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Ⅴ. 갑신정변
  • 4. 갑신정변의 영향과 의의
  • 1) 갑신정변의 영향
  • (2) 개화당의 몰락과 숙청

(2) 개화당의 몰락과 숙청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친청적 수구파 대신들이 임명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바로 개화당 요인들에 대한 추적과 살해·숙청이 가혹하게 시작되었다.

앞에서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갑신정변의 주도세력인 개화당 요인 중에서 국왕을 청군진영에 모셔 보내는데 호종한 홍영식·박영교·신복모 등 개화당 요인과 사관생도 출신 중심의 박응학·정행징·윤영관·하응선·이병호·이건영·백낙운 등 개화당 장사 7명은 국왕 인계 직후 재판도 없이 청군에 의해 10월 28일(양력 12월 6일) 밤 참살당하였다.899) 李光麟,≪開化黨硏究≫, 175쪽 참조.

또한 재집권한 친청 수구파정권은 10월 21일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을 ‘4凶’으로 규정하고, 외무독판 조병호와 협판 묄렌도르프 및 仁川監理 洪淳學에 명하여 일본망명차 인천에 가 있는 4흉을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묄렌도르프는 김옥균에게 사적 증오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1대의 기마병대를 인솔하고 신속하게 김옥균 등을 인천까지 추격했으나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과 변수·유혁로·이규완·정난교·신응희 등 9명은 이미 천세환에 승선한 이후였다.

묄렌도르프는 다케조에에게 김옥균·박영효 등은 조선왕국의 역적으로 규정되어 체포하러 왔으니 즉각 하선시켜 인도하지 않으면 중대한 국제문제가 될 것이라고 강경하게 개화당 9명의 인도를 요구하였다. 다케조에에는 비열하게도 김옥균 일행의 하선을 요구했다. 이것은 바로 김옥균 등 9명의 참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케조에의 비겁성과 배신으로 김옥균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 때, 천세환 선장이 나서서 묄렌도르프에게 선박 안의 모든 것은 선장의 책임과 지휘를 따르는 것인데, 자기 배에는 김옥균 등과 같은 조선인은 승선하지 않았다고 일축하였으므로 김옥균 등 개화당 요인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일본으로 망명하였다.900)≪承政院日記≫, 고종 21년 10월 24일.
≪高宗實錄≫, 고종 21년 10월 24일.

재집권한 친청 수구파정부의 잔존한 개화당들에 대한 추적은 가열하여, 1884년 말까지 李喜貞·金奉均·申重模·李倉奎·李允相·吳昌模·徐載昌·車弘植·南興喆·高興宗·李點乭·崔英植 등 12명이 곧 체포되어 가혹한 국문을 받고 처형되었다.901)≪推案及鞫案≫, 大逆不道罪人喜貞等鞫案(亞細亞文化社 영인판 30책).
李光麟, 앞의 책 176쪽.
수구파정부는 1886년에도 개화파 잔당이라고 하여 尹景純·李應浩·全興龍·尹啓完·全昌基·閔昌洙·崔聖郁·李相祿·申興模·李禹石 등을 체포하여 잔혹한 고문을 가하면서 조사한 후 처형하였다.902)≪推案及鞫案≫326책, 謀反大逆不道罪人景純等鞫案.
李光麟, 위의 책, 177∼178쪽 참조.
갑신정변 실패 후 재집권한 친청 수구파정권이 개화당이라고 하여 처형한 희생자 수는 약 100여 명으로 추산되었다.903) 李光麟, 위의 책, 181쪽 참조.

갑신정변 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편집한≪甲申事略≫의 부록에서는 갑신정변으로 인한 사망자 수에 대해 수구당 요인이 민태호·조영하 등 7인, 개화당 요인이 홍영식·박영교 등 9인, 조선군 전사자 38명, 조선인 피해백성 88인, 조선인 피해여인 7명 등 조선인 사망자를 모두 149명으로 들었다. 한편 중국인 사망자는 10명, 일본인 피해자는 사망자 35명, 행방불명 3명 등 38명이라고 하였다.904)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編,≪甲申事略≫, 附錄 死亡者 人名錄.
李光麟, 위의 책, 174∼175쪽 참조.

수구파정부는 행방불명된 李寅鍾·李圭完·黃龍澤·崔殷童·高永石·朴齊絅·朴三龍·劉鴻基·白學鎭·李熙德·雲伊·李殷鍾·張明煥·浪昌寬·張聖寬·車壽鉉·申錫模·任鎭奎 등에 대해서는 체포령을 내려 계속 추적케 하였다.905)≪備邊司謄錄≫, 고종 22년 12월 22일 참조. 갑신정변 실패의 영향으로 개화당 가담자들은 국내에서 처참하게 몰락하여 친청 수구파정권과 청군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당하였다. 국민들과 진신들 사이에도 이제는 신변안전을 생각하여 감히 ‘開化’를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나라의 개화정책은 자연히 침체하게 되었다.906) 朴殷植,≪韓國痛史≫(≪朴殷植全書≫, 98∼10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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