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1. 통치기구의 재정비

1. 통치기구의 재정비

 갑신정변은 조·청 양국간의 종속관계를 청산하고 전통적인 체제를 개혁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정변의 실패로 서구의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발전시키려고 노력했던 金玉均·朴泳孝·洪英植·徐光範 등 이른바 急進(變法)開化派는 살해당하거나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정계내에서 제거되었다. 아울러 ‘開化’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을 정도로 개항 이래 추진되어 왔던 개화·자강운동은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국의 후원을 받았던 金弘集·金允植·魚允中 등 漸進(穩健·時務)開化派는 의정부 중심의 전통적 행정기구의 요직을 차지하여 정변으로 인한 정치·사회적 혼란을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1884년 10월 19일부터 21일에 걸쳐 단행된 인사개편에서 갑신정변 당시 청국군의 개입을 袁世凱에게 요청하였던 沈舜澤은 領議政에, 정변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였던 김홍집은 左議政 겸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外衙門) 督辦에, 김윤식은 兵曹判書 겸 江華留守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協辦에, 어윤중은 宣惠廳提調에 각각 임명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민씨척족 중에서는 閔泳翊이 前營使에, 그리고 閔種黙이 漢城判尹에 등용되었을 뿐이었다.

 그후 1884년 11월 24일 김홍집은 特派全權大臣으로 임명되어 갑신정변의 善後처리를 위해 내한한 일본측 전권대신 井上馨과 漢城條約을 체결하였고, 어윤중은 11월 7일에 호조참판을 겸직한 데 이어 1885년 1월 8일에 貢市堂上에 임명되었다. 특히 김윤식은 12월 7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으로 승진되어 외교업무를 장악하면서 고종과 민씨척족이 引俄拒淸策의 일환으로 추진한 제1차 조러밀약을 무효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로써 조선정계 내에서는 청국의 후원을 받은 김홍집·김윤식·어윤중 등이 군사·재정·외교권 등을 장악하고 민씨척족세력을 견제하면서 국정을 주도하게 되었다.0143)尹致昊 著·宋炳基 譯,≪尹致昊日記≫上(探求堂, 1975), 295·301쪽;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編,≪淸季中日韓關係史料≫3(臺北: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1972), 1541쪽.

 한편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한 청국은 1879년 이래 취해왔던 조선에 대한 소극적인 견제정책을 버리고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청국의 대조선정책을 입안했던 北洋大臣 李鴻章은 정변발생의 근본원인을 고종의 우유부단과 민씨척족의 전횡, 그리고 일본의 책동에 말미암은 친일적 개화파의 반청 자주노선의 추구 등으로 파악하고 조선의 내정·외교에 깊숙히 관여·조정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던 것이다.0144)1885년 10월 11일 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袁世凱의 부임으로 본격화되었던 청국의 대조선 적극정책에 관해서는 林明德,≪袁世凱與朝鮮≫(臺北: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1972);Young Ick Lew(柳永益), “Yüan Shih-k'ai's Residency and the Korean Enlightenment Movement,” The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 5, 1984;權錫奉,≪淸末 對朝鮮政策史硏究≫(一潮閣, 1986);李陽子,<淸의 對朝鮮政策과 袁世凱>(≪釜大史學≫5, 1981) 등 참조.

 우선 청국은 온건개화파들을 앞세워 반청세력의 기반이었던 기구 및 제도를 개편함으로써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강화시켰다. 이러한 청국의 의도는 정변 직후 고종이 1884년 10월 20일부터 23일까지 下都監에 駐防한 淸軍의 營務處에 머물면서 總理營務會辦朝鮮防務 袁世凱의 권고에 따라 이뤄졌던 제반 조치에 잘 반영되어 있다. 고종은 10월 21일에 정변 당시 반포된 모든 傳敎를 환수하는 동시에 郵政局을 혁파하고 統理軍國事務衙門을 議政府에 ‘合付’시켰다. 특히 통리군국사무아문을 폐지한 것은 청국이 조선의 개화·자강사업을 통제하는 한편 이 기구를 통해 실권을 행사하고 있던 민씨척족세력을 견제·약화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어 11월 30일에 고종은 金允植이 代撰한 綸音을 반포하여 모든 국정을 議政府에 위임한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갑신정변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정국 운영권을 의정부에 넘겨주었다.0145)金允植,<常參綸音>,≪金允植全集≫下(亞細亞文化社, 1980), 82∼83쪽.

 또한 청국은 갑신정변 이후 점차 반청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던 고종과 민씨척족을 견제하기 위해 興宣大院君 李昰應의 放還을 추진하였다. 정변 직후 對日紛爭의 확대 방지를 최우선과제로 삼았던 청국 조정은 조선정계의 혼란을 야기할지도 모를 대원군의 석방에 반대하였던 입장을 바꾸어 1884년 12월 6일과 1885년 봄 두 차례에 걸쳐 李鴻章으로 하여금 고종에게 그의 귀국을 간청하도록 종용하였던 것이다. 이에 1885년 3월 20일 고종은 일단 李鴻章의 권고를 받아들인다는 태도를 표명할 목적으로 閔種黙 등 陳奏使일행을 청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0146)大院君의 釋還과정에 대해서는 申基碩,≪韓末外交史硏究≫(一潮閣, 1967), 265∼293쪽;權錫奉, 앞의 책, 305∼334쪽.

 그러나 대원군의 귀국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될 것을 염려한 고종과 민씨척족세력은 진주사일행의 출발을 고의적으로 지연시키는0147)陳奏使는 6월 11일에 비로소 고종에게 사폐하였다. 4월 27일에 부사를 趙秉式으로 교체하고, 5월 7일 承文院의 咨文撰出에 대한 退定을 지시한 것은 모두 고종과 민씨척족이 가능한 한 진주사의 파견을 늦추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동시에 4월 초순경에 閔泳翊을 天津에 파견하여 대원군의 석방을 저지시키려고 하였다. 이홍장은 민영익에게 대원군과의 화해를 권유하였지만, 대원군의 석방이 이미 결정되어 버렸음을 인지한 민영익은 이를 거절하고 귀국하였다. 그 결과 청국과 고종 및 민씨척족세력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한편 청국의 내정간섭이 갈수록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高宗은 정치적 권한과 입지를 확보·강화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이를 위해 고종은 3월 29일에 김윤식을 병조판서직에서 해임시켰으며, 4월 6일에 宣惠廳에서 경기도 여주·남양을 제외한 各邑許代를 時價代納토록 한 啓請이 事體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선혜청당상 어윤중을 파면시키는 등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친청파 관료들을 축출하였던 것이다.0148)高宗이 친청 인사들을 본격적으로 정부요직에서 몰아낸 시기가 李鴻章이 丁汝昌제독을 서울에 파견하여 청·일 양국군을 조선에서 공동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는 天津條約의 내용을 高宗에게 정식으로 통보했던 1885년 3월 26일 직후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아울러 고종과 민비는 閔丙奭·閔種黙·閔泳緯·閔世鎬·閔泳煥·閔肯(炯)植 등 민씨척족을 의정부와 6조, 그리고 승정원의 요직에 대거 등용함으로써 세력기반을 재강화하였다. 즉, 閔丙奭은 2월 24일에 어윤중의 후임으로 호조참판을 거쳐 3월 25일에는 도승지에, 閔種黙은 3월 29일에 김윤식의 후임으로 병조판서에, 閔泳緯는 4월 11일에 이조판서를 거쳐 5월 16일에 의정부 좌찬성에, 閔世鎬는 4월 11일에 호조참판에, 閔泳煥은 공조참판·지의금부사·승지를 거쳐 4월 11일에 규장각 직제학에, 閔肯(炯)植은 전라도병마절도사를 거쳐 4월 30일에 병조참판직에 각각 발탁되었던 것이다. 특히 5월 2일 평안도관찰사 겸 친군서영사 閔應植은 고종의 명령에 따라 평양의 병정을 이끌고 상경한 후 23일에 좌영사직에 올라 왕실의 보호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0149)菊池謙讓,≪近代朝鮮史≫下(京城:鷄鳴社, 1940), 180∼181쪽;韓哲昊,<閔氏戚族政權期(1885∼1894) 內務府 官僚 硏究>(≪아시아문화≫12, 1996), 262∼265쪽.

 이처럼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위축되었던 민씨척족을 정부 요직에 집중 배치한 고종과 민비는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4월 25일 청국에 의해 강제 폐지당했던 統理軍國事務衙門을 부활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이는 당시 청국의 대조선 내정간섭이 점차 강화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친청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던 김윤식 등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운영권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어 그 기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가 청국에 의해 통제받자0150)4월 25일부터 5월 25일까지 약 한달 동안 조·청 양국간에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부활을 둘러싼 의견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통리군국사무아문이 아닌 내무부로 그 명칭을 바꾼 것은 양국간의 타협에 의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5월 25일 고종은 다시 “軍國庶務를 總察”하는 동시에 “宮內事務를 兼管”할 內務府를 신설한다는 교지를 반포하였다. 고종과 민씨척족은 청국이 반대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청국에서 1653년 황제직속기구로서 宮內사무를 전담하기 위해 설립되었던 淸國의 ‘內務府’를 본떠 동일한 명칭의 내무부를 설치함으로써 군주권 내지 주권을 보존하고, 나아가 富國强兵에 관련된 개화·자강정책을 적극 추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내무부 설치 敎旨가 발표된 지 보름 뒤인 1885년 6월 10일에 의정부는 전문 15조로 구성된<內務府 新設節目>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이 절목은 당상관의 五衛都總官직 겸임 금지조항이 삭제된 것만 제외하면 통리군국사무아문의 그것과 내용상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0151)통리군국사무아문의 新設節目을 포함한 조직과 운영에 관해서는 韓哲昊,<統理軍國事務衙門(1882∼1884)의 組織과 運營>(≪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4) 참조. 따라서 내무부는 청국의 ‘내무부’에서 그 명칭을 따왔을 뿐 그 체제와 기능은 통리군국사무아문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0152)金允植도 內務府를 統理軍國事務衙門의 後身으로 보았다. 金允植,≪續陰晴史≫下(國史編纂委員會, 1960), 562쪽;≪時事新報≫, 1885년 9월 1일.

  內務府 新設節目 一. 衙門體統 一依政府例爲之爲白齊. 一. 衙門處所 以勤政殿東月廊爲之爲白齊. 一. 督辦 以正從一品 協辦 以正從二品 參議 以堂上正三品爲之 以督辦
有闕 則首協辦權差爲白齊. 一. 大臣堂郞 課日齊會爲白齊. 一. 軍國事務 獻可替否 究有至當爲白齊. 一. 堂上 依政院例 各有分掌爲白齊. 一. 如有進達事 請司謁入稟爲白齊. 一. 堂上一員 輪回入直爲白齊. 一. 仕進後 依政院例 仕記呈納爲白齊. 一. 堂郞 雖除拜臺職 勿拘仕直爲白齊. 一. 主事 勿拘文蔭武 以參上人擇差 副主事 亦以文蔭武參下及生進幼學擇 差而三十朔後陞六 依例陞付主事 分掌擧行 一員輪回入直爲白齊. 一. 堂上 除拜外任 則不得兼帶 以京畿監司守令四都留守 仍帶行公爲白齊. 一. 印信 令禮曹鑄成 一顆 以銀鑄成 用於御覽文蹟 一顆 鐵鑄成 用於各項
  文簿爲白齊. 一. 書吏八人 掌務書吏一人 大廳直三名 徒隷三十名 文書職三名 軍士三名
  朔料 以惠廳戶兵曹排給爲白齊. 一. 外他合行條件 追後稟旨施行爲白齊   (≪備邊司謄錄≫, 고종 23년 6월 9일).

 이 절목은 내무부의 조직과 그 구성원에 대한 규정인데, 그 후 좀더 세밀한 규정이 추가되었다. 특히 8월 9일에 고종은 총리대신 沈舜澤에게 “여러 堂上·堂下官들과 함께 잘 토의하여 章程을 만들어 終始之效를 도모할 것”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내무부의 조직과 운영체제를 규정한<內務府 分司章程·事務規則>이 마련되었다.0153)≪高宗實錄≫, 고종 22년 8월 9일;≪東萊府啓錄≫(≪各司謄錄≫12, 國史編纂委員會, 1984), 597∼598쪽. 고종은 8월 9일에 장정과 규칙을 만들도록 지시하였는데,≪東萊府啓錄≫에 의하면 8월 1일조에<分司章程·事務規則>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장정이 마련된 날짜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내무부의 신설절목과 그외 추가된 절목들, 그리고 分司章程·事務規則 등에 의하면 내무부는 의정부와 동일한 正一品衙門으로서 국왕을 보필하기 위해 궁궐 내 勤政殿 東月廊에 그 처소를 두었다.0154)고종은 청의 간섭으로부터 기밀을 유지하는 동시에 국왕의 역할을 증대시킬 목적으로 내무부를 궐내에 설치하였으며, 따라서 내무부는 근시기구의 성격을 갖는다고 파악되기도 한다. 연갑수,<개항기 권력집단의 정세인식과 정책>(≪1894년 농민전쟁연구 3≫, 역사비평사, 1993), 132∼133쪽. 이와 같이 내무부는 ‘機密重地’의 위상을 갖추고 大臣과 堂郞이 매일 모여 中央의 각 관청 및 軍營과 지방의 8道·4都의 대소 사무를 의정부의 예에 따라 낱낱이 보고받아 군사 및 궁내사무를 비롯한 국가 중대사를 논의·결정하였으며, 주요 사안의 경우 국왕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무부 堂上은 承旨가 국가의 중대 사안을 가지고 입시하거나 국왕이 殿座에서 정무를 처리할 때 항상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으며, 국왕의 행차 때 수행·보좌하는 임무를 맡아 보았던 것이다.0155)≪日省錄≫, 고종 22년 6월 24일;고종 24년 4월 10·13일.

 내무부는 總理大臣을 수반으로 해서 正·從一品의 督辦, 正·從二品의 協辦, 堂上正三品의 參議 등 堂上官과 文·蔭·武官 및 生員·進士·幼學 등의 배경에 구애없이 선발된 主事와 副主事 등 堂下官, 그리고 書吏·掌務書吏·大廳直·徒隷·文書職·軍士 등 관리직으로 구성되었다. 총리대신은 당상관이 상의해서 마련한 各司의 사무를 보고받아 결정·처리하는 내무부의 최고위직이며, 독판은 각사의 업무를 총괄하는 실질적인 책임자였고, 협판과 참의는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로서 각각 독판과 협판의 직무를 보좌하였으며, 주사와 부주사는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리였다.0156)<事務規則>,≪東萊府啓錄≫, 고종 22년 8월 1일.

 내무부의 당상관과 당하관은 相避제도에 구애받지 않았다. 특히 당상관은 臺職을 포함한 중앙의 모든 관직과 지방관직 중에서도 경기감사·수령과 4도의 유수를 겸직할 수 있었다. 더욱이 1886년 9월에 이르러 군사업무를 담당한 병조판서와 중앙군영의 營使, 그리고 재정을 관할하는 호조판서와 선혜청당상 등이 내무부의 당상관직을 예겸하도록 하는 규정이 만들어짐으로써 내무부는 그 권한과 기능이 한층 더 강화되어 갔다.0157)이들 외에 大提學도 내무부의 당상을 예겸토록 하였다. 아울러 그후 정치권의 실세였던 민씨척족들이 대거 독판과 협판직에 진출하기 시작했다.≪日省錄≫, 고종 22년 6월 11일·고종 23년 9월 18일·고종 25년 9월 28일.

 이와 같이 내무부는 국왕의 직속기구로서 국왕을 보필하는 동시에 君主權의 강화와 개화·자강책을 추진하는 기구로서 출범하였다. 또한 그 업무를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당상관들로 하여금 군사와 재정을 포함한 중앙정부의 요직을 겸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점차 조선 중기의 備邊司를 방불케 하는 최고의 국정의결·집행기구로 발전할 수 있었다. 아울러 내무부는 비변사와 달리 그 堂郎이 상피제의 구속을 받지 않음으로써 특정 권력가문에 의해 운영될 수 있는 가능성도 농후하였다.

 내무부는 설치 당시 일시적으로 承政院의 예에 따라 吏·戶·禮·兵·刑·工務 등 6務로 조직되었지만, 곧이어 1885년 6월 20일경에 職制·修文·軍務·司憲·地理·工作·農務局 등 7局의 독자적인 편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어 6월 24일에 高宗이 내무부관리들을 처음 접견한 자리에서 그들에게 ‘利國便民’에 힘쓸 것을 당부한 후 내무부는 8월 1일경 7局을-예전의 통리기무아문·통리군국사무아문과 현존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조직과 동일한-7司로 개명하게 되었다. 이때 7사는 司憲局의 명칭만 典憲司로 바뀌었을 뿐이었다.0158)1885년 8월 1일에 7局이 7司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은 이 날자의≪日省錄≫에 주사와 부주사의 업무분장에서 地理司·軍務司·農務司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고 있고, 새로 발견된<內務府 分司章程>에 역시 7사의 명칭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가 있다.≪東萊府啓錄≫및≪日省錄≫, 고종 22년 8월 1일;김필동,<갑오경장 이전 조선의 근대적 관제개혁의 추이와 새로운 관료 기구의 성격>(≪한국의 사회제도와 농촌사회의 변동≫, 文學과 知性社, 1992), 53∼54쪽 참조.

  內務府 分司章程 一. 職制司 掌各官職薦撰賞勳啓文承宣外務等事. 一. 修文司 掌典禮學校圖書修史天文施醫記簿等事. 一. 地理司 掌各道山川道里治水監繕田地商務稅務財務漕運鑛山造幣典艦等事. 一. 農務司 掌裁種牧養堤堰漁獵煮鹽開拓等事. 一. 軍務司 掌各道水陸軍兵演操參謀兵器鎭堡運粮測量軍馬等事. 一. 典憲司 掌戶籍各道人口法律警察詞訟等事. 一. 工作司 掌各道工匠土木金石機器造船鐵道電線郵便橋梁製紙營繕織繰等事.   (≪東萊府啓錄≫, 고종 22년 8월 1일)

 이 장정에 의거하여 7司의 소관업무를 살펴 보면 직제사는 관리추천과 외교업무를, 수문사는 典禮와 문서작성·정리 및 교육업무를, 지리사는 조운·광산·조폐 등의 稅源발굴과 재정업무를, 농무사는 농수산업의 육성업무를, 군무사는 군대훈련·設鎭·군량마련·무기제조 등의 군사업무를, 전헌사는 법률 및 치안업무를, 공작사는 기기·조선·철도·전선·우편·교량·製紙 등 각종 근대적 시설의 설치·운영업무를 각각 관장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내무부는 외교·교육·재정·군사·치안·산업 등 국정 전반에 걸친 사무를 총괄하는 권한을 가졌다.0159)이들 7사의 업무를 통리군국사무아문의 6사와 비교해 보면, 군무사는 그 명칭과 기능이 동일하였으며, 직제사는 掌內司와 典選司, 지리사는 理用司, 농무사는 農商司, 공작사는 監工司의 그 소관업무를 각각 일부 계승하였고, 그외에 수문사의 직무가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내무부의 소관업무는 전통적 행정기구인 의정부·6조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4司 1學의 그것과도 상당 부분 중첩될 수 밖에 없었다. 예컨대 내무부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조직을 비교하면 외교방면에서 직제사와 掌交司가, 재정방면에서 지리사와 富敎司가, 개화기구의 운영방면에서 공작사와 郵程司가, 교육방면에서 수문사와 同文學이 각각 중복된 업무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0160)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4司 1學의 소관업무에 관해서는≪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章程≫(奎章閣 #21783) 참조.

 아울러 1885년 8월부터 1891년 11월까지 내무부 산하에는 개화·자강업무를 추진하기 위한 각종 기구들이 설치되었다. 내무부는 惠商公局을 개칭한 商理局을 비롯하여 典圜局0161)≪日省錄≫, 고종 22년 8월 24일. 전환국의 총판에 조폐사무를 관할했던 지리국이 아니라 공작사의 협판 閔泳煥이 임명된 사실은 아직까지 업무에 따른 올바른 인사행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鑛務局·轉運局·交換局을 지리사에, 機器局을 공작사에, 育英公院을 수문사에, 農業牧畜試驗場을 개칭한 種牧局을 農務司에, 鍊務公院을 軍務司에 각각 두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1885∼1894년간 내무부는 개화·자강에 관련된 모든 사업을 효율적으로 조정·관장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0162)내무부의 조직에 관해서는 韓哲昊,<閔氏戚族政權期(1885∼1894) 內務府의 組織과 機能>(≪韓國史硏究≫90, 1995), 9∼14쪽.

 이처럼 내무부가 신설되거나 개편된 자강사업 추진기구들을 그 산하기구로 편입시키는 방향으로 조직을 정비해 나감에 따라 그 소관업무가 중복되었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조직은 상대적으로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87년 4월 27일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그 기능이 이미 상실된 富敎司·郵政司와 同文學을 폐지시키고 예하에 외교·통상업무를 전담하는 6사만을 남겨놓게 되었다.0163)이 시기는 주차관 袁世凱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민씨척족세력과 반목상태에 있었던 金允植과 魚允中이 朴泳孝의 부친 朴元陽 장례사건으로 궁지에 몰렸던 시기이기도 하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조직 개편과정에 관해서는 田美蘭,<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 關한 硏究>(≪梨大史苑≫24·25 合輯, 1990), 223∼227쪽.

 이렇게 업무분야를 확정지은 내무부는 1887년 중반부터 1891년 11월 16일 交換局을 설치하여 화폐개혁을 시도할 때까지 7사와 그 산하기구를 통해 각종 개화·자강사업을 추진하는 동시에 청국의 대조선 종주권 강화정책에 대항하는 자주외교를 펼쳐 나갔다.0164)1887년 7월 24일에 7사의 印章이 만들어졌다는 점은 7사의 업무가 본격화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동년 12월 25일 “自今爲始 邊務事外務事軍務事狀啓 內務府啓下事 政院知爲”라는 교지는 내무부가 외교업무를 장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日省錄≫, 고종 24년 7월 24일;≪備邊司謄錄≫, 고종 24년 12월 25일.

 그러나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을 때 그들의 진압에 실패한 조선정부는 내무부 독판 민영준의 주장을 받아들여 청국군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 파병한 일본은 정부측과 농민군 사이에 全州和約이 맺어지게 되자 駐兵의 명분을 만들려고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단행하라고 촉구하였다. 이때 일본 특명전권공사 大鳥圭介가 조선측에 제시한<內政改革方案綱領>은 바로 內外政務를 궁중사무와 분리하고 의정부로 하여금 이를 총괄케 함으로써 ‘世道執權 弊制’의 本山이었던 내무부를 폐지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이었다.0165)<內政改革方案綱目>중 일본측이 10일 이내에 결정해 줄 것을 요구한 사항은 내무부중심의 권력구조 폐지와 내무부를 통해 권력을 행사해 온 민씨척족세력의 제거에 촛점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 編,≪舊韓國外交文書:日案≫2(高麗大學校出版部, 1967), 667쪽;日本外務省 編,≪日本外交文書≫27:1(東京:日本國際連合協會, 1936), #396, 586∼591쪽. 따라서 6월 8일 고종은 내무부 독판 申正熙, 협판 金宗漢과 曺寅承을 위원으로 임명하여 老人亭에서 大鳥공사와 내정개혁방안을 상의케 하는 한편 6월 11일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校正廳을 설치한 뒤 여기에 내무부의 당상관을 대거 등용하였다.0166)1894년 6월 13일에 행지중추부사 金永壽, 이조판서 尹用求, 호조판서 朴定陽, 병조판서 閔泳奎, 한성부판윤 申正熙, 행대호군 李裕承·金晩植·趙鍾弼, 협판 沈相薰·金宗漢·曺寅承·金思轍, 예조참판 朴容大, 개성부유수 李容稙, 한성부우윤 魚允中 등 15명이 교정청 당상에 임명되었는데, 그 가운데 과반인 9명이 내무부 당상관이었다.≪高宗實錄≫, 고종 31년 6월 13일. 그러나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불법 점령 후 일본측의 후원으로 집권한 대원군은 내무부의 관료들을 현직에서 축출함과 동시에 25일에 자기를 지지하는 친일개화파를 중심으로 軍國機務處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내무부는 新官制가 시행되는 7월 20일까지 명목상으로만 유지되었다가 폐지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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