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Ⅴ. 갑신정변
  • 3. 갑신정변의 전개
  • 3) 개화정권의 수립
  • (2) 신정부의 수립

(2) 신정부의 수립

개화당은 이어서 이튿날인 10월 18일 이른 아침까지에 걸쳐 국왕에게 품하여 신정부의 수립에 착수하였다. 여러 단계의 인사발령이 있었으나,863) 李光麟, 앞의 책(1973), 160∼164쪽. 최종적인 신정부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領議政:李載元(국왕의 종형)

左議政:洪英植

前後營使兼左捕將:朴泳孝

左右營使兼代理外務督辦·右捕將:徐光範

左贊成兼右參贊:李載冕(대원군의 嗣子)

吏曹判書兼弘文館提學:申箕善

禮曹判書:金允植

兵曹判書:李載完(李載元의 아우)

刑曹判書:尹雄烈

工曹判書:洪淳馨(왕대비의 조카)

漢城判尹:金弘集

判義禁:趙敬夏(대왕대비의 조카)

藝文館提學:李建昌

戶曹參判:金玉均

兵曹參判兼正領官:徐載弼

都承旨:朴泳敎

同副承旨:趙同冕(대왕대비의 종손)

同義禁:閔肯植

兵曹參議:金文絃(順和宮의 아우)

平安監司:李載純(대원군의 至親)

水原留守:李熙善

說書:趙漢國(대원군의 외손)

洗馬:李埈鎔(대원군의 손자 즉 李載冕의 아들)

 (<甲申日錄>, 1884년 12월 4일, 全集, 89∼91쪽)

신정부의 조직구성을 보면, 개화당과 국왕 종친(특히 대원군계열)의 연립내각임을 알 수 있다. 신정부의 공식 수반인 영의정에는 대원군의 친조카이며 국왕의 사촌인 이재원을 추대하여 왕실과 종친을 높이고, 개화당의 대표로는 홍영식을 신정부의 공식 차석인 좌의정에 임명하였다. 대원군계열의 종친과 왕실에서는 그 밖에 李載冕·李載完·李載純·李埈鎔 등을 입각시키고, 척족으로서는 민비 일파에게서 홀대 받던 인물들을 포용하여 왕실에 호의를 보였다.

개화당의 직책 분담으로는 대표로서 좌의정 홍영식 이외에, 김옥균이 판서 없는 호조참판에 임명되어 재정을 장악하였다. 박영효는 무력의 핵심인 군사권과 경찰권을 맡았다. 서광범은 외교를 담당하고 군사권과 경찰권을 보조적으로 담당하게 하였다. 서재필에게는 군사권을 맡겨 박영효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朴泳敎에게는 국왕의 도승지를 담당케 하여 국왕 시종의 책임을 맡겼다.864)<甲申日錄>에 의하면 무관 尹雄烈에게는 刑曹判書를 맡겼다. 개화파 군대를 양성한 尹雄烈에게 軍權을 맡기지 않은 것은 갑신정변 직전에 北靑軍隊의 과다한 還送과 친군영 전영 正領官 사임으로 개화당의 신임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개화당에 동조할 수 있다고 본 당시의 온건개화파로는 金允植·金弘集·申箕善·李建昌 등을 기용하였다.

개화당 요인들이 정치·재정·군사·외교·국왕 비서실의 실권을 장악하고, 신정부의 수반과 다른 부서에는 대원군계열 종친들을 임명했으며, 내무·학예 직책에는 온건개화파를 포용한 연합정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김옥균이었음은 물론이다. 김옥균이 권력을 탐하여 정변을 일으켰다는 모함을 차단하기 위해 이전에 김옥균이 맡았던 적이 있는 ‘戶曹參判’을 맡은 것이었다.865)≪高宗實錄≫, 고종 20년 10월 초7일 特擢金玉均爲戶曹參判 참조. 그러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모든 국가 재정을 호조로 통일한 그 호조의 ‘판서’는 임명하지 않고 공석으로 두어 사실상 ‘참판’이 판서의 일을 하도록 배치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화당은 신정부수립 직후 11월 18일 오전 8시에 미국공사·영국총영사·독일총영사에게 친군영 전영의 병정 각 30명씩을 보내어 그들을 보호해 오게 하여 국왕을 알현시켰다. 국왕은 각국 외교사절들에게 신정부의 수립과 대개혁정치의 실시를 알렸다. 국왕의 질문에 외국 공·영사들은 “세계 모든 나라에는 다 크고 작은 변동이 있고 그렇게 해서 온전한 판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라”866)≪尹致昊日記≫, 1884년 10월 18일.는 요지의 상주를 하고 정변에 승복했으며, 다만 외국인을 보호해 줄 것을 간청하고 물러갔다.867) 金玉均,<甲申日錄>, 1884년 12월 5일(全集, 91∼92쪽). 개화당의 이러한 절차 시행은 신정부의 수립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개화당의 정변에 당황한 袁世凱 지휘하의 청군측은 11월 18일 아침 개화당 지지자로 위장한 경기관찰사 沈相薰을 경우궁으로 들여보내어 민비의 밥사발 밑에 서찰을 감추어서 청군과 민비 사이의 연락에 성공하였다.868) 朴泳孝,<吾等一生の失策>(≪古筠≫창간호, 15쪽 참조). 민비는 이에 신정부가 자기세력을 적으로 하고 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으며, 경우궁은 좁은 관계로 청군이 공세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데는 지형상 분리하므로 넓은 창덕궁으로의 국왕을 환궁하도록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민비는 청군을 돕기 위한 내심으로 경우궁은 너무 좁아 불편하다고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창덕궁은 너무 넓어서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서는 방어에 극히 불리한 곳이었다.

김옥균 등은 이에 11월 18일 오전 10시경에 경우궁 옆의 이재원이 살고 있는 桂洞宮으로 국왕과 왕비의 거처를 옮기었다. 이 곳은 경우궁보다는 넓으나 약간 고지여서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도 방어가 유리한 곳이었다. 민비는 계동궁이 꽤 넓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좁다고 다시 창덕궁으로 환궁하자고 요청했다. 국왕은 내용도 모른 채 민비를 지지하였다. 김옥균은 이를 거절하고, 다케조에에게도 창덕궁은 방어가 어려우니 국왕이나 왕비의 분부가 있더라도 계동궁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으며, 국왕과 왕비에게는 이틀 만 더 기다리면 모든 일이 정리되어 환궁하게 될 것이라고 아뢰었다.

김옥균이 잠시 계책을 의논할 것이 있어서 홍영식 및 이재원과 함께 외청에 나간 사이에 국왕은 갑자기 다케조에를 불러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간절히 말하니, 다케조에는 준비하여 1시간 후에 환궁케 하겠다고 아뢰었다. 김옥균이 그 말을 듣고 달려와 다케조에를 꾸짖으니, 다케조에는 수비는 일본군이 한결같이 잘할 것이니 걱정말라고 큰 소리를 쳤다. 국왕도 다케조에의 허락을 얻었다고 매우 기뻐하며 김옥균을 나무라니 어찌 할 수 없었다. 김옥균 등 개화당은 할 수 없이 국왕과 왕비 등을 모시고 11월 18일 오후 5시에 창덕궁으로 환궁하였다.

개화당은 경우궁에서와 마찬가지로 국왕을 중심으로 하여 내위는 약 50명의 개화파 장사들과 사관생도들이 맡도록 하고, 중위는 150명의 일본군에게 맡겼으며, 외위는 약 1,000명의 친군영 전영과 후영의 조선군이 담당하도록 배치하였다.869)<甲申日錄>, 1884년 12월 5일(全集, 94쪽). 이 날 밤에는 창덕궁 대궐문을 잠그려 하는데 청군의 吳兆有진영에서 병정을 보내어 宣仁門을 잠그지 못하도록 방해한 사건이 있었을 뿐 큰 사건 없이 넘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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