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Ⅴ. 갑신정변
  • 3. 갑신정변의 전개
  • 2) 갑신정변의 준비
  • (4) 일본공사관 호위용 일본군의 차병

(4) 일본공사관 호위용 일본군의 차병

개화당이 정변 단행을 결정하여 정변 준비에 박차를 가한 약 1개월여 후인 1884년 9월 12일 그 동안 일본에 장기휴가를 갔던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郎)가 서울에 귀임하였다. 다케조에는 이전에는 김옥균 등 개화당에 매우 적대적이었으며, 민비 수구파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다케조에는 서울에 귀임하자마자 종래의 태도를 정반대로 바꾸어 친청사대 수구파와 청국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김옥균 등 개화당에게 호의를 보였다. 김옥균이 다케조에에게 “그대의 이유없는 의심으로 우리의 大計가 모두 실패했다”고 낱낱이 설파하며 비판해도, 다케조에는 일국의 정략은 수시 응변하는 것이라고 호의적으로 응답하며 앞으로는 귀측의 ‘개혁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접근해 왔다.848)<甲申日錄>, 1884년 10월 31일(全集, 33쪽).

김옥균은 처음에는 다케조에의 접근과 약속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수신사 박영효와 함께 김옥균이 1882년 일본에 갔을 때 일본정부는 여러 가지 호의를 보이며 조선국왕의 國債委任狀을 가져오면 300만 엔의 차관을 빌려 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김옥균이 귀국하여 국왕의 국채위임장을 받아 갖고 1882년 7월 다시 일본에 갔더니 몇 달 사이에 일본정부의 정책과 태도는 바뀌어 이를 거절하고 이노우에(井上馨)는 김옥균을 냉대하였다. 일본정부는 자기 나라의 군비확장에만 총력을 기울일 뿐 조선 개화당과의 약속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김옥균은 조선국왕의 국채위임장을 갖고 일본주재 미국공사관과 영국공사관을 통하여 세관수입을 담보로 미·영금융기관으로부터라도 개혁자금으로 사용할 차관을 빌리려고 접촉했더니, 1883년 12월부터 본국에 장기휴가로 와 있던 다케조에가 김옥균의 국채위임장을 위조품이라고 중상하고 방해하여 모두 실패했었다.849)<甲申日錄>, 前文. 김옥균이 1884년 3월 빈손으로 완전실패하여 귀국하자 민비 수구파는 더욱 기세등등하여 개화당을 핍박하였다. 다케조에가 갑자기 적극적으로 태도를 바꾸어 접근해 오더라도 김옥균은 이를 신뢰할 수 없어서 박영효에게 다케조에를 만나 보도록 하였다.

다케조에는 박영효에게 “청국이 장차 망할 것이니 귀국의 개혁지사들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850)<甲申日錄>, 1884년 11월 1일(全集, 36쪽).고 더욱 적극적으로 접근하였다. 일본공사의 이러한 태도 변화의 배경에는 일본정부의 정책변화가 있었다. 일본에서 이전에 정한론자였던 고토(後藤象次郎) 등의 自由黨은 청국과 프랑스가 갈등하는 시기에 일본은 조선에서 개화당을 지원하여 청국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자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1884년 8월에 안남문제로 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가 이 정책을 채택하여 정책전환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노우에는 다케조에의 서울 귀임을 독촉하면서, 이번에는 서울에서 청국에 대항하는 개화당을 지원하라고 지시하였다.

다케조에는 9월 15일(양력 11월 2일) 입궐하여 국왕 알현 때에는 ‘제물포조약’에서 정한 임오군란 때의 ‘손해배상금’ 잔액 40만 원을 환납하는 호의를 보이면서, 조선의 내정개혁 자금으로 전용해 달라는 일본정부의 의사를 상주하였다. 또 국왕에게 국제정세를 설명하면서 이번 청·불전쟁에서는 청국이 반드시 패배할 것이니 이 기회에 조선은 국정개혁을 실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상주하였다. 다케조에는 이튿날 일본공사관에서 연회를 열고는 참석한 청국영사 陳樹棠을 외교관들과 귀빈들 면전에서 ‘무골해삼’이라고 모욕하는 경망스러운 언동을 하여 참석자들을 아연실색케 하였다.851)<甲申日錄>, 1884년 11월 2일(全集, 38쪽). 또한 그는 수구파 거물 윤태준의 면전에서 그와 친청 수구파 거물들을 매도하기도 하였다.

개화당은 9월 17일 밤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등이 모여서 일본측의 정책·태도변화를 면밀히 검토해 보고, 일본의 개화당 지원으로의 정책전환이 사실이면 이를 수용하여 활용하기로 합의해서, 우선 시마무라(島村久)공사대리를 박영효의 집으로 불러 일본의 정책을 상세히 들었다. 이어서 9월 20일(양력 11월 7일)에는 바둑대회를 구실로 김옥균과 다케조에가 직접 만나 조선 개화당이 거사를 하는 경우에 일본의 지원을 받아 들이기로 합의하였다.852)<甲申日錄>, 1884년 11월 7일(全集, 42쪽). 다케조에가 서울에 귀임한 지 8일 만에 조선 개화당과 주한일본공사관이 결탁한 것이었다.

김옥균 등 개화당이 일본측으로부터 지원받으려 한 것은 주한일본공사관 호위병으로 와 있는 일본군 150명과 약간의 자금이었다. 개화당의 전략전술로서는 정변에 일본군을 끌어들여 국왕 호위의 임무를 주면, 남방에서 청·불전쟁을 하고 있는 청국으로서는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1,500명의 청군으로 조선국왕 호위 중의 일본군을 공격해서 청·일전쟁이나 청·일충돌을 일으킬 수 없게 되어, ‘以夷制夷’로서 외세 청군은 외세 일본군으로 방어하고 국내 수구파는 국내 개화당이 맡는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개화당은 청군과 수구파에 대항키 위해 다시 1,050명의 조선군을 비밀리에 장악했으니 정변은 이 기회를 활용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옥균과 다케조에는 10월 8일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에 합의하였다.

① 김옥균이 일본군(공사관 호위병 150명)을 국왕 호위에 투입하고자 하는데 결정 후 變作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고 한 데 대하여, 다케조에는 호위 요청의 국왕 친서가 있으면 투입하겠다고 합의했다. 친서 전달자는 박영효로 하기로 내약하였다. 다케조에는 청군 1,000명이 공격해 들어와도 일본군 1개 중대가 북악에 의거하면 2주간, 남산에 의거하면 2개월간 수비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② 김옥균이 약간의 자금차용을 제의한 데 대하여, 다케조에는 ‘300만원’의 대출 공급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김옥균이 수백만원은 불요하고 수십만원의 차용이면 당장은 족하다고 하니, 다케조에는 그 정도는 재한일본상인으로부터라도 당장 현금으로 공급할 수 있다고 하였다.

 (<甲申日錄>, 1884년 11월 25일, 全集, 58∼63쪽)

또한 김옥균은 일본군의 역할은 청군에 대항하여 국왕을 호위하는 일뿐이요, 개화당이 조선 내정이나 수구파 처리문제를 담당한다고 하여 일본공사의 합의를 얻었다.853)<甲申日錄>, 1884년 11월 25일(全集, 62쪽). 정변 후의 일본측의 만일의 간섭에 대한 예비를 위한 것이었다.

개화당과 주한일본공사관이 결탁한 후 개화당은 이를 비밀리에 하려고 노력했지만,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경솔경망한 자로서 기회있을 때마다 청국측과 수구파를 매도하여 긴장을 조성하고 다녔다. 심지어 9월 24일(양력 11월 11일) 밤에는 조선정부에 아무런 사전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일본군이 남산 밑에서 포성을 울리게 야간 비상훈련을 실시하여 조선조정·서울시민·청군측을 모두 놀라게 하였다.854)<甲申日錄>, 1884년 11월 12일(全集, 44쪽). 국왕의 조사명령을 받은 김옥균이 다케조에를 힐문했더니, 다케조에는 “청국인과 조선인이 놀랐다니 의외이다”고 하면서 야간 비상훈련은 사전 보고가 어렵다고 방자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청군측은 그 이후 긴장하여 원세개의 지휘하에 야간에도 군장을 하고 취침시키는 등 경계를 더욱 강화하고 비상 전투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서울 시내에서는 일본군과 청군의 대립과 긴장이 더욱 격화되었다. 개화파로서는 거사를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도록 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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