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1. 청의 간섭
  • 2) 청의 외교 및 내정간섭

2) 청의 외교 및 내정간섭

 원세개는 조선에 주차관으로 부임한 이래 약 10년간(1885∼1894) 청의 대조선적극책에 편승하여 이홍장이 입안한 정책을 충실히 실행하며 조선의 국정을 간섭하였다. 그는「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직함을 띠고 총판조선상무 진수당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왔으므로 외국공사와 같은 외교사절이 아니었고 겉으로는 통상교섭을 전담하는 직무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종주국의 대표로서 조선의 일체 정령을 감독하는 임무였다. 천진조약에 따라 청·일양군이 모두 철수한 뒤 국제관계의 미묘한 정황 속에서 조선의 정치·외교간섭은 물론이고 청국상인의 보호·장려 등 대조선경제정책의 중임까지도 감당해야 하였음은 비록 영·러의 각축으로 인하여 청의 종주권행사가 다소 용이하였다고는 하나 그 임무는 막중한 것이었다. 이홍장은 원세개가 조선의 조신들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으며 임오·갑신의 정변을 겪는 동안의 그의 수단과 기민한 활동을 익히 보았으므로 그에게 조선 경영을 일임하게 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홍장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원세개는 조선경영의 대권을 장악한「監國大臣」으로 조선조정에 군림하게 되었다. 그는 부임 직후 먼저 묄렌도르프를 천진으로 귀환 조치시켜 후환을 없애고자 하였다. 이에 이홍장은 묄렌도르프의 후임으로 미국인 메릴(H. F. Merill)을 추천하여 세관업무를 담당케 하였고 외교교섭업무는 역시 미국인인 데니(O. N. Denny)를 파견하여 집무케 하였다.0027)≪李文忠公全集譯署函稿≫권 17, 籌換穆麟德, 광서 11년 7월 2일 및 至朝鮮國王, 광서 11년 8월 16일, 同附件朝鮮國王原咨.
O. N. Denny,≪淸韓論≫(柳永博 譯註, 東方圖書, 1989), 17쪽.
먼저 원세개는 반청·연로의 요소를 색출하고 반대세력을 구축하는데 힘써 사대당의 영수인 김홍집 등과 결탁하고 왕과 왕비를 비롯한 조신들의 감시에 나섰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청운동인 연로책은 종식되지 않았다.

 처음 국왕은 원세개에게 호감을 가졌으나0028)≪李文忠公全集奏稿≫권 55, 派員接辦朝鮮事務摺, 광서 11년 9월 21일.
≪容菴弟子記≫권 1, 40쪽.
그가 정식 부임한 후 내정간섭이 심하고 권력이 의외로 커짐에 따라 그를 배척하는 마음이 점차 커졌다. 더욱이 원세개의 부임과 전후하여 러시아공사 베베르(K. I. Waeber)가 조선에 부임해 오자 민비일파는 러시아공사와 결탁하고 청의 압력을 제거하고자 국왕을 부추겼으므로 反袁운동이 표면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이 소위 제2차 한·로밀약사건인 것이다.0029)≪한국사≫권 16(국사편찬위원회, 1975), 639쪽.

 제2차 조러밀약설은 그 진위가 불분명한 바가 있으나, 조선정계는 물론이고 청·일양국 등 국제관계를 긴장시킨 사건이었다. 민비는 그의 정적이던 대원군을 석방하고 또 원세개를 파견하여 조선을 감시케 하였으므로 청에 대한 원망이 컸다. 이러할 때에 일부 관료가 러시아공사관과 궁정을 출입하면서 민비가 베베르공사부인과 교제하도록 주선하였으며 베베르도 이에 국왕과 왕비를 접촉할 기회가 빈번하게 되고 따라서 그들의 환심을 사게 되었다. 이때 친러파들이 민비를 자극하여 러시아와 결탁하여 청에 항거하는 계획을 꾸미게 되니 趙存斗·金嘉鎭 등이 러시아공사에게 편지하여 러시아의 개입을 호소하기에 이른 것이었다(1886년 7월).0030)≪한국사≫권 16, 640쪽.

 원세개는 이 사건을 재빨리 탐지하고 러시아공사가 본국에 전보하는 것을 저지시키는 한편 이홍장에게 전보하여 러시아군이 도착하기 전에 청 수군을 속파하도록 청하였다.0031)≪李文忠公全集海署函稿≫권 2, 遠道來電, 광서 12년 7월 14일 및 籌朝鮮私叛, 광서 12년 7 월 15일. 며칠 후 그는 조선의 조정대신들과 공사들을 관저로 불러 연회를 연 자리에서 날조한 전보를 보였는데 그 내용은 “문죄차 金州 72영이 오늘 오전 승선하여 한성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연극을 꾸미는 한편 국왕을 알현하고 “天兵〔청군〕이 곧 올 터이니 간신들을 빨리 없애라”고 위협하였다. 그리고 민영익에게 “민비가 연로책을 총괄하여 계략을 꾸몄고 이에 따라 러시아군이 조선 국경지역 점령을 기도하였으니 마땅히 청의 문죄를 받아야 한다”고 엄히 질책하였다.0032)≪中日甲午戰爭之外交背景≫, 103쪽. 이로 인해 조선에서는 청·러양국군이 교전하리라는 풍문이 떠돌아 민심이 자못 흉흉하였다. 그리하여 국왕은 4영의 친위군으로 하여금 경계를 철저히 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친로책의 혐의로 김가진·조존두 등을 하옥시키고 영의정 심순택·우의정 김홍직 등을 원세개에게 보내 연로책은 국왕과 정부는 무관하며 소인들이 만들어 낸 것임을 밝혔다.0033)위와 같음.

 이와 같이 원세개는 날조한 전보로 조정대신들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국왕폐위문제까지 거론하였다. 1886년 7월 그는 이홍장에게 전보를 쳐 “昏君을 신속히 폐하고 李氏 가운데 현명한 자를 뽑아 새 왕으로 세운 후, 병사 수천 명을 조선에 파견시켜 주면 인심을 수습하고 각국의 비방을 해소시킬 수 있다”0034)≪李文忠公全集海署函稿≫권 2, 袁道來電, 광서 12년 7월 7일.고 했으며, 또 “臣民이 서로 싸우고 온 나라가 들끓고 있는 이 때에 만약 병사 500명만 있어도 국왕을 폐하고 그 주변의 무리를 납치하여 천진에서 심문받게 하겠다”0035)위의 책, 권 2, 袁道來電, 광서 12년 7월 21일.
≪高宗時代史≫권 2, 고종 23년 7월 17일, 860∼861쪽. 원세개의 의중인물은 대원군의 장자 完興君 載冕의 子 埈鎔이었다.
고 호언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조선을 능멸하고 종주국으로서의 청의 위치를 강하게 부각시켜 고답적인 자세로 한정에 군림하고자 한 그의 술책이었는데, 주한 각국공사들이 그를 일컬어「기세 등등하게 사람을 능멸하여 한정을 위협하고 있다」,「흉악무도한 행위는 극도에 달하였다」고 지적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0036)≪淸韓論≫, 50∼51쪽.
≪알렌의 일기≫(金源模 역, 단국대출판부, 1991), 117·341쪽.

 이홍장은 원세개의 일련의 전보를 받고 러시아주재 청공사 劉瑞芬에게 전보를 쳐서 알아본 결과 러시아조정은 조선의 밀서를 접수한 사실이 없다고 하였으며 조선조정에서도 이 사실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다고 부인하였다.0037)≪李文忠公全集海署函稿≫권 2, 劉使來電, 광서 12년 7월 23일;권 18, 論朝鮮辨誣, 광서 12년 8월 초 8일, 附錄 朝鮮照會. 원세개가 국왕폐립을 주장한 것에는 대원군을 의지하는 바 컸으나 대원군은 이미 고립되어 국왕폐립에 성원할만한 세력을 갖지 못했으며 밀서사건이 조선국왕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진 이상 함부로 폐립할 수 없었다. 또한 파병문제도 각국이 청의 파병에 동의하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었고 특히 일본이 천진조약을 내세워 힐책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단지 러시아의 動兵說에는 청측이 자못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출병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조선 근해에 군함을 순항케 하여 사태의 변화를 관망하게 하였다.0038)≪李文忠公全集電稿≫권 7, 寄長崎交中國水師提督丁琅, 광서 12년 7월 7일.

 원세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서 독무대나 다름없이 그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더욱 방자해졌다. 이러한 배후에는 제국간의 세력균형으로 말미암아 청의 조선경영이 유리하였던 외교상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영·일·러 3국이 상호 견제하였고, 특히 영·러 양국은 아프카니스탄에서의 충돌 이래 조선에서 다시 세력경쟁이 첨예화하는 형세였다. 영국은 제1차 조러밀약설이 퍼지자 재빨리 조선의 거문도를 점령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일본도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여 종래의 청배척정책을 완화시켜 청을 도와 러시아에 대비하고 있었음은 앞서 말한 바 있다. 따라서 러시아는 조선에 진출하지 못하였고 제2차 조러밀약설까지 극력 부인하여 자국의 입장을 변명하기에 급급하였다. 이와 같이 국제정세가 긴박하고 상호 세력견제에 여념이 없을 때 청은 종속관계를 표방하고 대조선적극책을 취하게 되었고 영·일·러 3국은 대조선관계에 있어 현상유지를 원하여 그 이상의 각축을 피하는 태도였다. 그러한 태도는 곧 청의 대조선정책을 묵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2차 조러밀약설과 원세개의 폐위론으로 조선정부의 기력은 크게 저상되었으며 이후 거의 사사건건 원세개를 통한 청의 간섭과 지도를 받게 되었다.

 조선외교에 대한 청의 간섭은 조선의 駐外國公使 파견시에 발생하였다. 고종 24년(1887) 5월에 도승지 閔泳駿을 주일관리공사로, 6월에 朴定陽을 주미공사로, 沈相學을 주영·독·러·프·벨기에 등 5개국 주재공사로 임명하고 해당국에 부임을 서두르게 하였다. 주외국공사의 파견문제는 외교고문 데니(O. N. Denny), 참찬관 알렌(H. N. Allen)0039)≪한국사≫16, 652∼653쪽;≪알렌의 日記≫, 343쪽. 및 민영익의 건의에 따른 것인데, 이들은 원세개의 횡포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어서 조선이 주외국공사를 독자적으로 파견함으로써 자주국임을 나타내고 청의 종주권에 도전하고자 하였다.0040)李光麟,≪한국사강좌 근대편≫(일조각, 1981), 215쪽.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청의 내정간섭이 절정에 달하게 하였으며, 청정부와 원세개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던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것이었고 오히려 이것을 계기로 종속관계가 가일층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원세개는 조선의 공사파견이 결정되자 즉시 이홍장에게 보고하였고 이홍장의 명령에 따라 조선공사와 청공사간에는 일종의 격식을0041)≪李文忠公全集電稿≫권 8, 寄朝鮮袁道(광서 13년 7월 26일)에 보면 “조선파견사절이 청국공사와 公事를 교섭할 때 반드시 ‘呈文’(하급관청이 고급관청에게 보내는 글)의 형식을 취하고 내왕에는 ‘御帖’(붉은색 명함)을 사용하며, 청국공사가 조선공사에게 공문을 보낼 때는 ‘硃筆’(붉은색으로 쓰는 것)을 사용하여 조회할 것”이란 조건을 지시하고 있다. 갖추게 함으로써 종주국의 체면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한편 그는 조선조정에 대해 공사파견에 앞서 그 사실을 청정부에 자문·보고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상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엄중히 힐책하였고, 영의정 심순택에게 조회를 보내 공사파견 중지를 요구하였다.0042)≪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10, (558)收北洋來電, 광서 13년 8월 2일. (561)軍機處寄李鴻章 電信, 광서 13년 8월 7일.
≪알렌의 日記≫, 132·342∼344쪽.
그러나 청의 권고로 구미제국과 입약통상하였으며 조약에 의거하여 공사를 파견하는 만큼 청이 이를 방해할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주한미국공사 딘스모어(H. A. Dinsmore)와 주청국공사 덴비(G. Denby)도 이 사실을 지적하고 청의 공사파견 간섭의 부당함을 통렬히 비난하였다.0043)≪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10, (566)北洋大臣來電, 광서 13년 8월 13일.
≪알렌의 日記≫, 343쪽.
그런데 청정부의 견해는 조선과 구미제국간의 공사내왕에 대해 간섭하려는 것이 아니며 단지 조선이 속방체제를 준수하지 않는 것을 힐책하는 데 불과한 것이므로 종속관계상 당연히 행해지는 일이니 각국은 조금도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조선측에서 공사파견에 앞서 상의하지 않은 것을 사과하고 공사파견을 간청하였으므로 청은 파견을 허락하되 조선의 외국주재공사가 준수해야 할 세 가지 조건0044)≪淸案≫1, (660)同上泰西各國駐箚朝鮮公使의 屬邦體裁에 관한 三個條遵守事項提出, 고종 24년 9월 23일. 조선공사가 지켜야 할 세 가지 조건은 另約三端이라하여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① 韓使는 먼저 주재국의 청공사를 방문하고 그를 대동하여 외무부에 갈 것. ② 공사연회에 韓使는 淸使 뒤에 앉을 것. ③ 중대 교섭사건은 淸使와 미리 상의할 것.을 제시하고 그것의 이행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원세개는 조선주재 영국서리총영사 베버(E. C. Baber)와 독일총영사 잡페(E. Zappe)와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조선의 공사파견은 청국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니 금지해야 된다”는 의견을 듣자 위의 세 가지 지시를 무시하고 조선정부에 대해 공사파견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0045)李光麟, 앞의 책, 215∼216쪽. 그리하여 이미 주외5국공사로 임명된 심상학은 칭병하고 부임을 거부하였으며, 후임으로 임명된 趙臣熙도 부임 도중 홍콩에 체류하였다가 원세개의 압력을 받아 사임하였고, 주미공사 박정양도 회국을 재촉받아 귀국하고 말았다.0046)≪淸案≫1, (838)駐美使臣朴定陽의 還國日時通報要請, 고종 25년 9월 28일, (838)同上朴定陽 還國日時의 從實回報要求, 고종 25년 10월 7일.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11, 北洋大臣來電 二, 광서 16년 1월 31일.
그러자 조선정부에서는 다시 朴齊純을 公使로 임명하였으나0047)≪承政院日記≫, 고종 27년 1월 12·16·17일. 청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박정양은 일시 미국에 부임해 있었을 때 청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0048)공사 박정양은 알렌의 단호한 주장에 감복하여 앞서의 세 가지 조건들을 지키지 않고 독립적으로 미국 클리블랜드(G. Cleveland) 대통령에게 국서를 제정하였다(≪알렌의 日記≫, 345쪽).는 이유로 귀국한 후에도 원세개는 한정을 핍박하여 그를 엄중 징계하게 하였던 것이다.0049)≪淸案≫1, (898)派美使臣朴定陽의 還國卽時査詢回報要求, 고종 26년 2월 1일, (1018)駐美使臣朴定陽事件에 대한 追窮 및 그 眞相의 回示要請, 고종 26년 8월 11일. 이러한 원세개의 좌충우돌의 행동은 조선에게 큰 타격을 안겨 주었으며 조선이 구미각국으로 공사를 파견하는 일은 그가 주차관으로 있는 동안은 끝내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다음으로 차관교섭에 대한 청국의 방해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조선정부에서는 여러 차례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산업개발, 개화정책 실현에 따른 재정궁핍 등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주로 해관을 담보로 외국에 차관을 교섭하였던 것이다. 해관은 세원일 뿐만 아니라 이권을 매개로 외세와의 결탁을 가장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청국측은 매번 조선의 차관교섭을 방해하였다. 청정부는 당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로 인한 혼란의 와중에서도 출혈차관 제공을 통해 조선의 타국과의 결탁을 끊게 하고 청의 세력을 침투시켜 종속관계를 한층 더 강화하려고 하였다.

 조선은 1882년 청으로부터의 50만냥을 차관한 것이 최초였다. 해관세·홍삼세·礦稅 등 두 겹 세 겹의 순차담보를 설정함으로써 청은 다른 어느 나라 보다도 조선에서의 주요 경제이권을 선점할 바탕을 구축하였다.0050)金正起,<朝鮮政府의 淸借款導入>(≪한국사론≫3, 1976), 433쪽.
李陽子,<淸의 對朝鮮政策과 袁世凱-海關·借款·電線·輪船問題를 中心으로->(≪東義史學≫제3집, 1987), 123쪽.
또한 1885년 6월 의주전선조약 체결시 그 가설경비로 청의 전보국으로부터 10만냥의 차관을 도입하였는데 이는 청 이외의 차관도입을 막고 25년간 조선에서의 전선부설권 및 관리권을 독점하고자 한 데 있었다. 이 차관으로 조선은 전신관계의 이권을 청에게 빼앗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청은 차관액으로 가설된 전선을 이용하여 조선이 제3국과 관계를 맺는 것을 적극적으로 탐지하고 간섭할 수 있었다.0051)李陽子, 위의 글, 124쪽.

 조선의 경제상황은 매우 악화되었으므로 차관도입이 있은 지 불과 수년 후 다시 거액을 차관함으로써 누적된 각종 외채를 상환할 수 있었다.0052)≪日本外交文書≫22권, 439∼440쪽. 1889년까지 조선정부의 외채총액은 대략 130만냥으로 추산되고 있다.0053)金正起, 앞의 글, 453쪽. 고종은 외채상황 독촉과 미상환에 따르는 이권침탈에서 벗어나고 또한 청의 지나친 간섭을 물리치기 위하여 원세개의 첩자가 들끓는 외아문을 제쳐놓고 주로 외국인 고문들을 통해 차관도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차관교섭은 거의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데 이것은 모두 청의 간섭 때문이었다.

 1887년 고종은 박정양을 주미전권공사로 임명한 후 주미조선공사관 참찬관이었던 알렌(H. N. Allen)에게 200만불의 미국차관을 주선하게 함으로써 원세개의 극단적인 내정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과의 차관교섭은 결국 청의 간섭으로 실패하였으며0054)金正起, 앞의 글, 455쪽;≪알렌의 日記≫, 145·155쪽. 이 일은 조청간의 종속관계를 미국조야에 널리 인식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그 후 1889년 5월 조선정부 내에서의 이권회수운동이 열기를 더해 가면서 민영익은 외교고문 데니로 하여금 주한프랑스영사 플랑시(Collin de Plancy)와 비밀히 교섭케 하여 프랑스은행으로부터 해관을 담보로 200만냥을 차관하기로 합의하였다. 특히 데니는 원세개를 앞세운 청국의 대조선간섭정책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키고자 힘쓴 사람이었다. 원세개는 외아문총리 조병직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즉각 압력을 가하여 중지시켰다.0055)≪李文忠公全集電稿≫11, 寄譯署, 광서 15년 5월 29일.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11, 12쪽(641∼642件).
≪淸季外交史料≫권 81, 96∼97쪽.
이 일이 있은 뒤 이홍장은 청의 총세무사 하트(R. Hart)의 건의로 조선의 차관도입을 봉쇄하는 외교적 조치를 취하였다. 즉 각국에 조회를 보내 앞으로 어느 나라든지 청정부의 인준없이 조선과 계약한 차관은 무효라고 선포하였다. 청과 조선은 종속관계에 있고 조선의 해관업무는 모두 청의 관리하에 있으므로 해관을 담보로 한 차관은 무효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0056)林明德,≪袁世凱與朝鮮≫(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臺北, 1970), 208쪽. 이와 동시에 원세개는 청정부의 훈령을 받아 청의 공식적인 기본 입장 즉「국제법상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며 청을 제외한 타국으로부터의 차관은 청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조선정부에 통고하고, 이홍장에게는 조선에 대한 청의 적극적인 차관제공을 건의하였다.0057)≪李文忠公全集電稿≫11, 寄朝鮮袁道, 광서 15년 5월 29일.

 그러나 이러한 청측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계속 독자적으로 제3국과의 차관교섭을 시도하여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같은 해 6월 고종은 韓圭卨을 민영익·데니 등과 비밀리에 상담케 한 후 홍콩에 보내 미국상사 타운선양행(陀雲仙洋行;Morse Townsend & Co.) 및 영국상사 이화양행(怡和洋行;Jardin Matheson & Co.) 등과 200만냥 차관교섭을 진행토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원세개의 재빠른 저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0058)≪朝鮮檔≫(臺灣 國立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所藏), 광서 15년 6월 30일. 같은 해 7월 조선의 총세무사직에 있던 메릴조차도 청의 지나친 간섭에 불만을 품고 고종과 데니의 차관교섭에 응하여 프랑스공사와 상의하여 프랑스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이홍장과 원세개의 저지로 좌절되고 말았으며0059)林明德, 앞의 책, 210쪽. 이후 메릴은 원세개의 미움을 사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해관의 총세무사직에서 파직되었다.0060)金正起, 앞의 글, 462쪽.

 1890년 2월 조선정부는 데니의 후임으로 프랑스계 미국인 르젠드르(C. W. Legendre)를 임명함에 따라 고종의 외채도입책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으며 청국도 아연 긴장하게 되었다. 고종은 그에게 총세무사직을 맡기고 외국차관으로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해관을 독자적으로 운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세개의 간섭으로 르젠드르는 총세무사직은 차지하지 못하고 내아문협판을 제수받았다.0061)≪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11, 27∼28쪽.
≪朝鮮檔≫李鴻章致總署函, 광서 16년 2월 22일.
조선정부는 곧 르젠드르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과 150만원 차관계약을 맺게 하였는데 조건은 해관저당에 원리금 12년 분할상환이었다.0062)≪朝鮮檔≫李鴻章致總署函, 광서 16년 4월 14일. 이 일을 안 이홍장과 원세개는 주일공사 黎庶昌을 통해 르젠드르의 차관활동을 저지시켰으며 결국 조·일 쌍방이 제시한 조건불일치도 겹쳐서 이 차관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0063)위의 책, 黎庶昌致總署兩件, 광서 16년 6월 10일·7월 13일.

 곧이어 같은 해 3월 청은 조·청 종속관계상의 중요 성명을 발표하여「조선은 빈곤한데 낭비가 심하여 상환하는 것도 어려우니 각국 상사는 조선에 차관을 제공해서는 안된다. 장래 채무를 상환치 못하는 일이 있어도 중국은 보증을 하지 않는다. 만약 각국이 외채 때문에 조선해관을 저당하고자 해도 중국은 역시 절대 윤허하지 않는다」0064)≪李文忠公全集電稿≫권 12, 寄駐俄英美日各使, 광서 16년 3월 15일.
李陽子, 앞의 글(≪東義 史學≫3집, 1987), 128쪽.
고 하였다. 그리고 이홍장은 원세개에게 명하여 조선은 중국과의 차관에만 합의토록 하게 하였다.0065)위의 책, 李鴻章致袁世凱電, 18∼19쪽.

 그러나 고종은 여전히 이에 불응하고 르젠드르에게 다시 명하여 미국상사나 미국은행과 차관접촉을 하도록 하였다. 그는 미국은행으로부터 20년간 광산 1개처 채굴권 제공 대가로 100만원을 차관하려 하였는데 광산저당문제가 말썽이 되어 이 또한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독일 世昌洋行(Edward Meyer & Co.)과의 차관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6월에 그는 재차 미국으로부터의 150만원 차관계획을 세웠는데 주미청국공사가 신문을 통해 미국상인과 금융업자들의 대조선투자를 방해하였기 때문에 이 차관 또한 실패하였다.0066)金正起, 앞의 글, 467쪽. 그 후 조선정부는 르젠드르를 제주어채문제로 일본에 파견하였을 때 다시 일본에서 200만원을 차입하도록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때 이홍장은 주일공사에게 이 차관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부차관인지 상인차관인지 해관담보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도록 훈령하고 해관담보는 절대 저지시키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이었다.0067)≪李文忠公全集電稿≫권 14, 寄伯行, 광서 18년 1월 29일·2월 3일.

 이와 같이 르젠드르를 통한 조선정부의 수 차에 걸친 차관계획이 연속 실패한 것은 계획자체가 무리한 바도 없진 않았지만 전례없이 강력하고 조직적인 청의 저지정책 때문이었다. 원세개와 청정부는 조선의 재정·경제면의 개선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외국차관만을 저지함으로써 청이 독자적으로 차관을 공여하여 종주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는데, 실제 이홍장의 대조선차관계획은 청의 재정난으로 지지부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2년 봄 원세개가 일시 귀국하였을 때 조선정부가 재빨리 일본으로부터 25만원 차관계약을 맺게 되자 귀임 후 그는 이를 하루속히 상환하고 오직 청으로부터만 차관해야 된다고 강력히 요구하였던 것이다.0068)≪李文忠公全集電稿≫권 14, 寄譯書, 광서 18년 4월 26일.

 이후 이홍장은 누차에 걸친 조선의 제3국과의 대규모 차관교섭건에 자극되어 종래의 소극적인 태도에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바, 원세개에게 조선해관담보를 조건으로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조선정부에 전달하도록 시달한 것이 그것이다.0069)≪李文忠公全集電稿≫권 12, 寄朝鮮袁道, 광서 16년 3월 15일. 고종은 차관에 의한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여러 번 차관도입을 시도하였던 것이나 모두 실패하였고, 게다가 앞서 기선구입차 독일상사로부터 빌린 금액의 상환독촉이 심하였으므로 하는 수 없이 청의 제공을 받아 들여 청국상사 同順泰로부터 10만냥을 차관하였다(1892. 9).0070)≪朝鮮檔≫, 광서 18년 9월 5일. 이 차관계약의 내용은 기존 차관 중 최우선적으로 상환해야 한다는 것과 청이 독점적으로 차관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 차관액은 겨우 독일상사의 채무상환액에 불과하였으므로 기타 외채상환과 재정문제가 겹쳐 조선은 일개월여만에 다시 청의 동순태로부터 10만냥을 차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0071)위의 책, 광서 18년 10월 22일. 일본제일은행과 미국상사로부터 차관한 14만냥의 상환독촉이 심하여 조선은 원세개에게 다시 차관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두 번에 걸친 20만냥의 차관은 빚을 갚기엔 태부족의 액수였지만 조선에 대한 청의 종속관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원세개는「대여가 많으면 많을수록 청의 권리는 더욱 신장된다」고 하면서0072)林明德, 앞의 책, 214쪽. 1893년 봄 이홍장에게 조선의 재정상황과 중국의 차관 필요성을 강조하며 조선에 대한 적극적인 차관대여계획을 제출하였다. 이홍장도 이에 찬동하여 各局 및 江海關道 등에 명령을 내려 가능한 한 자금을 조달하여 즉시 원세개의 대규모 차관계획을 밀고 나가게 하였다.0073)≪朝鮮檔≫, 광서 19년 3월 2일. 그러나 이 계획은 청국의 경제사정이 어려웠으므로 자금모집이 곤란하였을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닥쳐온 청일전쟁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끝으로 또 다른 청의 내정간섭을 보면, 고종 27년(1890) 봄 조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청은 칙사를 파견하여 문상하겠다고 거론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경비부담0074)청의 칙사 파견시 우리측 부담 경비는 막대한 것이었다(全海宗,<淸代韓中朝貢關係考>,≪韓中關係史硏究≫, 一朝閣, 1981, 77쪽).의 곤란함을 들어 칙사파견 중지를 요청하였다.0075)≪淸案≫1, (1190)趙大妃喪에 詣宮禮物進呈通告, (1191)同上件의 謝絶, 고종 27년 4월 22일. (1246)趙大妃喪에 關한 件, 고종 27년 8월 21·27일. 이에 대해 그 요청을 거부하고 칙사의 경비를 청이 자담하더라도 강행하겠다고 하였다. 조선은 이에 맞섰으나 결국 칙사파견은 결정되었으며 칙사영접을 위한 국왕출영이 또한 문제가 되었다. 데니·르젠드르 등은 고종에게 칙사를 영접함에 있어 국왕이 출영하는 허례를 하지 않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원세개는 국왕의 출영이 없으면 입성, 조상할 수 없다고 위협함으로써 부득이 구례에 따라 교외까지 국왕이 나아가 칙사를 영접하였다.0076)≪李文忠公全集電稿≫권 12, 袁道來電, 광서 16년 5월 13일;寄朝鮮袁道, 9월 13일.

 이와 같이 원세개는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속방체제에 방해되는 일이면 어떠한 것이든 간에 위협과 힐책으로 조선정부에 군림하여 속칭「袁大人」으로 불리면서「감국대신」「조선의 왕」으로 비유될 만큼 조선의 내정·외교에 적극 간섭하였다.0077)알렌은 袁을 조선의 사실상의 지배자(the real ruler)라 하고 마치 식민지에 군림하는 총독행세를 하는, 무례를 자행하는 오만불손한 모습을 그의 일기에 쓰고 있다(≪알렌의 日記≫, 347쪽). 물론 그의 배후에는 청의 북양통상대신 이홍장의 지지가 강력하게 밑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원세개는 3년 기한으로 부임해 왔으나 이홍장에 의해 세 차례나 연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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