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1. 청의 간섭
  • 1) 청의 주차관 임명

1) 청의 주차관 임명

 조선은 고종이 즉위한 후 대원군이 섭정하면서 천주교 전래를 막고, 아편전쟁 이래 청이 서양제국에 굴복당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이유에서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병인·신미양요 이후 더욱 쇄국에 자신을 갖게 된 조선은 물밀듯 밀려드는 서세동점의 사실을 외면함으로써 고립무원의 궁지에 빠져들었다.

 한편 청은 아편전쟁 이후 자강책에 급급한 나머지 동고의 겨를이 없었으며 조선의 쇄국책에 대해서 조금도 간섭할 뜻이 없었다. 다만 使行의 내왕으로 事大儀節을 다하게 함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이 장차 제3국에 의해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국하게 될 것이 필지의 사실임을 알고 타국에 앞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킴으로써 조선내의 권익을 선점하고 또 세력기반을 닦으려 기도하였다. 대원군이 하야하자 일본은 정한론을 펴는 일본국내 강경파들의 불만을 해소시킬 목적에서 소위「운양호사건」을 고의로 일으켜 조선을 제압하여 개국시키고자 하였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직접교섭에 임하지 않고 조·청 종속관계에 중점을 두어 먼저 종주국인 청정부에 책임을 묻고자 모리(森有禮)공사를 북경에 파견하여 總署의 공친왕 奕訢과 담판하게 하였다. 이 때 공친왕은 “속방인 조선을 침점하지 않는 한 일본과 조선과의 우호관계는 청이 그것을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는다”고 하였다.0001)≪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臺北;文海出版社, 1963) 권 1, (2)總理各國事務衙門奏與日本使臣往來照會等件擬咨送禮部轉行朝鮮摺, 광서 2년 1월 30일. 이는 조선이 대내외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공법상의 독립국임을 인정하는 사실이 되어, 청은 이후 조선문제에 고심하게 되었고 조선에서의 선수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었다. 기실 공친왕이나 직예총독 李鴻章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양무운동을 벌여 바야흐로 국력의 충실에 전념하고 있는 때였으므로 조선문제로 일본과 불화하여 개전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1876년 초 강제로 체결된 강화도조약의 제1조에「조선은 자주독립국」이라 규정함으로써 일본은 청의 간섭을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조선과 외교문제를 교섭하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1879년 일본이 琉球國을 폐하고 나가사끼현으로 만드는 침략성을 드러내자 청의 대일 감정은 격변하였고 따라서 조선정책에도 종래의 미온적 태도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간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사실 청은 19세기 중엽 이후 계속하여 번속국을 상실하고 있었다. 예컨대 1852년 영국이 버마를, 1860년에는 러시아가 연해주를, 1874년에는 프랑스가 베트남을, 1879년에는 일본이 유구를 각기 차지함으로써 번속국을 상실하였고 따라서 조선은 유일하게 남아 있던 청의 번속국이었다.

 특히 일본의 유구병탐은 장래 조선침략을 시사하는 것이고 나아가 청의 東三省에도 직접적인 위험이 박두하리라 예상하였기 때문에 1880년대에 들면서 청은 종전의 명목적인 종속을 항구적이고 실질적인 종속으로 전환시키고자, 조선에 대한 적극적 진출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홍장은 조선으로 하여금 쇄국책을 버리고 서구열강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케 권고함으로써 일본의 진출을 방지하고자 하였다.0002)≪李文忠公全集奏稿≫권 34, 密勸朝鮮通商西國摺, 광서 5년 7월 14일.
權錫奉,<李鴻章의 對朝鮮列國立約勸導策에 대하여>(≪歷史學報≫21, 1963).
마침 조선에서도 일·러 양세력의 현저한 진출에 자극되고 국내에서 자강문제가 대두함에 따라 서양과의 통상문제가 진전되고 있던 터라, 청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2년 4월 朝美條約을 선두로 서구제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조선문제에 대한 이 같은 청의 적극책에도 불구하고 임오군란이 일어나기까지 청은 일본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끌려가는 형세를 면치 못하여서 크게 부심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임오군란이 발생하였으므로 청은 물실호기로 여겨 군대를 파견하여 종주권을 만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군란소식을 접한 지 일주일만에(1882. 6. 29) 馬建忠과 북양수사제독 丁汝昌을 조선에 급파하였고 잇달아 청 육군의 파견과 대원군 제거라는 새로운 대응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에 淮軍統領 吳長慶 휘하의 청 육군 3천여 명이 7월 7일 남양만에 입항하였다(후에 청의 주차관이 되는 원세개는 이때 23세의 말단 청년무관으로 함께 내한하였다).

 그러나 청이 많은 군사를 파견한 것은 일본의 감정을 악화시킬 중요한 요인이었으므로 마건충은 청일양국의 충돌을 가급적 피하고 군란을 원만하게 평정하려고 시도하였다. 한편 군란을 수습하고자 내한한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는 조선정부에 7개조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협상을 제기하였으나 결렬상태였으므로 청의 대원군 피랍계획은 보다 구체화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일간의 협상이 타결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0003)馬建忠,≪東行三錄≫(臺北;廣文書局, 1961), 임오 7월 7·8·9·10·11일.

 7월12일 오장경과 정여창은 吳兆有·黃仕林·袁世凱 등 막료를 거느리고 한성의 숭례문 밖에 진주한 다음, 이튿날(13일) 마건충과 함께 그들을 방문한 대원군을 몇 차례 필담 후 전격 拘囚하여 강제로 마산포로 호송하였다. 이리하여 대원군은 군함 登瀛洲호에 승선되어 14일 천진으로 압송되었다.0004)權錫奉,<壬午軍亂>(≪한국사≫16, 국사편찬위원회편, 1975), 435쪽.

 대원군 납치 후 청측은 魚允中으로 하여금 국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하고 오장경 명의로 된 通諭를 발표하여 대원군 납치를 정당화시키면서 백성들의 소요를 엄금하였다. 아울러 대원군의 장자인 훈련대장 李載冕을 남별궁에 위치하여 연금시키고 난당소탕이라는 2단계 수습책을 강행, 16일 새벽 청군을 출동시켜 왕십리·이태원 일대를 일제히 공격하였다.0005)≪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3, (137)北洋通商大臣李鴻章奏捕治朝鮮亂黨情形摺, 광서 8년 7월 29일.
王信忠,≪中日甲午戰爭之外交背景≫(臺北, 文海出版社, 1964), 45쪽.
이 소탕작전에서 청군은 언어가 불통하여 진위를 가리지 못하고 무조건 체포하였던 바 원세개가 지휘한 왕십리 방면에서는 군민 150여 명, 오장경이 맡았던 이태원 방면에서 20여 명, 도합 170여 명이 체포되었다.0006)李陽子,<淸의 對朝鮮政策과 袁世凱>(≪釜大史學≫5, 1981), 88∼89쪽. 원세개가 지휘한 왕십리에서의 체포자 수가 훨씬 많았으며 이 때부터 원세개의 조선에서의 활약이 서서히 시작되었다.

 청은 조선의 임오군란을 계기로 전격적인 출병을 단행함과 동시에 보수파의 영수격인 대원군을 납치하여 군란을 평정하였으며 아울러 오장경의 경군 3천여 명을 그대로 조선에 주둔시켜 계속 조선정부를 보호 감시케 함으로써 숙원이던 청의 종주권을 되찾고 조선을 그들의 기미에 얽매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후 청·일 양국의 세력침투는 가중되었고 조선을 둘러싼 청·일간의 대립도 보다 현저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임오군란 후 조선의 치안은 청군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는데 난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군대 창설이 긴요하였다. 신·구간에 조선군대는 임오군란시 모두 해산되었으므로 고종은 친위군의 필요를 절감하고 오장경에게 이 뜻을 전했다. 오제독은 원세개에게 친위군 창설을 일임하여 1000명으로 구성된 新建親軍營을 만들어 훈련케 하였다.0007)金允植,≪陰晴史≫하권, 고종 19년 9월 19일.
王信忠, 앞의 책, 82∼83쪽.
원세개는 이를 좌영·우영으로 나누고 다시 별기군을 개편하여 전영·후영을 증설함으로써 신식군대 4군영을 창설하게 되었다. 한규직·윤태준·이조연·민영익 등 친청사대당 인물들을 각기 전·후·좌·우영사로 임명하게 되니 결국 20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신식군대는 원세개의 통솔하에 있게 되었다.0008)≪高宗純宗實錄≫中, 고종 21년 8월 26일, 169쪽. 뿐만 아니라 청은 대조선정책을 보다 강화할 목적에서 1882년 9월 조선과「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고 조선에서의 치외법권, 내지통상권, 연해운항 순시 및 어채활동 등 경제·외교적 특권을 강제로 인정시켰다.0009)金鍾圓,<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체결과 그 영향>(≪한국사≫16, 국사편찬위원회, 1975), 142∼184쪽.

 이러한 가운데 청정부내에서는 청류당의 강경론자들이 대조선적극책의 가일층 강화를 주장하면서 일본을 완전 제어하기 위해 출병하고, 조선에 감국대신을 파견할 것 등을 들고 나왔다.0010)張謇은 朝鮮善後之策을 상주하고 鄧承脩, 張佩倫은 일본에 대한 출병을 상주하였다.≪張季子 九錄≫政聞錄 권 3. 爲東三省事復韓國鈞函.≪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4, (139)給事中鄧承脩奏朝鮮亂黨已平請乘機完結球案摺, 광서 8년 8월 2일. (147)翰林院侍讀張佩倫奏請密定東征之策以靖藩服摺, 광서 8년 8월 16일. 이러한 청류당의 주장은 조선을 둘러싼 청·일의 쟁패에 역점을 둔 것으로, 조선문제는 유구나 그 외의 주변 번속국과는 류가 다르고 조선이 일본에 귀속되면 만주가 위험하기 때문에 일본의 조선에서의 세력기반을 제거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홍장은 출병보다는 자강에 전력 경주하여 해군의 군비확장에 매진하면서 東征시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견해였다.0011)≪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4, (151)北洋通商大臣李鴻章覆奏宜先練水師再圖東征摺, 광서 8년 8월 22일. 이홍장의 소극론은 청류당의 적극론에 봉착하게되자 다소의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을 청의 완전 속국으로 만드는 데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조선의 국정을 감시하고 보호할 필요성은 인정하였으므로 외교관계 고문을 파견하여 조·중관계를 일층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1월초 독일인 묄렌도르프0012)高柄翊,<穆麟德의 顧聘과 그 背景>(≪진단학보≫25·26·27 合輯, 1964).와 馬建常을 파견하여 조선의 재정·외교를 맡게 하고 원세개는 군사를 담당케 하여0013)Jerome Ch'en,≪Yuan Shih-K'ai≫(Stanford Univ. Press, 1972), 10쪽. 오장경 통할하에 조선정부를 감시함으로써 조선이 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1884년초 청·불간에 월남문제를 둘러싸고 전운이 감돌자 주화론자인 공친왕일파는 주전론자인 청류당일파에게 공격당하여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홍장의 외교정책도 맹렬한 탄핵을 받아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0014)羅惇融,<中法兵事本末>(≪中國近百年史資料初編≫所牧), 328∼331쪽. 이에 오장경은 조선주둔 청군의 절반을 청·불전에 대비코자 철수시키게 되었다.0015)≪李文忠公全集奏稿≫권 49, 議分慶軍駐朝片, 광서 10년 4월 4일. 이 당시 조선정국은 친청적인 사대당과 일본에 기대는 독립당간의 반목·알력이 표면화하였는데, 청병이 철수하자 일본의 원조를 얻어 독립당은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개혁을 단행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하려는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 해 10월 신설된 우정국청사 낙성식을 계기로 독립당일파는 갑신정변을 일으켜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 정변은 준비가 불충분하였고 계획이 치밀하지 못하였으며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한 일군의 약세에 대비되는 청군의 활약으로 결국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이 결과 국왕의 비호하에 활동한 독립당의 반청운동은 완전히 종지부를 찍게 되었으며 원세개의 조선내에서의 세력확보와 대조선적극책을 구사할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장경 인솔하에 청군의 반이 떠난 후 잔류한 주한 청군 3영은 오조유가 통솔하게 되어 있었지만 그는 우유부단하여 결단력이 없었으므로 실권은 總理營務處會辦朝鮮防務 원세개가 쥐게 되었다.0016)Jerome Ch'en, 앞의 책, 10쪽. 그러므로 정변 발발 후 원세개는 강력하게 청군 출동을 주장하여 정변진압을 결행하였던 것이다. 오조유가 이홍장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세개는 청군을 출동시켜 일본군과 충돌·교전을 감행하여 패퇴시키고, 즉시 국왕을 자기 군영으로 옮기게 하여 독립당을 견제함으로써0017)沈祖憲,≪容菴弟子記≫(중국현대사료총서 제1집, 台北, 1962), 17∼25쪽. 사건의 종지부를 찍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강력한 청군의 무력간섭은 원세개의 결단이었는데, 이는 청불전쟁으로 이홍장이 동고의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게 볼 때 이홍장의 외교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원세개였지만 대조선정책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그는 이홍장과는 류를 달리 하였다. 즉 근본적인 면에서는 이홍장의 정책을 따르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이홍장의 유화·소극적인 방법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간섭하여 청의 종주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0018)≪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5, (214)北洋大臣來電, 광서 10년 10월 23일. 결과적으로 그의 대조선정책은 성공하였고 이후 청의 대조선정책 수행에 최적격의 인물로 간주되어0019)≪李文忠公全集奏稿≫권 49, 議分慶軍駐朝片, 광서 10년 4월 4일.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10년간 청의 주차관으로 임명되어 조선에서의 임무에 충실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세력기반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통하여 구축된 것이었다.

 그런데 갑신정변 후 일본의 대청감정은 악화일로여서 화·전양론이 분분하였던 바 이는 청국에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일본측 주장은 청과의 개전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나 양국병 충돌의 책임을 묻고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였으므로 청은 이에 동의하였다. 비록 일본의 태도가 청세력을 견제하려는 수단에 불과하였으나 청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생각에서 양국병 충돌의 책임자로 간주된 원세개를 소환함으로써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였다.0020)沈祖憲, 앞의 책, 15쪽. 이리하여 원세개는 갑신정변 직후인 11월에 일단 귀국하였다.

 한편 일본은 주한공사 다께조에(竹添進一郞)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하여 정변직후 외무경 이노우에(井上馨)를 파견하여 한성조약을 맺고 자국에 유리한 조항을 삽입케 하는 한편, 1885년초에 이토(伊藤博文)를 천진에 파견하여 이홍장과 천진조약을 체결하여 양국철병을 가결하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와 같이 양국은 조선을 둘러싸고 각축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갑신정변 이후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라 조선정세가 유동적인 상황에 이르게 되자 청에 대한 일본의 정책은 완화되고 도리어 청의 대조선적극책을 지원하는 결과를 빚어냈다.

 즉,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에 온 묄렌도르프는 총세무사 겸 외무협판의 요직에 있으면서 국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는데, 조선을 감시하는 목적을 띠고 온 그는 오히려 러시아와 결탁함으로써 청일을 견제하고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들려는 이른바 聯露策을 기도하였다. 여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 점령함으로써 국제관계를 크게 긴장시켰다. 조선의 연로설과 이에 따른 영국의 거문도점령 등 일련의 사태가 연발하자 청·일 양국은 영·러의 대립에 크게 당황하여 국제관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데 공동 노력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하였으므로 청과 제휴하여 그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에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는 1885년 5월 8개조에 달하는 조선의 정치개혁안을 이홍장에게 제시하였다.0021)≪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8, (385)軍機處奏進呈徐承祖與日本外部井上馨問答等件片, 광서 11년 5월 29일. 이 가운데는 미국인 가운데 유능한 자를 뽑아 묄렌도르프의 임무를 대행시킬 것(5조), 현재 주한청상무위원 보다 재간이 뛰어난 청의 관리를 택하여 조선 국정을 탐지케 할 것(6조)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일본이 청을 앞세워 조선내정에 간섭케 하고 배후에서 조·청관계를 조종하려는 의도였다. 이홍장은 청·일 양국이 조선의 공동 종주국이 되는 것을 우려하였지만 일단 묄렌도르프 교체문제와 주한청관 대체문제에 중점을 두어 대조선정책의 쇄신을 기도하였다. 그는 조선 국왕이 무능하여 왕비와 그 일파에 의해 정국이 조종되므로 국정을 감시할 인물의 파견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대원군 석방과 원세개의 재파견을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홍장은 원세개로 하여금 대원군을 조선으로 호송케 하였다(1885. 8). 대원군을 석방하여 민비일파의 세력을 견제하려 한 이홍장의 예측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묄렌도르프 또한 관직에선 물러났으나 국왕과 왕비의 신임을 받고 조선에 체류중이었으므로 조선은 아직 연로책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원세개는 조선 도착 후 먼저 대원군과 민비일파의 불화를 조정하는 한편 9월에는 김윤식을 만나 연로책의 부당성을 통렬히 비난하였고 이어 국왕에게 소위 摘姦論을 지어 올려, 러시아 방비를 위해서는 청과 제휴·공수동맹을 맺어야 함을 역설하였다.0022)≪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9, (409)附件4 袁世凱與朝鮮執政諸臣筆談節略. 附件 5 袁世凱摘姦論, 광서 11년 9월. 원세개에게 설복된 국왕은 청의 구원병을 수원에 내주케 하여 러시아를 저지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0023)위의 책, 권 9, (409)袁世凱摘姦論 가운데「九月初四日謁見國王筆談」참조.

 무골해삼으로 지칭되는 주한청상무위원 陳樹棠이0024)Jerome Ch'en, 앞의 책, 10쪽. 조선 국정을 보필하고 간섭할 재능이 부족한 인물임을 잘 아는 이홍장은 청군 철수후의 대조선정책을 강력하게 집행하는 데는 원세개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 판단하고, 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임명함과 동시에 道員으로 승진시키고 아울러 三品銜의 賞을 더 보태어 이 해 10월 원세개를 조선의 주차관으로 파견하였던 것이다.0025)≪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9, (410)李鴻章奏派同知袁世凱接辦朝鮮交涉通商事宜摺, 광서 11년 9월 21일;≪구한국외교문서 제8권, 淸案 1≫, 279쪽, (451)袁世凱의 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關防祗受에 관한 照會. 이홍장은 원세개가 능소능대하며 술수와 지모가 뛰어날 뿐 아니라 이미 조선에서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고 있었으므로 조선을 청에 종속시켜 청의 주도하에 대외관계를 유지하게 하고 조선국정을 감시하는 데 최적의 인물이라 판단하고0026)≪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上冊, 177쪽. 이홍장은 원세개를 천거할 때 “담력과 지략을 갖고 있고 상황판단에 능하며 조선의 사정에도 정통하다”고 칭찬하고 있다. 그를 선정하였던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후 10년간 원세개는 정치적으로 조선의 내정·외교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였음은 물론이고 청상의 보호와 통상·교역의 증대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나아가 조선의 해관·차관 간섭, 전선부설권 선점, 윤선운항 등을 강행함으로써 일본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대조선 경제권을 만회하고자 안간힘을 다하였다. 이와 같은 원세개를 통한 청의 간섭 즉 조선에 대한 정치, 경제적 적극책은 결국 일본과의 대립을 심화시켜 청일전쟁을 유발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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