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Ⅴ. 갑신정변
  • 3. 갑신정변의 전개
  • 2) 갑신정변의 준비
  • (3) 북청군대의 상경과 일부 유경

(3) 북청군대의 상경과 일부 유경

개화당은 정변 단행의 결정을 내린 전후에 준비한 정변 무력을 서울에 집중시키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개화당은 1884년 6월 8일(양력 7월 29일) 일본에 유학시킨 서재필 등 14명의 사관생도들을 귀국시켰다.

개화당은 이와 동시에 윤웅렬이 함경남병영에서 양성한 북청군대를 서울로 불러올려 정변 무력으로 사용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옥균이 1884년 6월 19일(양력 8월 9일) 윤치호를 불러 모종의 밀의를 한 후, 윤치호는 바로 궁궐로 들어가 국왕에게 “가친(윤웅렬)이 技藝가 精硏한 병대 100명을 뽑아 상경 입감시킨 뒤 환송시키거나 諸營에 分置코자 하는데 청허하심이 어떠하옵니까”827)≪尹致昊日記≫, 1884년 6월 19일(양력 8월 9일).라고 요청하여 “뽑아 올리게 하라”는 윤허를 받았다. 또 이 자리에서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귀국한 사관생도를 수용하는 일도 건의하였다. 국왕이 북청군대의 선발과 상경을 윤허했으므로 윤치호는 이를 함경남병영의 부친 윤웅렬에게 알렸다.828)≪尹致昊日記≫, 1884년 6월 19·21일.

윤치호가 7월 23일(양력 9월 12일) 입궐했을 때에는 국왕으로부터 ‘장차 너의 아버지를 시켜 北兵(북청군대)을 거느리고 상경케 할 계획이라’829)≪尹致昊日記≫, 1884년 7월 23일.는 말을 들었다. 윤치호는 이튿날 북청의 윤웅렬에게 긴급히 소식을 알리고, 김옥균을 방문해 보고하면서 이 날 밤에는 김옥균의 집에서 잤다.830)≪尹致昊日記≫, 1884년 7월 24일. 국왕이 북청군대의 상경을 결정한 약속을 지키자 김옥균과 윤치호는 상당히 흥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왕은 나흘 뒤인 7월 27일 윤웅렬을 摠戎中軍에 임명하여,831)≪承政院日記≫, 고종 21년(1884년) 음력 7월 27일. 친군영 전영 正領官의 직책을 주고, 함경남병영에서 새로 조련한 북청군대를 상번시키도록 인솔하여 상경할 것을 명령하였다.832)≪承政院日記≫, 고종 21년 7월 27일.
≪漢城旬報≫34호, 1884년 8월 초1일,<諭旨恭錄>.
마침내 북청군대 상경의 국왕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국왕에게 예궐했다가 이 명령을 받은 윤치호는 흥분하여 그 길로 김옥균의 집으로 달려가서 보고하고 또 하룻밤을 김옥균의 집에서 묵으며 밀의하였다.833)≪尹致昊日記≫, 1884년 7월 27일.

윤웅렬은 마침내 470명의 북청군대를 인솔하고 1884년 9월 5일(양력 10월 23일) 서울에 도착하여 우선 친군영 전영에다 주둔시켰다.834)≪尹致昊日記≫, 1884년 9월 5일. 드디어 개화당은 북청군대를 양성하여 서울로 데려오는 지난한 일까지 성공한 것이었다. 국왕은 9월 10일에는 북청군대의 군사훈련을 친히 관람하고 그 씩씩함에 칭찬과 경탄을 마지않았고 윤웅렬의 노고를 치하하였다.835)≪尹致昊日記≫, 1884년 9월 10일. 여기까지는 김옥균 등 개화당이 크게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위기감을 느낀 수구파들은 북청군대를 모두 돌려보내고 빼앗기 위한 반격활동을 비밀리에 맹렬히 전개하였다. 실제로 수구파들은 민비를 배경으로 하여 이 무렵 공식적으로는 이미 중앙의 군사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민비 수구파의 활동에 의해 국왕은 1884년 8월 26일 친군영의 전영·후영 2영을 전·후·좌·우의 4영으로 확충 개편하고 종래 지휘관의 명칭인 ‘監督’을 ‘營使’로 바꿈과 동시에 ‘군무당상’까지 겸하게 하고, 전영사에 韓圭稷, 후영사에 尹泰駿, 좌영사에 李祖淵, 우영사에 閔泳翊을 임명하여 군권을 모두 민비 수구파가 지휘하도록 하였다.836)≪高宗實錄≫, 고종 21년 8월 26일. 정계의 실권은 민비를 정점으로 하여 閔台鎬·閔泳穆·閔泳翊·閔泳韶·閔應植 등 5閔과 이에 야합한 이조연·한규직·윤태준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개화당으로서 1884년 봄 이후 기용된 경우는 우정국 총판에 洪英植(3월), 승정원 동부승지에 徐光範(6월), 귀국한 사관생도장 徐載弼이 조련국 士官長(6월)에 임명된 정도였다. 민비 수구파들은 이와 같이 군권에 이르기까지 실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북청군대를 돌려보내기 위해 국왕의 신임이 매우 두터우며 개화당에 가담해 있던 환관 柳在賢을 포섭하였다. 유재현은 당시까지 개화당의 요인의 하나로서 김옥균·윤치호와 긴밀한 연락을 하고 있던 인사였다.837)≪尹致昊日記≫, 1884년 7월 28일. 그러나 유재현이 수구파의 공작으로 그 사이에 결국 변절하여 한규직에게 조종당해서 국왕에게 “지방의 軍心은 측량하기 어렵고 또 들으니 윤웅렬은 총 메고 탄알 장전하고 있다고 하는데 윤치호가 내응한다면 일이 매우 염려되니 북병의 조련을 보지 않음만 같지 못하다”838)≪尹致昊日記≫, 1884년 9월 11일.고 마치 북청군대·윤웅렬·윤치호의 국왕 암살 가능성까지 망상하면서 모략 참소하였다.≪윤치호일기≫에서는 이것이 한규직(친군영 전영사)·이조연(친군영 좌영사)·윤태준(친군영 후영사)·민영익(친군영 우영사) 등 4영사가 비밀리에 작간하여 개화당과 윤웅렬의 진로를 저지하려고 배후 조종한 것이라고 하였다.

국왕은 처음에는 환관 유재현과 수구파의 참소를 무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왕은 북청군대 중에서 성적이 우수한 70명을 선발하여 모두 武科를 내리고 상을 주었다.839)≪尹致昊日記≫, 1884년 9월 14일.

그러나 수구파의 참소와 특히 신임하는 환관 유재현이 매일 시종하면서 모략하고 설득하므로 국왕은 마침내 동요하게 되었다. 국왕은 9월 15일 명령하기를 “前南兵營 병정들이 모두가 오래 주둔하는 것은 심히 민망한 일이므로 그들을 輪回하여 상번시켜라”840)≪高宗實錄≫, 고종 21년 9월 15일.는 전교를 내리었다. 이것은 상경한 470명의 북청군대 중에서 일부만 서울에 남게 하고 일부는 북청으로 돌려보내 교대로 상번케 하라는 명령이었다. 국왕의 이 명령은 개화당에게 매우 큰 타격을 준 명령이었다.

개화당은 천신만고 끝에 북청에서 군대를 양성하여 470명을 서울로 불러올렸는데 국왕이 갑자기 일부만 서울에 남게 하고 북청으로 돌려보내라니, 정변의 무력 준비에 결정적 차질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개화당 중에서도 윤웅렬은 매우 당황하였다. 국왕의 교대 상번명령이 내려진 이튿날인 9월 16일 윤웅렬은 아들 윤치호를 불러 밀의한 결과, 국왕의 정변 지지가 확고하지 못한 상태에서 김옥균 개화당의 급진정변은 시기상조이며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데 합의하였다.841)≪尹致昊日記≫, 1884년 9월 16일. 이에 윤웅렬은 9월 17일 서울에 데려온 470명의 북청군대 중에서 70명만 서울에 남겨 놓고 무려 400명을 북청으로 돌려보냈다.842)≪尹致昊日記≫, 1884년 9월 17일. 250명만 북청으로 돌려보내도 될 것을 윤웅렬이 400명이나 돌려보낸 것은 정변의 실패를 내다보고 보신을 위해 정변 준비에서 발을 빼기 시작한 것을 시사하는 것이었다.843)≪尹致昊日記≫, 1884년 10월 10일.
뿐만 아니라 尹雄烈은 정변 1주일 전에 親軍營前營 正領官 직책을 스스로 자퇴하였으므로 前營使 韓圭稷이 이를 수리하였다.
≪尹致昊日記≫, 1884년 10월 21일에는 정변 도중에 開化黨이 尹雄烈부자를 배신자로 간주하여 처단하려 하다가 尹致昊가 미국공사관 主事로 근무하고 있음을 참작하여 보류했었다고 高宗이 尹致昊에게 말해주고 있다.

김옥균 개화당은 동지라고 믿었던 환관 유재현에게 배신당하여 470명의 북청군대의 절반 이상을 잃게 되고, 이어서 윤웅렬의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70명만을 서울에서 갖게 되었다.844)柳在賢은 정변 직후 北靑軍隊를 돌려보내도록 참소한 배신자로 지목되어 徐載弼에 의해 정변 현장에서 斬殺되었다. 국왕으로부터 무과 합격자와 동일한 자격을 인정받고 상을 받은 북청군대의 성적 우수한 정예가 70명이었는데, 이들을 서울에 남게 한 것으로 보인다.

개화당이 500명의 북청군대를 양성하여 그 중 470명을 서울까지 데려오는데 성공해 놓고서도, 유재현의 배신과 윤웅렬의 이탈로 마지막 순간에 400명을 돌려보내고 70명의 북청군대만을 정변에 활용하게 된 사실은 국왕을 둘러싼 신임 경쟁에서 수구파가 승리하고 개화당이 패배했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개화당은 70명의 북청군대 최정예 군인을 정변에 투입했으므로 북청군대 양성이 완전히 무위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 남게 된 북청군대 70명이 어디에 배속되었는지 기록상으로는 명료하지 않다. 친군영 후영을 신설하라는 국왕의 명령이 정변 얼마 전인 7월 22일 처음 나왔고, 갑신정변 도중에 후영 병정이 정변을 수호하기 위한 外衛를 담당했으며,845)≪尹致昊日記≫, 1884년 10월 17일. 북청군대의 보호와 상경에 깊숙히 관여하여 북청 남병영에 두 번이나 내려갔던 박영효가 정변 도중에 친군영 전영사 겸 후영사가 되어 이를 지휘한 것을 보면,846)<甲申日錄>, 1884년 양력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이 70명의 북청군대는 친군영 후영에 배속된 것으로 보인다. 박영효는 그 후 회고담에서 개화당이 준비한 무력이 친군영 전·후영 1,000명이라고 하였다.847) 朴泳孝,≪東亞日報≫, 1930년 1월 5일,<韓末政客의 回顧談>. 당시 1영의 병력은 500명이었다.

개화당은 친군영 전영 500명 전원을 스스로 양성하여 완전히 장악하였고, 친군영 후영 500명은 그 중 70명의 북청군대를 양성하여 이를 중핵으로 하고 신설 편입한 430명의 다른 조선군을 장악해서 합하여 지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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