신중모는 상한출신이었다. 당초의 계획에는 자객으로 사관생도 임은명도 끼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규완·신중모·임은명 등의 사관생도들은 대부분 명문자제로 구성되었던 일본 육군호산학교 유학생 중에서 신분이 처지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수 있겠다.

경우궁 전문 밖에서 시립하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는 이상에서 살펴본 사람들, 즉 정부대신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한 사람들 이외에 이창규·차홍식이 있었다. 李昌奎(43살)는 정변 당시 영관의 지위를 제수받았던 사람이었으며, 상한으로 1883년 4월에 사관생도 신복모·이은돌과 함께 무과에 급제하기도 하였다. 정변 당시에는 負商의 統領으로 각처의 부상들을 모아 이끌고 경우궁에서 시위하였다. 이 때 부상 백학진도 행동을 같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창규는 이인종·이희정과 함께 結義兄弟를 맺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세 사람 모두 상한출신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창규도 이희정과 마찬가지로 이인종으로 인하여 정변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車弘植(18살)은 본래 華溪寺의 승려였다. 김옥균이 1882년 화계사에서 10일정도 묶었을 때 그의 권유로 김옥균 집에 머물고 있다가 김옥균이 동남개척사로 일본에 갈 때 炊飯作饌의 임무를 띠고 수행하여 일본에 갔다온 적이 있었다. 거사 직전에는 서재필의 집에서 집안일을 보고 있다가 정변에 연루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차홍식도 평민 이하의 신분출신으로 볼 수 있겠다. 그 밖에 정변 직후 체포령이 내려져 있던 東萊水使의 동생 李熙德도 김옥균의 부름을 받고 경우궁에서 함께 시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변에 연루되어 체포된 사람 중에서 정부대신 등을 암살하는데 가담하였던 사람들과 부영관을 제수받은 이창규에게는 謀反大逆不道罪의 극형에 처해졌으며 차홍식에게는 知情不告罪를 적용하였다. 이 밖에 이인종·이은종·황용택·최은동·고영석·박삼룡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는데 그 중 이인종은 정변중에 피살당하였다고 한다.779)<罪人申箕善鞫案>. 이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표 2>와 같다.

이 름 나이 신분/직업 정변시 임무 처 벌 비   고
李寅鐘   判官 營使암살 지휘 체포령(피살) 의형제 忠義契
李昌奎 43살 常漢下流
負商統領
副領官 謀反大逆不道 무과급제
李喜貞 59살 軍伍之賤
僉使
營使암살 지휘
領官
 〃 忠義契
李殷種       체포령  
黃龍澤     營使암살  〃  
金鳳均 26살 蟣蝨之賤
박영효 겸종
  〃
仁政殿 방화
謀反大逆不道 박영효 수행 도일
尹景純 28살 常漢
賣菘業
別宮방화
營使암살
 〃 이인종 집에 3년간
기식
崔恩同     別宮방화
營使암살
체포령  
高永錫   김옥균 상노 營使암살 방화  〃  
車弘植 18살 승려
서재필 겸종
  知情不告 김옥균을 수행 도일
朴三龍     營使암살 체포령  
吳昌模 34살 庶子
蟣蝨之流
  鞠問중 사망 前兵使 吳晉泳의 서자
忠義契
白學鎭   負商   체포령  
李熙德        〃 東萊水使의 아우

<표 2>갑신정변에 참여한 주요인사 암살자 및 부상 등

또 다른 무리가 거사에 참여하였다. 다음과 같은 국문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거사 당일 閔昌洙의 집에 모였다가 가담한 무리가 있었다.

問. 閔昌洙의 집에 모였을 때 몇 사람이었으며 이름은 누구였나.

供. 13인이었다. 申福模·浪昌寬·張明煥·全興龍·金昌基·尹啓完·申聖模·車壽鉉·李上祿·張聖寬·任鎭圭·崔聖郁 그리고 나(李應浩)였다(<李應浩鞫案>).

민창수의 집에 모였던 사람들은 집주인 민창수를 포함하여 모두 14명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전영군인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張明煥·申錫(聖)模·車壽鉉·張聖寬·任鎭圭(奎)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지만 민창수·전흥룡·김창기·윤계완·최성욱·이응호 등은 1885년 1월 체포되어 국문을 받고 처형당하였으며 이상록은 智島로 정배되었다. 낭창관은 1886년 10월 말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따라서 국안을 통해서 이들의 신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閔昌洙(27살)는 부상(饌商·賣酒)이었다가 1883년 남한산성군에 입대하여 정변 당시에는 전영의 隊首였다. 金興龍(28살)은 산성군인으로 있다가 전영에 편입된 자이다. 金昌基(25살)는 산성병이었다가 신복모와 함께 부평으로부터 와서 정변에 참여하였다. 尹啓完(24살)은 미천한 신분으로 菁根商을 하다가 남한산성군에 들어갔으며 그 뒤 상경하여 전영의 대장이 된 사람이다. 그는 형인 윤경순에 의해 개화당과 관계를 맺게 되어 거사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당직일자를 거사날에 맞추어 조정하고 당일 병졸 50명을 거느리고 경우궁을 숙위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崔聖郁(32살)은 萊營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와 신복모의 권유에 의해 거사에 참가하였다. 李應浩(33세)는 미천한 신분출신으로 남한산성에서 훈련을 받다가 상경하여 前營敎長이 되었으며, 거사 당일 參領官을 제수받았다. 李上祿(31살)은 전영의 병졸로 신복모의 명령에 따라서 거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浪昌煥(寬)(29살)은 천인출신으로 정변중에 영관으로 제수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營門執事였다.780)<謀反大逆不道罪人仁黙等鞫案>.

이 전영군인들의 지휘관인 申福模는 일본 육군호산학교 출신 사관생도였다. 거사 당시에는 전영의 교장으로 總管畿沿海防事務(海防使) 閔泳穆 밑에서 교관으로 있다가 정변에 참가하여 부영관의 직책을 제수받아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신복모의 형인 신흥모(29살)는 御營校의 집사로 있다가 동생 신복모의 권유로 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이처럼 신흥모·신복모, 사관생도 신중모 3형제가 모두 정변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또한 정변에 가담한 인물로 신복모와 함께 일본으로 유학하여 陸軍敎導團에서 나팔을 전공하고 박영효 밑에서 교련을 담당했던 李銀乭이 있었다.

정변에 참가했던 전영군인들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의<표 3>과 같다.

이 름 나이 지 위
전영/(정변 중)
신분 및 전직 처 벌 비   고
申福模   敎長/(副領官) 常漢
山城軍 敎官
체포령 戶山學校 사관
무과급제
興模·重模와 형제
李銀乭       〃 (피살) 陸軍敎導團서 나팔전공
무과급제
閔昌洙 26살 隊首 負商(饌商·賣酒)
山城軍
知情不告  
浪昌寬 27살 병사/(領官) 蟣蝨之賤 謀反不道  
張明煥       체포령  
全興龍 27살 병사 山城軍 謀反不道  
金昌基 24살    〃 知情不告  
尹啓完 23살 대장 菁根商·山城軍 謀反不道 尹景純의 아우
申錫模       체포령  
車壽鉉        〃  
李上祿 30살 병사 至微至賤之流 定配  
張聖寬       체포령  
任鎭圭        〃  
崔聖郁 31살      〃 萊營에서 훈련
李應浩 32살 敎長/(參領官) 微賤之流·山城軍 謀反不道  

<표 3>갑신정변에 참여한 전영군인

이들 중 신분이 밝혀진 사람들은 거의 모두 미천하고 군인이 되기 이전의 직업을 보면 야채나 찬거리를 팔았거나 술을 팔았던 장사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영군인을 다음의 글에서 보듯이 부상에서 선발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부상출신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전영 560인은 모두 부상에서 선발된 병사로서 4영 중 가장 유력한 자이다. 또한 후영의 500인도 그 절반은 역시 부상에서 선발된 자이다(≪東京經濟雜誌≫, 1885 2월 7일, 負商褓商の勢力).

그런데 정변 후 체포되어 국문을 받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남한산성병으로 있다가 상경하여 전영군인이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남한산성병과 전영군인의 관계에 대해 박영효는 갑신정변을 회상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幸히 廣州留守가 守禦使兼職으로 병권을 가지게 된 것을 다행으로 後日之計를 위하여 양병을 할 터이니 金玉均은 得債중 수만금을 군자로 밀송하여 주기를 斷斷相約하고 나는 광주로 金은 일본으로 各散하였었다. 기다리는 군자금은 아니오고 곤군한 중에 겨우 천여의 병을 교련하니 당시 日本士官學校 출신인 申福模와 나팔수 李銀乭은 나의 股肱으로 일본식 교련에 진력하든 難忘之人이었다. 그렁저렁 1년이 지남에 광주유수의 精兵 양성이 이상히도 민일파에게 위험시하게 되야 閔妃의 일언으로 나는 곧 면관되고 내가 양성한 일본식 군병은 곧 京城으로 徵上되야 전후 御營에 속하야 前營使 韓圭稷, 後營使 尹泰駿의 영솔하에 돌아가고 말았다(朴泳孝,<甲申政變>,≪新民≫14, 1926. 6).

1883년(고종 20) 3월 광주유수로 부임한 박영효는 守禦使를 겸직하여 군권을 지니게 된 것을 기회로 개화당의 계획을 위해 병력의 양성에 착수한 것이었다. 즉 이 군대가 南漢敎鍊兵隊 즉 남한산성병이었던 것이다. 이 군인 양성에 필요한 자금은 김옥균이 일본에서 교섭하여 차관을 얻어 오게 되면 그 일부로 충당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김옥균의 차관교섭이 실패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집권파 민씨의 질시로 박영효도 1883년 10월에 수어사직에서 면직되었다. 그리고 박영효가 양성한 남한교련병대는 일단 御營廳으로 소속이 변경되었으며,781)≪高宗實錄≫, 고종 20년 10월 1일. 곧 이어서 이들을 훈련시킬 교련소를 신설함과 동시에 이를 親軍前營이란 부대명칭을 붙이고 御營大將 한규직에게 감독을 겸하게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친군전영의 군인은 박영효가 광주에서 교육시킨 병력이었다. 이들을 훈련시킨 교관은 박영효의 측근 심복인 신복모와 이은돌이었다. 신복모·이은돌은 1881년 11월에 張大鏞과 함께 하사관교육을 받기 위해 일본에 유학하였다. 이 유학은 通商章程 체결차 도일하였던 수신사 趙秉鎬가 일본정부에 요청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들 가운데 장대용은 입학한 지 2개월 만에 병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지만 신복모는 1882년 5월 육군호산학교 보병과를 졸업하고 다시 교도단에 들어가 대·중·소대학을 연습하고 일본에 간 지 1년 2개월 만에 박영효 일행과 같이 귀국하였다. 이은돌은 육군교도단에 입학하여 나팔을 전공하였다. 유학한 지 1년 만인 1882년 10월에 졸업하고 귀국하였다.782) 李光麟, 앞의 책(1986), 50∼51쪽 참조. 이 두 사람은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83년 4월에 이창규와 함께 무과에 拜賜되었다.783)≪承政院日記≫, 고종 18년 4월 7일.

박영효가 양성한 남한교련병대의 군인을 흡수하여 만들어진 전영은 다음의 글에서 엿볼 수 있듯이 좌·우영과는 그 성격이 달랐다.

지금 좌·우영과 전영은 서로가 보기를 仇敵처럼 하고 있는데 평일에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유사시 어찌 힘을 내어 나라를 위한다 할 것인가(≪尹致昊日記≫1, 1884년 1월 4일).

친군좌·우영은 청국의 강제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설치 운영되었으며 청군이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청국식 부대였다. 반면에 전영은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관생도들이 교관으로 훈련을 시킨 일본식 부대였다. 이러한 다른 성격의 두 부대는 서로 적대시할 정도로 반목·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784)崔炳鈺,<壬午軍亂後 親軍制의 成立과 그 矛盾>(≪軍史≫26, 國防軍史硏究所, 1993), 101∼103쪽. 따라서 전영군인들은 친청적 성향을 띠고 있던 집권파보다는 박영효 등 개화당 편에 서서 이들에게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였던 것은 당연하였다.

그런데 민창수의 집에서 모였던 전영군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나(민창수)는 병정이다. 敎長之會에는 감히 참석할 수 없다(<閔昌洙鞫案>).

17일 저녁 신복모가 나(李上祿)에게 윤계완을 불러 함께 閔昌洙의 집에 오라는 명령을 하였으므로 나는 명령에 따라 갔더니 敎長·什長 등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李上祿鞫案>).

이 모임은 일반 병사는 함께 자리할 수 없는 교장들의 모임이었다고 하고 또 교장·십장 등이 모두 모였던 모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민창수 집에서의 모임은 전영군인 가운데에서도 지휘관급이 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신복모·이응호는 교장, 윤계완은 대장, 민창수는 대수로 밝혀졌지만 그 이외에도 다수가 전영내에서 지휘관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날 민창수의 집에서 가졌던 전영군인들의 모임에서 대표격인 신복모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는 것이다.

오늘 저녁 二撟경 불이 나면 마땅히 난리가 있을 것이다…청국과 일본이 교전할 것이며 영효·옥균 등이 이 일을 한다…우리들은 開化之世事가 만약 이루어진다면 마땅히 好官을 얻을 것이다(<李應浩鞫案>).

이 글에서 보이듯이 이들은 정변이 성공하면 ‘好官’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에 유혹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전영군인은 총 500명 정도였다. 이 중에서 14명이 민창수의 집에 모였으며 또한 이들은 전영군인 가운데에서도 지휘관급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또 이들은 박영효의 밑에 있던 군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단순히 보다 나은 직책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정변에 참가하게 되었던 사람들로 보기보다는 이미 개화당이 추구하던 정변의 목표에 대하여 적극 동조하고 있던 개화당 인사들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갑신정변에는 개화당 요인들의 겸종 및 노자들이 다수 연루되어 처형당하였다. 앞서의 박영효의 겸종인 김봉균, 김옥균의 상노인 고영석 이외에 정변에 연루되어 처형을 당한 자로는 이점돌·이윤상·남흥철·고흥철·최영석·운이 등이 있었다.

李點乭(27살)은 김옥균의 겸종이었다. 그는 천민출신으로 김옥균의 鄕人이었으며 김옥균의 집에서 3년간 지내다가 김옥균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1884년 4월 귀환하였다. 거사 당시 사관생도 2명과 함께 민가를 방화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高興宗(41살)은 용렬하고 미련한 하류출신으로 역시 김옥균의 겸종이었다. 李允相(33살)은 4·5년간 서광범의 겸종으로 있었다. 그는 별감을 지냈으며 시정에서 苧廛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별군직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정변에 참가하였다는 것이다. 南興喆(30살)은 궁방의 일을 하던 천인출신으로서 김옥균의 겸종이었다. 그는 1883년 6월 김옥균이 차관교섭을 위해 세 번째로 도일할 때 수행하여 일본에 갔다가 牛痘法을 배우고 돌아온 후 諫洞에서 貨賣洋物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가 거사에 참여하였다는 사람이었다. 이 밖에 박영효의 사랑 奴子 崔英植(42살)은 체포되어 처형당하였으며 서재필의 家僮 雲伊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다. 이들을 정리해 보면<표 4>와 같다.

이 름 나이 직   업 신  분 처 벌 비   고
金鳳均 26살 박영효의 겸종     *<표 2>참조
李點乭 27살 김옥균의 겸종 皂隷賤鄙之流 謀反不道 김옥균을 수행 도일
高興宗 41살    〃 庸頑下流 知情不告  
李允相 33살 서광범의 겸종
別監, 苧廛
  謀反不道  
南興喆 30살 김옥균의 겸종
洋物賣
稤宮之賤 知情不告 김옥균을 수행 도일
우두법을 배워오다
高永錫   김옥균의 床奴     *<표 2>참조
崔英植 42살 박영효의 舍廊奴子 宮家蒼頭 知情不告  
雲 伊   서재필의 家僮   체포령  

<표 4>갑신정변에 참여한 겸종 및 노자

이들이 체포되어 국문을 통해서 밝혀진 신분으로 보나 직업으로 보나 평민 중에서도 하류출신 내지는 천민출신이었다. 또 이들의 국안을 살펴보면 이들은 모두 외조부의 이름을 모르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친조부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이 천한 신분출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785) 鞫案에 보면 이점돌·최영식은 조부·외조부의 이름, 고흥종·이윤상·남흥철은 외조부의 이름만을 모르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은 개화당 인사의 충복으로서 자연스럽게 정변에 연루되었다가 희생된 자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갑신일록>에 보면 개화당 인사들은 궐내의 종사자들에게도 손을 뻗쳐서 이들 중에도 정변에 가담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786)<甲申日錄>, 11월 19일 및 12월 1일·3일·4일. 이들 중에는 궐내의 사정을 정탐하여 알려주던 朴大榮 閣監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환관 2명이 있었다. 또 顧大嫂(42살)라는 궁녀는 10여 년 전부터 개화당에 들어와 궁중의 비밀을 통보해 주었으며 정변 당시에는 通明殿을 방화하는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李錫伊는 김봉균과 함께 仁政殿을 방화하는 임무를 맡아 수행한 자로서 궁녀로 보인다.787) 인정전을 방화할 때 미리 그 아래 화약을 묻어 놓았다고 하므로 그 임무를 수행한 이석이는 궁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甲申日錄>, 12월 4일). 李禹石은 궁녀로서 궁궐내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1886년 1월 26일 처형되었다.788)≪備邊司謄錄≫266책, 고종 22년 12월 22일. 정변이 일어난 당일 金虎門을 지키고 있다가 문을 열어 준 김옥균의 심복 수문장도 있었다. 이들을 표로 정리해 보면<표 5>와 같다.

이  름 나 이 직  업 임   무 처  벌
朴 大 榮   閣監 궐내 염탐  
△ △ △   宦官   〃  
△ △ △    〃   〃  
顧 大 嫂 42살 宮女 通明殿 放火  
李 錫 伊    〃 仁政殿 〃  
李 禹 石    〃   처 형
△ △ △   守門將 金虎門 開門  

<표 5>갑신정변에 참여한 궁궐내의 종사자

이처럼 갑신정변의 행동대는 일본 육군호산학교 출신 사관생도들과 전영군인의 지휘관급들, 개화당의 인사들의 심복 장사들이 그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전영소속의 군인들이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여 가담하였다. 한편 개화당의 인사들의 겸인·가동들이 가담하였다. 또한 궁내의 종사자들 중에서도 가담한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소수의 양반출신인 사관생도들을 제외하고는 중인 이하 천민에 이르는 신분출신의 사관생도·군인·부상·겸인·가동·승려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개화파의 이상에 적극 동조하여 정변의 계획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자가 있었으며, 또 이들과 연결되어 보다 나은 지위를 얻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참여한 자들도 있었다. 반면에 단지 하인의 신분으로서 상전을 충성스럽게 섬기다가 자연히 정변에 연루되어 희생된 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尹炳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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