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개요

 20세기 초에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던 申采浩는 한일합병 직전인 1910년 2월에「20세기 新國民」이라는 글에서 “한국이 수천년 이래로 반도내에 偃仰(한가하게 지냄-인용자)하여, 단지 右便에 支那가 有하며 左便에 일본이 有한 줄만 知하다가, 수십 년 전부터 홀연 세계적 국가가 되어 列國競爭場에 入하였다가, 淸日戰役에 一變하며 露日戰役에 再變하여, 드디어 금일 면목을 作하였나니, 盖 한국이 如斯히 不振不立하고 一敗再敗함은(하략)”이라고 하여, 개항에서 한일합병까지의 역사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경계로 하여 세 시기로 구분하였다. 개항기의 역사가 ‘국제관계에 편입되어 열국경쟁의 마당에 섬’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의 대응의 좌절’로 특징화되고 있다. 국권회복운동의 최전선에서 민족운동을 실천한 변혁지향적 지식인의 현실인식·현실파악에서 가장 중요시되었던 것은, 권력정치적 국제질서와 그것에의 한국 민족의 대응이었다.

 1876년의 開港은 한국의 역사를 질적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되었다. 이전의 한국역사는, 외부의 영향 특히 동아시아 질서의 규정·제약을 크게 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 규정·제약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었고, 기본적으로는 한국사회 내부 모순의 갈등·대립에 의하여 전개된 自己完結의 역사였다.

 그러나 개항 이후의 한국역사는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 것이었기 때문에 종래의 자기완결성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항자체는 일본에 대한 것으로서, 일방적인 치외법권의 설정, 일방적인 영토주권의 침해, 일방적인 영해주권의 침해, 관세자주권·관세의 전면적 부정, 일본화폐의 유통권과 조선화폐의 運出權 등을 자유무역의 이름 밑에서 강요한 불평등조약이었다는 점에서 일본에 대한 종속이었다.

 그러나 그 자유무역의 내용구성이 1882년까지만 보더라도 한국에의 수입품의 88.3%는 유럽·미국의 제품이었고 그 유럽·미국제품의 78.2%가 織物이었으며, 일본제품은 11.7%에 불과하였다. 한국으로부터의 수출품은 쌀(30%)·콩(10.9%)·금(19%) 등이었다.

 위와 같은 무역의 담당자로서의 일본은 유럽·미국 산업자본을 위하여 그 시장을 개척해 준 셈이며 스스로는 중개무역을 한국인에게 사기·폭력의 방법으로 전개함으로써, 그리고 한국의 쌀을 싼 값으로 사가서 일본 노동자의 저임금을 위한 식량으로 삼고 자국의 쌀을 국제시장에 높은 값으로 파는 쌀의 이중교역을 전개함으로써 본원적 자본축적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에 대한 한국의 개항은 구미 선진자본주의를 중심국으로 하는 세계 자본주의체제에의 일본을 매개로 한 종속이었다. 때문에 1875년의 강화도사건 후 일본이 한국에 全權을 파견하는 것을 일본주재의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공사 등이 지지하였으며 주일 미국공사 빙함(Bingham)은 副全權으로서 한국에 가는 井上馨에게 테일러(B.Taylor)가 지은「페리의 일본원정소사」를 기증함으로써 미국에 의한 일본의 강제 개국을 참고할 것을 시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성과 구미 선진자본주의에 대한 종속성이라는 양면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일본을 매개로 한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한국에 대한 규정·강요의 질은 외견상 자기와 닮은 모습으로 한국이 변혁할 것을 강제하는 내용의 것이었다. 이러한 ‘변혁의 강제’가 개항 이후 한국이 부닥치게 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조건이었다. 그것은 환상의 영역 밖에서는 피할 수 없는 객관적 조건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객관적인 조건은 객관적이란 말 그대로 한국사의 밖에 外在하는 것이었지만, 근대 자본주의 침략의 본질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외재적인 동시에 한국사에 內在化하는 내재적 조건으로도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객관적 조건이 아무런 매개 없이 한국사에 직접적으로 내재화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사회 내부 모순의 전개에 매개되어서 한국사에 내재화하게 된다. 따라서 개항 이후의 한국사의 전개는 극히 복잡한 관계로서 착종하게 된다.

 이러한 복잡성·착종성을 더욱 증폭시킨 것은 淸의 한국진출이었다. 淸은 개항이후 특히 1882년의 壬午軍亂 이후 전통적인 事大藩屬關係에 더하여 國權主義的으로 한국에 진출함으로써, 한국의 세계자본주의체제 즉 권력정치적인 국제질서에의 대응을 더욱 어렵고도 복잡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淸은 자국의 자본주의적 성숙의 저수준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침투력의 취약성을, 종래의 事大藩屬關係를 근대적 성격의 정치적 지배력의 강화로, 바꾸어 말하면 국권주의적으로 보완하려고 하였다. 1882년의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은 청의 실질적인 조선지배 책동을 여실히 들어낸 것으로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명문화하여「청이 속방을 우대하는 뜻에서 맺은 것으로 각국과 더불어 일체 균점하는 예를 갖지 못한다」고 못박음으로써 종속관계를 기초로 한 독점적 특권을 규정하였다. 즉 영사재판권, 한성개잔, 내지채판권, 저관세율, 조선연해어채권 및 연해운항순시권, 의주·회령육로통상권 등 외교적 경제적 특권을 강제로 인정시킨 것이 그것이다. 이 통상장정은 종래의 종속관계원칙을 기본내용으로 하고 거기에 서양식 조문을 나열한 것에 불과하여 종속관계의 文證이 되었음과 아울러 청이 조선경제문제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었다. 그리고 1885년 10월에 총리교섭통상사의로 조선에 온 袁世凱는 조선에 주차관으로 부임한 이래 약 10년간(1885∼1894) 청의 대조선적극책에 편승하여 이홍장이 입안한 정책을 충실히 실행하며 조선의 국정을 간섭하였다. 그는「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직함을 띠고 총판조선상무 진수당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왔으므로 외국공사와 같은 외교사절이 아니었고 겉으로는 통상교섭을 전담하는 직무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종주국의 대표로서 조선의 일체 정령을 감독하는 임무였다. 천진조약에 따라 청·일 양군이 모두 철수한 뒤 국제관계의 미묘한 정황 속에서 조선의 정치·외교간섭은 물론이고 청국상인의 보호·장려 등 대조선경제정책의 중임까지도 감당해야 하였음은 비록 영·러의 각축으로 인하여 청의 종주권행사가 다소 용이하였다고는 하나 그 임무는 막중한 것이었다. 이홍장은 원세개가 조선의 조신들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으며 임오·갑신의 정변을 겪는 동안의 그의 수단과 기민한 활동을 익히 보았으므로 그에게 조선 경영을 일임하게 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홍장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원세개는 위협과 힐책으로 조선내정에 간섭하여 속칭 ‘袁大人’으로 불리면서 ‘監國大臣’ ‘朝鮮之王’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위에서와 같은 조선의 대외관계에서의 불평등성은 1882년의 朝美條約, 1883년의 제2차 朝英條約 등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조미조약에는 最惠國待遇 조항이 포함됨으로써 이후 서구열강이 조선에서 동일한 이권을 모두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조영조약에서는 개항장에서의 토지·가옥의 임차·구매 및 주택·창고·공장의 설립까지 허용되어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본이 자유롭게 침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조영조약 체결의 당사자인 파크스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었다”라고 만족하는 정도였다.

 그 후 독일(1883), 러시아(1884), 이탈리아(1884), 프랑스(1886), 오스트리아(1892) 등과 차례로 체결된 조약에서도 이러한 불평등조항들은 어김없이 삽입되었다. 조선의 반식민지적 상태를 제도적으로 조건짓는 불평등조약체제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한국은 이러한 불평등조약체제라는 형식을 통하여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일환에 위치되었다. 세계자본주의체제에서의 국가관계는 모든 국가가 다른 국가들과의 형식적인 대등성의 관계에서만 존재하게 되는 국제질서였다. 다른 국가들과 고립되어 자기완결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형식적 대등성의 국제질서의 사실적 내용은,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착취-피착취관계 속에서 국민국가로서 자기를 형성하여 패권을 구하거나 보다 우위의 위치를 구하여 정복이나 전쟁을 반복하면서 경쟁하는 국가들과, 미처 국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여 경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식민지·반식민지로 추락하는 국가들로의 양극분해였다.

 이러한 양극분해의 위기적 상황에서 자신을 국민국가로서 형성하려는 사회·경제·정치적 움직임은 대개 세 갈래의 흐름에서 나타났다. 첫째는 정부 자신의 움직임이었고 둘째는 개화파 정치세력의 움직임이었으며, 셋째는 아래로부터의 농민층의 움직임이었다. 다음에서는 첫째와 셋째의 것을 그 윤곽에서 그려보려고 한다.

 정부 차원에서의 움직임은 물론 국민국가 형성을 자각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국제질서 자체가 각 국가들로 하여금 국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면 국민국가 형성에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객관적 강제가 있었으며, 정부차원의 움직임도 개항에서 1894년까지의 통시적 국면에서 볼 때 객관적으로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보인다.

 민씨척족정권도 그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부국강병정책을 실행하였던 바, 1885∼1894년간 재정·군사·외교·치안사무 등 국정전반을 총괄하는 권한을 내무부에 집중시켜 최고의 의결·결정기구로 만들고 이를 통해 정권을 장악함과 아울러 각종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즉, 민응식·민영익·민영환·민영준 등 민씨척족은 내무부의 독판 내지 협판직을 장기간 보유한 채 병조판서, 중앙군 영사 및 호조판서, 선혜청당상, 전환국 등 군사·재정관련부서와 육영공원 및 연무공원 등 개화·자강추진기구의 요직을 번갈아 역임함으로써 ‘勢道’로 행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내무부는 왕실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홍삼전매권을 관리하였으며, 새로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주전기계를 도입하고 화폐개혁을 추진하였고, 외국인 기술자를 초빙하고 근대식 기기를 들여와 광산을 개발하였을 뿐 아니라 신식 기선을 매입하여 세곡운반과 무역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업은 재정을 확충시키지 못한 채 오히려 민폐를 유발하는 등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와 같이 내무부가 추진했던 재정확보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됨에 따라 고종과 민씨척족은 차관도입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의 차관도입정책은 청국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기채대상국을 통해 조선에서 열강의 세력균형을 꾀하면서 청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청국은 조선의 차관도입을 저지하였으며, 나아가 조선에 대한 차관공여를 강요해 내정간섭을 강화시키려 하였다. 요컨대, 고종은 청국의 적극적인 종주권 강화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주미전권공사를 파견하여 자주·평등외교를 전개하는 한편 원세개의 소환운동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청국의 반대로 말미암아 오히려 원세개의 권한이 더 강화되고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이 강제 소환당함으로써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내무부를 통해 주도했던 반청 자주외교는 조선의 국가적 독립을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아래로부터의 농민층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피기로 한다.

 일본도 청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자기개혁의 결정적 고비에서 정치적·군사적 개입을 감행함으로써 한국의 Nation으로서의 통합을 결정적으로 저지하였으니, 예컨대 임오군란, 갑신정변에서의 일본의 정치·군사적 침략이 그것이었다. 이에 덧붙여 일본은 동아시아에서는 상대적으로 보다 발전한 자본주의적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국에 대하여 경제적으로도 적극적으로 침투하였다.

 한일무역관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면제품의 수입과 곡물의 수출로 나타났다. 1894년 이전의 일본상인은 자국의 면제품이 아니라 영국제 면제품을 중개무역의 형식으로 한국에 수출하였다. 일본상인이 가져온 영국 면제품은 1893년경 한국인 면포 총소비량의 1/4을 차지할만큼 늘어나서 한국의 면포수공업자는 물론 가내부업으로 면포를 생산하던 농민들의 성장을 저지하였다.

 한국으로부터의 곡물수출은 농산물의 상품화를 확대시키고, 쌀값을 올라가게 하였으나, 그 이익은 지주·부농·상인들에게 돌아갔다. 반면에 농민·도시빈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당시의 쌀값은 1883년에서 1894년 사이에 경인지방에서 약 7배, 다른 지방에서는 약 2∼3배로 뛰었다.

 이러한 무역의 확대는 상업유통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개항장 객주가 새로운 상인층으로 등장하였고, 개항장이 국내 상품 유통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재래의 상업유통질서와 대항적인 위치에 서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국내상업유통의 패권을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한국의 소상인층이 점차 몰락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국이 청·영국과 맺은 1883년의 불평등조약으로 서울에서의 점포개설과 내지통상이 허용됨에 따라 외국상인들은 이후 서울과 개항장을 거점으로 내지시장에도 침투해 들어왔다. 청국상인들의 활동으로 육의전 상인과 시전상인들이 타격을 받았다. 이들은 1890년 1월 청·일본 상인의 점포 철수를 요구하면서 시위와 동맹철시를 벌였다.

 또한 외국상인의 내지시장에의 진출은 개항장 객주의 商權을 위축시켰다. 이에 대하여 정부는 25객주 전관지역제등을 실시하여 개항장 객주를 통한 유통권의 유지를 기도하였고, 개항장의 한국 상인들은 객주상회사를 설립하여 상권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정부와 객주상인들의 이러한 노력은 객관적으로 외상에 대항하여 한국의 상권을 지키려는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일본상인의 내지상업활동은 곡물수출의 증가를 초래하였는데, 특히 1890년에는 일본의 국내사정이 겹쳐 곡물수출은 비약적으로 증가되어 이후 대체적으로는 증가일로였다. 개항 이후 1894년까지 대략 114건 내외의 방곡령이 실시되었는데, 이는 중앙정부가 외압으로 인하여 국내시장을 보호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본의 경제적 침탈과 직접 대면하게 된 지역적 곡물시장권의 대항의 표현이었다. 동시에 이는 소농·빈농들이 곡물을 장시에서 구매하는 처지에로 몰락해가고 있었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다음 앞에서 말한 셋째의 움직임 즉 아래로부터의 농민층의 움직임에 대하여 살펴볼 차례이다. 개항으로 인한 곡물상품화의 추세 속에서 양반관료와 상인들과 지주들과 부농들은 대체로 이익을 볼 수 있는 층들이었다. 소농·빈농층과 소상인들은 몰락의 추세였다.

 조선후기 이래의 신분제의 동요는 개항 이후에는 경제적 동요에 자극되어 더욱 촉진되었다. 그 단적인 특징은 양반층의 증대와 노비호의 격감이었다. 이는 전통적 신분구조의 구성원리인 班常制와 良賤制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국가신분제로서의 성격은 거의 상실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항기의 신분계층구조는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계급이 착종되어 대체로 상층부에는 양반사족을 모태로 하는 토호층과 반상을 포괄하는 신분구성을 갖는 요호부민층이 있고, 하층부에는 평민·천민 신분층의 소빈민층이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동요 속에서도 양반층의 사회적 특권은 존속되고 있어서 양반의 특권을 이용한 자의적인 억압과 수탈이 자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신분제의 동요 속에서 사회적 정당성·권위가 이미 의심되기 시작한 양반층의 자의적 특권행사는 편민·천민층의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모순의 표현으로 농민층의 반항인 동학농민전쟁이 발생·전개되었다. 제1차 농민전쟁에서는 국내적으로는 전국의 차원에서 탐관오리를 제거함으로써 소상품생산자로서의 경제적 활동의 안정성·자립성을 획득하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상인의 국내시장질서 준수를 강요함으로써 소상인으로서의 발전을 보장받으려고 하였다. 이후 10월 중순의 제2차 농민전쟁의 개시 때까지 농민군은 사실상 전라도 지방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농민군은 각지에 執綱所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실행하였다. 제1차 농민전쟁에서는 탐학관리를 응징하는 것이 폐정개혁의 구체적 실천방법이었음에 대비할 때, 이것은 큰 성장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개혁을 실행하였으므로 이 시기의 집강소 개혁사업에서 농민군의 의지와 이념, 그리고 개혁의 역량이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그 한계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집강소 단계에서는 폐정의 개혁을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시행함으로써 위에서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집강소 질서 하에서 제12조를 제외한 다른 조항은 실현되었다고 보인다. 봉건제도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지는 않았지만 계서적인 신분제도는 전면적으로 해체됨으로써 봉건제도는 크게 개혁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농민군의 집강소가 기존의 행정체계와 이원적으로 병립되었지만 농민군의 자치적 행정기관으로서 확립되었고, 농민군세력의 군사적 우세성이 확고한 곳에서는 사실상 일원화됨으로써 농민의 지방권력기구로 성립되기도 하였다. 농민군은 지방의 차원이긴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생활질서를 다듬어 나가고 새롭게 창출하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사회의 역사적 전진이었고 농민군의 비약적 성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농민전쟁에서는 위에서와 같은 목적추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일본침략세력을 축출함으로써 그 목적을 이룩하고, 동시에 한국주민의 정치적 생활의 경역의 자립성·불가침성을 지켜내고, 그 경역 내의 정치적 주권자로서의 국왕의 통치주권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객관적으로는 국민국가의 확립에로 이어질 수 있는 정치적 동태였던 것이다.

<鄭昌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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