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1. 청의 간섭
  • 3) 청의 경제이권 확장

3) 청의 경제이권 확장

 19세기 후반 서양열강은 인도·중국 및 동남아 제지역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나 조선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생각은 없었다. 조선의 산업이 영세하고 전근대적이어서 서양열강의 경제적 관심을 유발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영국은 인도와 중국경영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 주력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자국의 중서부개척에 부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흥미를 가질 겨를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에 대한 관심은 서양열강보다 직접적이고 강력했다. 그것은 명치유신 단행 후 뒤따른 제반 개혁에 막대한 재정지출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정지출은 자국내의 고액지세 징수, 불환지폐 발행, 對美생사수출에 의해 충당하는 한편 조선 및 대만침략에 의한 약탈무역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일본은 조선침략의 제일보로서 운양호사건을 일으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이어 부속장정의 체결로 부산(1876)·원산(1880)·인천(1883)을 개항시켰던 것이다. 아울러 관세권의 부인, 일본화폐의 유통 및 치외법권의 특권을 얻어 정치적·경제적으로 조선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함으로써 1884년까지 일본은 조선과의 무역을 완전 독점하였다.0078)李光麟, 앞의 책, 254쪽.

 한편 청은 서양열강의 침략과 국내 민중봉기에 대비키 위한 양무운동의 전개로 동고의 여유가 없었으나 일본의 유구병탐과 조선진출의 적극적인 침략성에 놀라 대조선경제정책에 변화를 시도하였다. 먼저 청은 일본의 경제적 우선권을 제어하고 종속관계를 한층 강화할 목적에서 1882년 조선과「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고, 1883년에는「中江·會寧通商章程」,0079)金鍾圓, 앞의 글(≪한국사≫16), 168쪽. 1884년에는「吉林朝鮮商民隨時貿易章程」0080)≪高宗實錄≫권 21, 갑신 5월 26일.을 연이어 체결하여 전통적인 互市제도를 폐지하고 수시로 왕래·교역하는 것을 명문화하였다. 특히「조청수륙무역장정」은 청의 실질적인 조선지배 책동을 여실히 들어낸 것으로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명문화하여「청이 속방을 우대하는 뜻에서 맺은 것으로 각국과 더불어 일체 균점하는 예를 갖지 못한다」고 못박음으로써 종속관계를 기초로 한 독점적 특권을 규정하였다. 즉 영사재판권, 한성개잔, 내지채판권, 저관세율, 조선연해어채권 및 연해운항순시권, 의주·회령육로통상권 등 외교적 경제적 특권을 강제로 인정시킨 것이 그것이다. 이 통상장정은 종래의 종속관계원칙을 기본내용으로 하고 거기에 서양식 조문을 나열한 것에 불과하여 종속관계의 文證이 되었음과 아울러 청이 조선경제문제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었다.0081)金鍾圓, 앞의 글 참조.

 조·청간에 무역장정이 체결된 후 청국상인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이들의 상권을 보호·관리하기 위하여 이홍장은 陳樹棠을 조선총판상무로 임명·파견하였다.0082)≪李文忠公全集奏稿≫권 46, 陳樹棠總辦朝鮮常務片, 광서 9년 6월 21일. 진수당은 부임 후 조선의 3항구에 영사업무를 개설하고, 청상 지원을 위해 윤선왕래장정을 체결하였으며 또한 일본의 전례에 따라 조선과 地界章程을 체결하여 조계지를 설정하였다.0083)李陽子,<淸의 對朝鮮經濟政策과 袁世凱>(≪釜山史學≫제8집, 1984), 207∼208쪽.

 그런데 1883년 조선이 조·일통상장정, 조·영, 조·독통상장정을 체결함으로써 최혜국조관을 설정하게 되자 한성개잔·내지통상·토지소유 등 청의 독점적 특수 권익이 균점되기에 이르렀다. 청은 결과적으로 다만 영사재판권에 있어서만 종주국의 체통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에 갑신정변 이후 청은 조선의 외교감시와 더불어 적극적인 대조선경제진출을 기도하여 진수당을 소환하고 원세개를 주차관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후부터 청은 조선에서 실리적인 상권확장정책에 나서서 청상의 조선진출은 급격히 증가하였고, 청의 대조선무역은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일본의 독점적 진출은 크게 견제당하게 됨과 동시에 이후부터 청일전쟁 발발시까지 청·일의 무역경쟁은 치열하게 되었다.

 먼저 청상보호 및 통상교역의 진흥을 위한 청의 노력을 살펴 보고자 한다. 원세개는 부임 이래 상인들을 모아 상권개척을 의논하고 회관을 건립하고 조계를 확충하여 청상의 招來에 힘쓰는0084)≪朝鮮檔≫, 李鴻章致總署函兩件, 광서 12년 5월 25일. 한편 상선을 운항케 함으로써 청상을 지원하였다.0085)王信忠,≪中日甲午戰爭之外交背景≫, 116쪽. 그리고 용산·인천·부산·원산에 分辦商務위원을 배치하여 상무를 관할케 하여 관세수입 감독 및 상업진흥에 힘을 기울이고 경찰을 설치하여 사건을 처리하게 함으로써 청상보호에 나섰다.0086)≪統署日記≫(이후≪統記≫로 略함) 7책, 고종 22년 10월 21일;10책, 고종 23년 4월 3일. 청상들은 원세개의 정치적 보호와 상권확장정책에 힘입어 인천항을 기지로 하고 한성을 목표로 삼아 경인일대에 그 세력을 크게 확장시켜 나갔다. 이에 청상의 조선해관습격사건과 해관원 구타 및 해관원의 업무조사 방해 등의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1886년 청상의 인천해관 습격사건은 그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0087)李陽子, 앞의 글(≪釜山史學≫8집, 1984), 213∼214쪽.

 조선에서의 청의 상무진흥은 인천·원산·용산 특히 한성에서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원세개는 노골적으로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였으며 청의 하사관을 서울에 투입하여 청의 이사부 순사청 순사로 위장시켜 청국상인의 상점에서 교대로 근무케 할 정도였다.0088)韓㳓劤,≪韓國開港期의 商業硏究≫(一潮閣, 1976), 85∼86쪽.
金正起,<兵船章程의 强行(1888. 2)에 대하여>(≪한국사연구≫24, 1979), 241쪽.
조선은 당시 외국인의 내지 왕래를 위하여 통리아문에서 護照(여권)를 발급하였는데 원세개는 이 호조의 수시 발급이 불편하다 하여 통리아문에 空名護照(상인명·주소·상품명을 기록하지 않은 호조)를 수십 장씩 교부해 줄 것을 요구하여 이를 발급 받았다. 1891년 이후 공명호조는 월등하게 더 많이 교부되었는데0089)≪統記≫28책, 고종 28년 4월 27일;29책, 고종 28년 8월 10일;38책, 고종 30년 10월 25일. 이는 원세개가 청상을 비호한 대표적인 수법이었으며, 이 호조를 소지한 청국상인들은 마음대로 상품수량·종류·장소를 결정할 수 있는 특혜를 얻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청상들의 세력은 확대되고 그 거류민 숫자도 늘어나 당시 도성 안에는 조선무역계를 주름잡다시피 한 巨商 同順泰·廣大號·錦成東 등 20∼80家에 달하는 대상인들이 있었으며 그 상업세력은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상권을 확대시켜 가는 청상의 횡포에 대해 조선인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청상 내지 청국인에 대한 조선인의 반발은 대체로 구타·살상·절도·방화 등의 방법으로 나타났는데 1887∼1889년 사이에는 유난히 빈번하였다.0090)韓㳓劤, 앞의 책, 112∼114쪽. 이에 대해 원세개는 자위책을 수립하는 한편 조선정부에 협조를 요청하였다.0091)≪統記≫16책, 고종 25년 5월 7·13일. 그리고 시내 각처에 분산되어 있는 청상을 남문안 경운궁(덕수궁)과 동문 안의 창덕궁 두 궁궐 일대에 집거하도록 시달하였다. 아울러 이 일대 가옥·대지 매입시 價格平允에 협조하도록 한성부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후 즉시 성내에 산재한 청상을 두 궁궐 일대로 옮겨 살게 하니 한성내 두 곳에 중국인 거리가 생겨나게 되었고 점차 번화가인 남대문·종로쪽으로 세력이 번져갔다.0092)韓㳓劤, 앞의 책, 53∼54쪽. 지나친 청상의 한성개잔은 청상을 용산으로 이주케 하자는 문제로 대두되었다. 조청무역장정에서 인정된 한성개잔권에 대해 조선측은 처음부터 반대입장이었는데, 그것은 조선상인들이 청상과의 경쟁에 불리하게 되고 낙후하게 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청측의 일방적인 강요로 승인된 한성개잔은 최혜국약관으로 인해 각국 상인에게도 허용되게 되니 조선상인의 생존권은 외국상인들에 의해 위협받게 되었던 것이다.

 1885년 말부터 한성 내에서의 외국인 거주·통상권을 금지시키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0093)孫禎睦,≪韓國開港期 都市變化過程硏究≫(一志社, 1982), 182쪽. 한성개잔철폐를 주도한 김윤식은 개잔의 폐단과 撤棧의 시급함을 설명하였고0094)金允植,≪雲養集≫권 7, 漢城開棧私議. 조선정부는 청·일을 위시한 외국상인들을 도성에서 퇴거시키고자 하여 새로운 집단거류지로 용산을 선정하였다. 김윤식은 곧 원세개에게 한성철잔에 대한 공문을 발송하였다.0095)≪淸案≫10책, (462)淸商의 漢城開棧撤鋪와 龍山·楊花津等地 開棧要請, 고종 22년 12월 14일. 이에 대해 이홍장의 긍정적인 회답이 원세개를 거쳐 외아문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 2월이었으며 그 후속조치로 용산이전작업을 담당할 청국 상무영사가 임명되어 온 것은 6월이었다.0096)≪淸案≫10책, (465)淸商의 漢城開棧撤鋪에 대한 回答, 고종 22년 2월 19일;11책, (494)漢城華商 行棧의 龍山移設에 대한 同意, 고종 23년 2월 26일, (507)辦理龍山商務關防使用에 관한 通告, 고종 23년 6월 2일, (554)龍山商務委員 陳同書任命通告, 고종 23년 10월 28일. 이같이 청측의 초기 호의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영원히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후 청측의 묵살 때문인데 조선측의 누차에 걸친 이전호소를0097)≪淸案≫13책, (661)淸商行棧의 龍山遷移再要請, 고종 24년 9월 4일. 원세개는 완전히 무시하였다.

 1889년에 이르면 청은 오히려 청상보호를 이유로 남문안 덕수궁근처에 청국인거류지역을 하나 더 지정하게 하고 그 곳에 있던 조선인 가옥을 헐값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게 했을 뿐 아니라 도성 내에 청국경찰서를 설치하는 등의 횡포를 부렸다.0098)≪淸案≫16책, (959)南門內等處의 民屋을 淸商이 求買할 경우의 價格平允에 관한 照催, 고종 26년 5월 23일.
≪京城府史≫2권, 618쪽.
게다가 청상은 용산에도 활발히 왕래하였으므로 청은 용산에 이사관까지 파견하여 자국상인을 지원하였기 때문에 조선상인은 이중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0099)≪雲養集≫권 7, 漢城開棧私議. 종로시전을 비롯한 한성의 모든 조선상가는 몰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1890년 재차 파업시위를 하게 되고 이에 조선정부는 외아문 주사 邊錫運을 문의관으로 임명하여 국왕친서를 휴대시켜 청국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홍장의 냉담한 태도로 말미암아 성과없이 귀국하고 말았다. 오히려 이홍장은「조선정부가 청상의 점포이전료를 급히 조달하는 것이 더 급선무다」라고 하여 이전료 조달을 먼저 독촉하는 형편이었다. 종국에는 이전료 조달 불가능으로 외국상인의 한성철잔은 실시되지 못하였으며 1893년 이후는 용산·마포까지 상권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0100)李陽子, 앞의 글(≪釜山史學≫8집, 1984), 225∼228쪽.

 다음으로 평양을 통한 청상의 밀무역활동을 살펴 봄으로써 청의 경제이권확장의 실상을 고구하려고 한다. 초기 일본상인보다 한 발 뒤늦게 조선에 들어온 청국상인은 부득이 미개항구 평양을 근거로 밀무역을 자행하며 일상과 경쟁을 벌였다. 통상장정 체결 이후 왕래는 더욱 활발해졌고 원세개의 상권확장정책에 힘입어 청상은 적극적으로 밀무역을 행하게 되었다. 潛商행위는 조약상의 개항구를 통하지 않고 미개항구를 거쳐 들어와 각 지방관에게 내지세·관세·浦稅를 납부하고 마음대로 물품을 교역하는 것으로, 조선연안에서의 외국상인 밀무역은 그 규모가 세 개항장에서의 무역액과 거의 동일할 정도였다.0101)≪李文忠公全集≫譯書函稿 권 19(附件, 赫總稅務司面遞節略), 광서 15년 7월 22일. 청의 잠상들은 공공연히 조선연안 일대를 드나들며 밀수품을 점검하는 조선세관원을 구타하거나 민간인에게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은 물산이 풍부한 평양지역이 심하였는데 대국인을 자처하는 청상은 주단·잡화·은괴 등 밀수입품으로 조선의 곡물과 교환하였으며 세금을 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0102)李陽子, 앞의 글, 230∼231쪽. 청국 잠상의 발호가 갈수록 심하여짐에 따라 조선정부는 원세개에게 밀무역 근절을 요청하는 한편 정부로서도 밀무역방지조치를 취하고 이 조치를 위반한 지방관을 파면하기도 하였다.0103)≪統記≫21책, 고종 26년 7월 18·20·21·22·24·29일, 동년 8월 4·8·16일. 원세개는 표면상으로 동조하는 척 할 뿐 사실은 밀무역을 묵인하면서 단속에 전혀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잠상발호의 책임을 조선 지방관에게 전가하였다.0104)위의 책, 권 21, 고종 26년 7월 29일.

 이와 같이 청의 잠상이 성행하자 인천항무역이 떨치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일본상인의 타격이 컸다. 이에 일본대리공사는 조선정부에 항의하여 청국과의 이익균점을 요구하고,0105)위의 책, 권 20, 고종 26년 5월 25·26·27일. 평안도연안에 개항장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였다.0106)위의 책, 권 22, 고종 26년 9월 21일. 그러나 원세개는 이에 강경한 태도로 맞섰으므로 조선정부는 일본에 대해 평양개항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0107)李陽子, 앞의 글(≪釜山史學≫8집, 1984), 233∼234쪽. 이와 같은 원세개의 모든 행위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兵船章程의 강행이었다.

 이미 조청무역장정 7조 병선조항에서 청은 초상국 윤선정기항로 개척과 함께 청 병선(군함)의 조선연해 및 항구의 자유왕래권, 조선 海防의 청국담당, 청병선 관리관의 인천파견 등의 중요 내용을 포함시키고 있어서 일본에 뒤진 조선에서의 경제침탈을 만회하고자 하는 청의 기본정책을 숙지한 바 있다.0108)金正起,<兵船章程의 强行(1888. 2)에 대하여>(≪한국사연구≫24, 1979), 221쪽. 그런데 원세개는 부임 후 곧 무역장정내의 군사조항을 더 보충하기 위해 병선장정 6조항을0109)金正起, 위의 글, 232쪽. 독자적으로 조선에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 병선장정의 내용을 풀어서 설명해 보면, 병선의 왕래 및 청 해병의 하선과 승선시 조선해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 원세개의 총리관청 산하 각 개항장 근무 문무관료에 대한 공명호조 발급에 따른 밀무역 방조, 그리고 군함에 근무하는 최하층 계층인 水夫와 이사청의 말단직원 급사에 대해서도 해관의 검사·심문을 받지 않는다는 것, 청조계 내에서의 완벽한 치외법권의 시행 등이다. 이는 결국 무역장정 7조에 누락된<兵船不尊守海關章程>의 내용을 보강함으로써 청의 군인·관료·상인 등의 병선에 의한 밀수행위를 합법화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조약내용은 열강에게 적용되지 않는, 중국에게만 독자적으로 부여되는 특혜였다.

 이 병선장정은 원세개의 강요로 1886년 2월 김윤식과 원세개간에 체결된 후 조러밀약설의 회오리 속에 보류된 채 있다가 1888년 1월부터 시행되었다. 그것도 원세개의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실시 통고에 의한 것이었다.0110)金正起, 위의 글, 228쪽;≪淸韓論≫, 49∼50쪽. 이 결과 청병선에 의한 조선간섭, 그리고 청병선을 통한 무관세무역의 부활로 청병선의 밀수가 합법화되었으며 청병선에 의한 청상선보호 및 청어선의 보호가 보장됨으로써 청의 조선에 대한 경제적 약탈은 극대화되었다. 청의 이러한 商兵정책 확대는 결국 일본과의 경쟁적 경제침탈에서 일본을 앞지르는 기본적 원인이 되었다.

 당시 중국이 경험해 왔던 서구자본주의 침략방식과 원세개의 터무니없는 억지가 비합리적으로 결합된 이 병선장정의 강행은 1885년부터 1894년까지 원세개가 자행한 대조선정책의 기본골격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며, 당시 조선을「원세개의 조정」이라 일컬을 정도로 청의 세력을 절대적으로 확대시킨 원세개의 기본자세를 조명해 주는 하나의 표준적 사례라 할 것이다.0111)金正起, 위의 글, 220쪽. 데니의 말대로 원세개는 그 자신이 바로 밀수업자(潛商人:Smuggler)이었으며 외교의 무법자(Diplomatic Outlaw)였다.0112)≪淸韓論≫, 54쪽.

 다음은 輪船 운항문제를 둘러싼 청의 경제이권 확장에 대해 살펴 보겠다. 임오군란 이후 청상의 조선진출이 늘어나자 청은 해운업에도 손을 뻗치게 되어 진수당은 조선정부와 이미 초상국윤선왕래장정을0113)李光麟, 앞의 책, 164쪽. 이 조약으로 배는 上海·煙臺·나가사끼까지 운항하였는데, 운항적자가 생기면 조선이 인천해관수입으로 손해배상한다는 조항을 삽입하여 청의 경제이권을 강제하였다. 그러나 이 항로는 타산이 맞지 않아 수개월 후 폐지되었다. 체결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은 조선근해에서의 해운업을 독점하는 형세였고, 독일상사의 기선도 남서부 조선근해의 곡물수송을 일부 맡고 있는 형편이었다.0114)李陽子, 앞의 글(≪東義史學≫3집, 1987), 146쪽.

 원세개가 주차관으로 부임한 후 일상·독상을 억제하고 청상을 보호함과 동시에 통상·교역을 진흥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청의 초상국 윤선을 조선연해에 운항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종주국의 체면을 유지하는 데도 필수적이라 보았으므로 곧 이홍장에게 건의하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 결과 중국해관과 초상국, 그리고 청상사 동순태·쌍성태 등이 협력하여 기선 廣濟輪을 건조·운항케 되었다. 이 배는 20일에 한 번 상해·인천간을 왕래하며 청상의 운수업무상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초상국의 경영 부실로 이 항로는 결항이 잦았으므로 청상의 불평이 컸고, 따라서 일본윤선을 이용하는 자가 생겼다. 원세개는 이미 일본 배를 타지 않는다는 서약을 청상들에게 시킨 바 있었으므로 더욱 강경하게 서약엄수를 요청하니 일본은 국제항해권에 위반된다고 서약해제를 수차 요청하였으나 잘 처리되지 못하였다. 1890년 이후 일본은 서울·인천간 운송권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으므로 원세개는 이 항로도 청이 차지하여야만 청상의 통상·교역이 증진된다고 생각하여 청상사를 구슬려 소윤선 구입을 위한 자금 조달에 나섰다. 때마침 조선은 차관상환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므로 청에 10만냥 차관을 요청하였다. 원세개는 이홍장과 의논하여 10만냥 차관을 허락함과 동시에 이 기회에 윤선운항권을 실현시키고자 하여, 청상사 동순태로 하여금 10만냥을 빌려주게 하고 50톤급 소윤선 두 척을 건조하여 경인간에 왕래케 하였다. 이때 이 두 척의 배는 명목상으로는 조선접운국 소속으로 하고 실제로는 동순태가 관리하게 하였다. 이 항로 또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으므로 운영난에 봉착하였지만 보조를 하면서까지 강행해 나갔다. 이처럼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청이 조선근해의 각종 항로유지에 노력한 것은 경제적 이권에 앞선 강한 정치적 의도로서 번속국에 대한 종주국의 체통 유지가 그 목적이기도 하였다.0115)李陽子, 위의 글, 147∼151쪽.

 다음으로 조선해관에 대한 청의 간섭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해관은 창설 당초부터 다분히 타율성을 지니고 있었다.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의 주선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고빙하여 1883년 조선해관을 개설하고 인천·부산·원산에 각기 해관을 설치하였다. 처음 설립된 조선해관은 여러 면에서 중국의 해관을 본받았다. 총세무사가 서양인이었고 각 항의 세무사 및 직원들도 모두 서양인으로 충당되었던 점이 그것이다.0116)李光麟, 앞의 책, 227∼228쪽. 묄렌도르프에 이어서 임용된 사람은 청의 총세무사인 하트가 인선한 미국인 메릴이었다. 묄렌도르프와 메릴은 둘 다 중국이 추천하였으나 그 신분과 권한은 현저히 달랐다. 전자는 조선정부의 고빙을 받아 취임하여 조선에 대한 각종 개혁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직책이었으나(외아문 협판, 해관의 총세무사, 전환국 총재 등을 겸임) 후자는 중국 총세무사의 지휘하에 파견되었고 그 신분은 여전히 중국의 해관원이었으며 그 직책은 조선총세무사직 외에 다른 일은 맡을 수 없었다. 게다가 조선해관을 중국해관에 예속시키는 임무를 띠고 부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메릴은 취임 이후 착실히 중국해관의 훈령에 따라 행동하였는데 조선해관의 인사조치는 중국총세무사 하트의 지령에 의한 것이며 아울러 주차관 원세개의 양해를 얻어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조선해관의 인사권은 완전히 중국 수중에 있었고, 조선해관에 고용된 서양인의 기본봉급도 조선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국해관측이 지급하였으므로 사실상 조선해관은 청국해관의 부속기구로 변한 모습이었다.0117)高柄翊,<朝鮮海關과 淸國海關과의 관계의 변동>(≪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대출판부, 1970), 479∼482쪽. 조선총세무사는 중국해관에 반드시 수입·수출품의 목록, 징수된 세금 및 각 해관의 경비지출에 대해 상세한 정황을 보고해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조선해관은 하트의 견제를 받았고 한편으로 원세개의 제재를 받았는데 이 두 사람의 목표는 청의 종주권을 공고히 하는 데 있어서 일치하였다. 특히 하트는 청국해관과 조선해관을 완전 병합하여 자신이 조선해관의 총세무사직도 겸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어서, 1886년 상해해관 造冊處에 명하여 조선해관의 분기별 보고서를 청국해관의<貿易總冊>에 부록으로 합간하게 하였다. 그리고 메릴에게 조선의<貿易情形>의 조책을 중국해관에 의뢰토록 지시하였다. 이같은 조선해관보고서의 청국 것과의 합간은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대외적으로 홍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0118)高柄翊, 위의 책, 486쪽.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중국해관에 조선해관을 예속시키는 임무를 띠고 부임한 메릴이 열강의 각축장이던 조선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로 청의 독단적인 종주권 강요에 어느 정도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다는 점이다. 1887년 주미공사 파견시 조선측을 두둔하였으며, 창궐하는 밀수를 막고 관세징수에 따른 세수증가를 위해 밀수취체 및 평양개시를 원세개에게 청하였으며 1889년에는 고종의 청을 받아 프랑스은행으로부터 관세담보의 차관을 기도했던 것이 그것이다. 결국 한결같이 원세개의 방해로 실패하였고 종국에는 원세개와의 불화로 면직당하였던 것은0119)高柄翊, 위의 책, 491쪽. 앞서 본 바와 같다. 메릴의 퇴직후 원세개의 지지로 쉐니케(J. F. Schaenicke)가 총세무사서리로 3년간 재임하였는데 그 또한 조선의 자주독립운동을 동정하여 원세개의 질책을 받기도 했다.0120)林明德, 앞의 책, 183쪽. 그 후 하트의 제안으로 청측은 인천세무사 모르간(F. A. Morgan)을 쉐니케에 이어 서리로 취임시키려 하였으나 조선측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1893년 브라운(S. M. Brown)이 임명되면서 겨우 합의를 보았다. 이같이 조선은 해관자주권회수를 위해 수차 논쟁을 벌이고 청의 인사권장악에 저항하여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는 가능하지 않았다.0121)李陽子, 앞의 글(≪東義史學≫3집, 1987), 120∼121쪽.

 마지막으로 전선·통신분야에 대한 청의 간섭과 이권확장 노력을 살펴 보겠다. 일찍이 조선의 電信사업에 관심을 가진 나라는 일본으로서 병자수호조약 체결 이후 곧 부산에 우편국을 개설하였다. 이후 1884년에는 부산·나가사끼간 해저전선을 부설하고 일본전신국을 부산에 개국하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 설치된 최초의 전신시설이었으며 정치적 목적에서 만들었던 것이다.0122)≪韓國電氣通信 100年史≫(체신부, 1985), 77쪽.

 이처럼 일본이 진출하자 청은 조선의 정치·외교·군사·경제적인 면에서의 직접지배를 위하여 무엇보다 전신시설이 급선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청은 조선에 전선을 가설하고 이를 자국의 전신시설에 연결시킬 계획을 수립하였다. 여순→봉황성→한성에 이르는 육로전선 가설계획이 나오자0123)≪朝鮮檔≫吳大澂奏摺, 광서 11년 정월 3일. 이홍장 또한 이에 찬동하고 적극적으로 방법 강구에 나섰다. 일본의 조선전신권익의 침탈을 방지하고 중국의 조선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드디어 조·청간에 1885년 전선조약을 처음으로 체결하니 바로 의주전선조약이었다. 이 조약에서 주목할 것은 중국전신국이 10만냥을 조선에 차관을 제공하여 육로전선을 가설하고, 가설 후 25년간 조선은 타국에게 다른 어떤 수륙로전선의 가설도 허락해서는 안되며 또한 전신관계 일체의 일은 모두 중국이 대신 관리하며, 이후 조선정부 당국이 전선의 확충·증설을 할 경우라도 중국전신국의 승인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다.0124)≪韓國電氣通信 100年史≫, 78∼79쪽;≪高宗實錄≫권 22, 을유 6월 6일.

 이후 곧 가설된 것이 한성-인천간 전신선으로 국내에 가설된 최초의 전선이며 한성전보총국 개국과 동시에 개통되었다. 연이어 한성-의주간 천여 리에 걸친 가설공사가 완공됨으로써(1885. 10) 중국은 물론 세계 각국과의 통신이 개통되었다. 이 京仁·京義간 전선을 西路電線이라 불렀으며, 물론 청의 차관자금과 기술로 이루어졌고 운영도 중국전신국〔華電局〕이 맡았다.0125)위의 책(체신부, 1985), 81∼83쪽. 이 전선이 가설되자 일본은 앞서 체결한 해저전선조약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조선정부에 항의함과 동시에 한성·부산간 전선가설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1885년 11월 일본과 해저전선조약 속약을 체결하고0126)위의 책, 97쪽;≪日本外交文書≫18권, 168∼173쪽(機密 第177號, 184號). 청국측에 가설을 대행시킨다는 조약을 원세개가 체결하였다.0127)≪韓國電氣通信 100年史≫, 97∼98쪽. 청은 남로전선 代設을「의주전선조약」에 의해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고「中國代辦朝鮮陸路電線續款合同」이란 제목으로 조약을 맺었다. 이 전선은 南路電線이라 하였는데 청이 가설권을 장악하였지만 수차 청측의 공사가 지연됨에 따라 일본의 독촉도 심하고 또한 조선이 독자적으로 가설하고자 하여 새로이 조선전보총국을 창설하고(1887. 3) 직접 가설에 나섰다. 물론 청국과는 다시 조선이 自設해도 좋다는 윤허의 조약을 체결하고0128)위의 책, 101∼102쪽. 7條로 체결된 조약 명칭은「中國允讓朝鮮自設釜山至漢城陸路電線議定合同」이다. 난 뒤였다. 이와 같이 하여 우여곡절 끝에 남로전선은 1888년 6월에야 개통되었다. 이 전선은 서로전선과는 달리 조선정부가 가설·운영한 만큼 독자적인 전신규정과 최초의 전보장정이 제정되어 한글로 된 전신부호도 제정하여 사용하였음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전신사업 경쟁은 청·일간의 대조선정책 과제 중 큰 것이었는데 남로전선 개통 후 서로전선이 큰 타격을 받아 전혀 경비수지도 맞추지 못한 채 적자가 누적되었다.0129)≪淸季外交史料≫권 76, 4∼6쪽. 적자이유는 중국관보는 무료였으며 각 분국의 지출이 과다하였고 일본이 전적으로 남로전선을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원세개는 매년 5천냥씩 조선정부가 보조금을 지급케 함으로써 억지 유지는 하였으나 조선정부도 전선회수 목적에서 재정곤란을 이유로 보조금 지급을 중지하였다. 아울러 의주선 회수를 원세개에게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원세개는 조약위반이라고 반박·배척하였으며 이홍장도 이 전선은 군사기밀상 견지하여야 한다고 고집하였다.0130)≪李文忠公全集電稿≫권 10, 43쪽, 袁道來電, 광서 14년 12월 27일;권 11, 14쪽, 寄朝鮮袁道, 광서 15년 3월 24일.

 조선은 원세개의 간섭을 못마땅하게 여겨 중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독자적으로 元山線을 가설하고자 하였다. 이 계획은 외교고문 데니가 발안한 것인데, 한성에서 원산을 경유하여 함경도에 이르는 이른바 북로전선을 설치하고 이를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전선에 연결시키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도 러시아의 조종을 두려워하여 반대하였고, 청측은 의주전선조약규정을 들어 강한 압력을 가하였으므로 가설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이는 조선측의 서로전선 소멸의도를 청이 간취하였기 때문이었다.0131)≪韓國電氣通信 100年史≫, 105∼106쪽.

 비록 이 계획은 무산되었으나 조선정부의 의욕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준비도 갖추고 있었던 만큼, 단번에 두만강변까지 진출하여 러시아전선과 연결시키기는 어려우므로 우선 함흥까지의 개설을 시도하였다. 1890년 봄 조선정부는 화전국에 우선 한성에서 춘천 경유 원산에 이르는 천여 리의 전선착공을 양해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의주전선조약 내용 중, 25년간 조선내의 모든 전신확충에 대해 화전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청측은 여러 이유를 들어 완강히 반대하였다. 청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는 전선가설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러나 결국 청측의 반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점차 공사가 지연되었으며 1891년에는「원산전선조약」을 청측과 체결함으로써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이 조약의 내용은 조선정부가 모든 의주전선조약의 규정과 화전국이 가지는 권리를 지켜 주며 동시에 서울·인천·평양·의주의 4분국에 대해 비용을 매년 5천냥씩 지불함을 약속한다는 것이었다.0132)위의 책, 107∼108쪽. 이에 이르러 조선의 전선은 한성-인천, 한성-의주, 한성-부산, 한성-원산간 등 모두 4선이 가설되어 있었는데 명의상은 조선에 속한 것이었지만 사실상 청의 이권확장과 종주권 강화를 위한 일환으로 청국에 의해 조종·관리·감시·간섭을 받았던 것이다.0133)李陽子, 앞의 글(≪東義史學≫3집, 1987), 132∼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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