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Ⅴ. 갑신정변
  • 3. 갑신정변의 전개
  • 2) 갑신정변의 준비
  • (1) 개화당의 정변 무력문제

(1) 개화당의 정변 무력문제

개화당들이 청국의 조선속방화 적극 간섭정책을 일거에 물리치고 청국에 야합한 민비 수구파정권을 타도한 후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정변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1883년 봄부터였다. 그러나 이 때에는 그들이 아직 정변의 구체적 계획을 설계한 것은 아니었다.

개화당의 영수 김옥균은 일찍이 청국세력을 몰아내고 수구 고식배를 소제하여 ‘大更張改革’을 단행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설파했었다. 그 하나는 김옥균의 표현에 의하면 ‘平和行事’의 방법이었다. 이것은 국왕의 칙령을 빌려서 평화적 방법으로 점진적으로 개혁사업에 종사하는 방법이었다. 다른 하나는 김옥균의 표현을 빌리면 ‘武力行事’의 방법이었다. 이것은 국왕의 밀의에 의탁하면서 무력으로 정변이나 혁명을 일으켜 먼저 정권을 장악한 다음에 급진적으로 개혁사업을 신속히 단행하는 방법이었다.800) 金玉均,<朝鮮改革意見書>(111∼112쪽 참조). 개화당은 김옥균이 말한 두 번째의 방법을 택하여 정변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개화당이 구상한 정변은 군사무력을 수단으로 택한 것이었으므로, 개화당은 4개의 흐름으로 정변 무력을 준비하였다.

첫째, 개화당 요인 朴泳孝가 한성판윤으로부터 1883년 3월 경기도 廣州留守로 좌천되어 가자, 경기도 광주가 수도방위를 위한 4都의 하나로서 광주유수가 군대양성의 권한을 가진 직책임을 활용하여 바로 500명의 장정을 모집해서 서양식 군대를 의미하는 신식 군대양성을 시작하였다.801)≪漢城旬報≫3호, 1883년 10월 21일,<廣留狀啓>.
≪承政院日記≫, 고종 20년 10월 1일.
이 광주군대의 훈련대장에는 개화당 군인장교 申福模를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수개월간의 강훈련 결과 박영효의 휘하에 500명의 강력한 신식 군대가 새로이 양성되었는데, 이것은 개화당의 군대였으며, 겸하여 유사시에는 정변의 무력으로 준비된 것이었다.

그러나 수구파들은 개화당 요인 박영효의 휘하에 500명의 강력한 신식 군대가 있는 것을 위험시해서 국왕에게 진언하여, 마침내 국왕은 1883년 10월 1일(양력 10월 31일) 광주군대를 御營廳으로 이속시키라고 명령하였다.802)≪高宗實錄≫, 고종 20년 (음력) 10월 초1일. 어영청은 당시의 왕궁수비대 관리기관의 명칭이었다. 그 결과 박영효가 뽑아서 훈련시킨 광주군대는 서울로 불러 올려서 어영청에 속하게 되었다.803)≪漢城旬報≫ 3호, 1883년 10월 1일<廣留狀啓>.

수구파는 국왕을 움직여 계속해서 1883년 11월 6일 박영효를 광주유수에서 해임시켰을 뿐만 아니라 11월 22일에는 광주군대로 만들어진 신설 敎鍊所를 ‘親軍營前營’이라 호칭하도록 하고, 어영대장 韓圭稷이 친군영 前營使(처음 호칭 監督)를 겸임케 하였다.804)≪高宗實錄≫, 고종 20년 10월 23일. 한규직은 민비 수구파 요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것은 광주군대의 지휘권을 민비 수구파가 개화당으로부터 빼앗아 가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김옥균·박영효 등이 친군영 전영의 장교들을 개화당의 비밀결사인 忠義契에 가입시켜 지휘하고 있었고, 병사들도 일찍이 광주에서 박영효·신복모가 뽑아 훈련시킨 군대였기 때문에 친군영 전영의 무력은 비밀리에 개화당의 지휘를 받는 무력이었다.

국왕은 1883년 11월 29일(양력 12월 28일) 春塘臺에서 친군영 전영군대(광주군대)를 친히 관람하였다.805)≪高宗實錄≫, 고종 20년 11월 29일. 당시≪한성순보≫는 이 같은 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 보도하였다.

29일 국왕께서 춘당대(창경궁 안에 있었음-인용자)에 거둥하여 親軍의 練式을 관람했으므로 삼가 기록한다. 이 날 친군영 전영감독 한규직이, 광주에서 조련한 일본식 기예의 신식 군대인 전영병정 500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국왕께서 친히 임석하여 사열하셨다. 500명 군사가 각각 등에 황색 가죽배낭을 메고, 손에는 後膛式 총을 들고 대장의 지휘에 하나인 것같이 따랐다. 그 운동하여 진퇴하는 제식훈련과 공격하여 찌르는 병술훈련이 學成되고 숙련되어 조금도 차질이 없어 일본군사의 기예에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이로써 보건대 강병은 다른 방법이 없고 오직 교련에 있는 것이다. 또 훈련을 시작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이미 기예가 이처럼 告成되었으니 隊長의 열심한 교련이 더욱 가상하다 하겠다(≪漢城旬報≫7호, 1883년 음력 12월 1일, 諭旨恭錄).

이 친군영 전영군대(광주군대)는 개화당에 의해 양성되어 갑신정변의 무력 준비의 하나가 된 것이었다.

둘째, 개화당은 尹雄烈을 1883년 4월에 함경남병사로 임명케 해서 함경남병영이 있는 北靑에서 개화당의 무관인 윤웅렬의 주관 아래 약 500명의 장정을 모집하여 신식 군대를 양성하였다.806)愼鏞廈,<甲申政變의 主體勢力과 開化黨의 北靑·廣州養兵>(≪韓國學報≫95, 1999).
≪漢城旬報≫12호, 1884년 1월 21일,<咸鏡南道兵馬節度使 尹雄烈狀啓>.
윤웅렬이 1883년 3월 17일 함경남병사에 임명된 데에는 김옥균이 관련되어 있었다.807)≪南兵營啓錄≫, 고종 20년 3월 초2일. 또한≪윤치호일기≫에는 윤웅렬의 함경남병영에서의 양병은 김옥균이 나라를 위해 크게 遠慮해서 추진하는 사업이라고 기록했고,808)≪尹致昊日記≫, 1883년 10월 5일. 또한 윤웅렬의 북청양병을 ‘개화와 진보를 위한 큰 기관’809)≪尹致昊日記≫, 1884년 5월 21일.이라고 기록하였다. 윤웅렬의 함경남병사 임명과 500명의 북청양병은 개화당의 계획에 의한 양병이었음이 명백한 것이다.

윤웅렬은 4월 17일 국왕을 알현하고 북청에 도착한 후 5월 24일부터 두 차례에 걸쳐 500명의 장정을 뽑아 신식(서양식) 군사훈련을 실행하였다.810)≪南兵營啓錄≫, 고종 20년 11월 25일 및 12월 29일. 윤웅렬의 500명 북청의 신식 군대양성은 성공적이었다. 윤웅렬은 이를 스스로 평가하여 “技藝를 연습함이 날로 나아가고 隊伍를 이룬 모양이 모두 볼 만한 것이 있다”811)≪南兵營啓錄≫, 고종 20년 12월 29일.고 보고한 정도였다.

함경도 북청에서 개화당의 군대 500명이 창설되어 강력한 신식 군대로 성장하기 시작하자, 민비 수구파는 이것을 매우 위험시하여 본격적 견제를 시작하였다. 수구파 영수 閔台鎬는 배후에서 교사하여 함경관찰사 林翰洙로 하여금 함경남병사 윤웅렬이 인화를 잃었고 가렴주구가 심하다는 이유를 들어 국왕에게 윤웅렬의 파면을 상신케 하였다.812)≪尹致昊日記≫, 1884년 5월 8∼11일.
≪高宗實錄≫, 고종 21년 5월 14일.
이를 받아서 민비 수구파가 지배하는 의정부에서도 윤웅렬의 파면과 정죄를 건의하였다.813)≪高宗實錄≫, 고종 21년 5월 21일. 개화당에서는 왕실의 부마인 박영효를 북청에 내려보내 북청양병의 실태를 직접 시찰케 한 후 북방 변경의 방어를 위해서도 신식 군대가 잘 양성되고 있음을 국왕에게 보고하여 수구파의 공격을 물리쳤다.

민비 수구파에서는 다시 수구파 거물 尹泰駿이 배후에서 교사하여 함경도 지방유생들을 다수 동원해서 윤웅렬이 이 지방 鄕憲碑를 훼손했다는 이유를 들어 윤웅렬의 파면을 청원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게 하였다.814)≪高宗實錄≫, 고종 21년 5월 28일.
≪尹致昊日記≫, 1884년 5월 23·24일.
한편 개화당에서는 박영효를 함경남병영에 파견하여 현지에서도 대책을 수립케 하고,815)≪尹致昊日記≫, 1884년 윤5월 15일. 서울에서는 윤웅렬의 아들 尹致昊가 국왕의 측근에서 출입하면서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아버지 윤웅렬을 옹호하였다.816)≪高宗實錄≫, 고종 21년 윤5월 초5일. 결국 국왕은 수구파들의 윤웅렬 파면요청을 윤허하지 않았다.817)≪尹致昊日記≫, 1884년 윤5월 초2일.

그러나 수구파들도 이 문제에서만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중앙의 관리들을 다수 동원하여 윤웅렬 파면상소를 올리게 하였고,818)≪高宗實錄≫, 고종 21년 윤5월 초10일. 함경도 지방유생들에게도 배후 조종하면서 윤웅렬 파면과 정죄요청의 상소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819)≪高宗實錄≫, 고종 21년 윤5월 초10일 및 6월 초6일. 민비 수구파가 이와 같이 집요하게 윤웅렬 파면운동을 전개한 것은 개화당의 북청양병을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윤융렬의 아들 윤치호가 국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 요인들과 거의 매일 협의해 가면서 국왕에게 수구파들의 윤치호 파면요청의 부당성과 윤웅렬의 양병의 정당성을 국왕 측근에서 매우 잘 설명했기 때문에, 국왕은 수구파의 집요한 윤웅렬 파면요구를 일축하여 거절하고 계속 양병과 북방경비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이에 개화당은 정변 준비의 한 요소도 되는 북청에서의 500명 신식 군대의 양성에 성공하게 되었다. 남은 문제는 어떻게 이 500명 북청군대를 서울로 불러 올려 왕실호위의 임무를 맡기느냐의 과제만 남게 되었다.820) Shin, Yong-Ha, 앞의 글(1993).

셋째, 김옥균 등이 일본의 陸軍戶山學校에 파견해서 유학시킨 사관생도들이었다. 일본에서는 아직 대학급 사관학교는 설립하지 못하고 육군호산학교를 설립하여 서양교관들도 초빙해서 일본 신식 육군의 장교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徐載弼·鄭蘭敎·朴應學·鄭行徵·林殷明·申重模·尹泳觀·李圭完·河應善·李秉虎·申應熙·李建英·鄭鍾振·白樂雲 등 14명을 선발하여 1883년 이른 봄에 일본 육군호산학교에 유학시켰다.821) 金玉均,<甲申日錄>, 1884년 양력 12월 4일(全集, 86쪽). 이들 사관생도의 대표는 서재필이었으며, 김옥균은 일본에 건너갔을 때마다 이 사관생도들을 매주 1회 불러서 자기의 정치적 포부를 설명하고 결속을 다졌다.822) 徐載弼,<回顧甲申政變>(閔泰瑗 著,≪甲申政變과 金玉均≫, 84∼85쪽 참조).

또한 사관생도 신중모도 갑신정변 후 체포되어 심문에 공술할 때, 서양 각국은 모두 독립국가이며 독립국가이어야 다른 나라와 화친할 수 있다. 조선도 독립국가가 되어 서양 여러 나라와 같은 대열에 서야 한다고 김옥균이 말하였다는 것이다.823)≪推案及鞫案≫324책, 大逆不道罪人喜貞等鞫案 중의 申重模供述. 김옥균 등 개화당이 유학시킨 사관생도 14명은 약 1년 6개월의 신식 사관교육을 받았을 때, 정변 단행이 결의된 후인 1884년 6월에 모두 귀국하여 갑신정변의 중요한 무력이 되었다.

넷째, 개화당이 조직한 비밀결사 ‘충의계’의 장사와 군인 장교들이다. 김옥균은 정변을 준비하기 위한 비밀무력조직으로 ‘충의계’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서 신복모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다. ‘충의계’의 결사대원은 장사 30명과 친군영 전영군인 13명 등 43명이었다고 한다.824) 金玉均,<甲申日錄>, 1884년 12월 1일(全集, 72쪽). ‘충의계’에는 13명의 친군영 전영장교들이 가입해 있었기 때문에, 신복모의 지휘하에 친군영 전영은 심지어 민비 수구파 전영사가 임명되었을 때에도 실제로는 개화당이 지휘하는 개화당의 군대였다.

‘충의계’는 죽음을 각오한 계원들의 철저한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당시 민비 수구파들은 ‘충의계’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고, 친군영 전영의 장교들이 ‘충의계’에 가입하여 개화당의 지휘를 받고 있는 사실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이러한 ‘충의계’의 장사와 군인들은 정변의 중요한 무력이 되었다. 김옥균을 지도자로 한 개화당은 1883년 봄부터 정변의 무력 준비로서 광주군대 500명(친군영 전영군대), 북청군대 500명, 사관생도 14명, ‘충의계’ 43명 등 약 1,050명의 개화당의 무력을 양성해 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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