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3. 독립외교의 추진

3. 독립외교의 추진

 갑신정변 이후 고종과 민비는 청국의 내정간섭에 반발하여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는 제1차 조러밀약을 추진하였다가 실패하였다. 이에 1885년 8월말 청국의 李鴻章은 대원군을 귀국시킴과 아울러 그에 대한 호송 명분 아래 袁世凱를 ‘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란 직함으로 파견하였다. 그후 원세개는 조선의 외교와 통상은 물론 국정 전반에 걸쳐 간섭함으로써 청국의 對朝鮮 종주권을 강화시켜 나가는 동시에 반청적 태도를 취하였던 고종 및 민씨척족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0196)Young Ick Lew, 앞의 글(1984), pp. 68∼71 참조.

 조·청 양국의 대립과 갈등은 1886년 7월초 고종의 제2차 조러밀약 추진과 그에 대응한 원세개의 국왕폐위 시도로 극에 달하였다. 제2차 조러밀약설은 고종의 측근인 金嘉鎭·金鶴羽·趙存斗·全良黙 등이 서울 주재 러시아대리공사 베베르(Karl I. Waeber)에게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해달라는 문서를 전달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조·러간의 교섭은 이에 반대하였던 민영익이 원세개에게 密報함으로써 중간에 탄로되고 말았다. 원세개는 조러밀약설을 바로 李鴻章에게 보고하는 동시에 청군을 파견하여 ‘昏君’ 고종을 폐위시키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복귀시킬 것을 건의하였던 것이다.0197)具仙姬,<갑신정변 직후 反淸政策과 청의 袁世凱 파견>(≪史學硏究≫51, 1996), 59∼69쪽.

 한편 조러밀약설이 폭로되고 원세개의 고종폐위계획에 접한 고종은 크게 당황하여 조러밀약 자체를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김가진 등 4명을 문서날조혐의로 유배시킴으로써 사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이홍장 역시 청군의 파견이 조선의 민심을 악화시킬 우려가 있고, 대원군의 세력이 고종을 능가하기에는 역부족이며, 러시아가 밀약설을 전면 부인하였기 때문에 원세개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써 고종의 조러밀약기도에 강경하게 대처하려 했던 원세개의 고종폐위시도는 무산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원세개는 조선의 내정간섭정책을 더욱 강경하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1886년 7월 29일 그는 러시아와 일본의 조선 침략야욕을 경계하면서 조선이 더 이상 서양 각국의 세력을 끌어들이지 말고, 청국의 啓導 아래 내치와 외교를 개혁함으로써 스스로 자강·자립을 도모해야 된다는 내용의<朝鮮大局論>·<時事至務十款>·<諭言四條>등을 조선정부와 고종에게 지어 보냈다.0198)≪高宗實錄≫, 고종 23년 7월 29일. 이들 문건에 대해서는 金源模,<袁世凱의 韓半島 安保策(1886)>(≪東洋學≫16, 1986) 참조. 요컨대, 원세개는 이 글들을 통해 조선이 청국의 도움없이는 열강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음을 강변함으로써 조선정부내의 반청운동을 차단하고 국정 전반에 걸친 청국의 발언권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었다.

 고종은 한편으로 원세개의 의견을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여 당면한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청국의 강압적인 내정간섭을 견제하려는 자주외교정책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고종의 반청외교는 내무부의 주도 아래 추진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외교전담기구였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아문)이 원세개와 친청적 입장을 취하였던 김윤식 등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0199)高宗은 이미 내무부 설치 직후부터 각국 공사를 召見할 때 내무부의 독판이 入侍하는 것을 定式으로 삼아 외교에 관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놓았다.≪日省錄≫, 고종 22년 6월 28일·고종 23년 7월 29일·고종 25년 10월 29일 등 참조. 따라서 고종은 데니를 비롯한 르젠드르·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 등 미국인 고문관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아닌 내무부의 협판으로 임명하였을 뿐 아니라 1887년 12월 25일에 邊政 및 軍務와 아울러 外務 역시 내무부에서 관장하도록 조치하였다.0200)韓哲昊, 앞의 글(1995), 28∼29쪽. 이러한 기반 아래 내무부는 歐美常駐 公使團의 파견, 駐(天)津大員을 통한 袁世凱 소환운동 등 반청 자주외교를 추진했던 것이다.

 먼저 우리나라와 조약을 체결한 구미 각국에 전권공사를 파견하여 독립국가의 면모를 과시하자는 의견은 미국대리공사 겸 무관이었던 포크(George C. Foulk)와 묄렌도르프의 후임으로 내무부 협판 겸 외아문 장교사 당상에 임명된 데니, 그리고 민영익에 의해 제시되었다. 포크와 데니는 조선이 각국에 공사를 파견하면 상대국도 격이 높은 사절을 조선에 주재시키게 될 것이며, 이들이 청국의 독점적인 영향력 행사를 견제해 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고종은 각국에 파견된 조선공사가 그곳의 청국공사와 대등하게 상대함으로써 조선의 자주를 고양시키게 된다는 점도 고려하여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한 민영익은 외교적인 측면 외에 미국에 부산·인천·원산의 3항구를 저당하여 차관을 얻고, 이를 가지고 미국에 파병을 요청하여 청국의 횡포를 응징하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였다.0201)宋炳基,<소위 “三端”에 대하여>(≪史學志≫6, 1972), 96∼97쪽.

 이러한 권고에 고무된 고종은 구미 각국에 공사를 파견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먼저 1887년 5월 16일에 내무부 협판 閔泳駿을 駐日辦理大臣, 내무부주사 金嘉鎭을 駐日參贊官으로 임명·파견하고, 나중에 외아문 독판 徐相雨로 하여금 원세개에게 이를 조회토록 함으로써 청국의 반응을 살펴보았다.0202)≪日省錄≫, 고종 24년 5월 16일. 이어서 6월 8일 내무부는 전환국위원 全良黙과 安吉壽를 서기관으로, 교섭아문주사 安駉壽를 번역관으로 임명하였다. 특히 1886년 제2차 조러밀약을 추진하였던 김가진·전양묵과 반청사상이 강한 안경수를 주일공사관원으로 파견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청국이 주일공사의 파견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6월 29일 내무부는 이를 ‘先派後咨’의 선례로 삼아 朴定陽과 沈相學에게 먼저 내무부의 협판직을 부여한 뒤 그들을 각각 駐美全權公使와 영국·독일·러시아·이태리·프랑스 등 유럽 5개국 全權公使에 임명하였다.0203)≪日省錄≫, 고종 24년 6월 7일, 29일. 이처럼 일본 및 구미주재 전권공사에 임명된 인물들이 예외없이 협판내무부사의 직함을 가졌다는 점은 내무부가 반청 자주외교의 구심처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원세개는 주일공사와는 달리 구미전권공사의 파견을 청국의 대조선 종주권 강화정책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여겨 이를 강경하게 저지시키고자 하였다. 7월 2일 그는 구미전권공사의 임명사실을 이홍장에게 보고한데 이어 7월 24일에 그 대책으로 舊制에 의거하여 각국에 주차하는 조선공사가 청국공사에게 呈文·銜帖을 사용하고, 청국공사는 硃筆로 조회하는 이른바 ‘3條’를 준수토록 함으로써 조선이 청국의 속방임을 표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조·청 양국 사신간의 왕래문서에 상하관계를 표시하도록 한 3조가 이홍장에 의해 채택되자 원세개는 이를 조선정부와 파견될 조선공사, 그리고 각국 주재 청국공사에게 통보하였다. 고종은 3조가 조·청 양국공사간의 문서에 국한된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이의없이 수용하였다.0204)宋炳基, 앞의 글, 98쪽.

 원세개는 3조 문제가 타결되자 다시 8월 2일 조선정부가 공사파견에 대해 ‘先行請示’하지 않았음을 힐문하였다. 이러한 원세개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8월 7일 고종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과 참찬관 이완용을 소견하고 辭陛를 받아 그 다음날 出城토록 지시하였지만, 원세개의 강경한 항의에 못이겨 공사일행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8월 11일 고종은 賫奏官 尹奎燮을 李鴻章에게 보내 박정양의 파미를 요청하는 동시에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으로 하여금 청국측의 조치에 항의를 표시토록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주재 딘스모어(Hugh A. Dinsmore)공사는 물론 국무장관 베이야드(T. F. Bayard)의 훈령을 받은 청국주재 덴비(C. Denby)공사, 그리고 고문관 데니 등이 청국정부에 공식적으로 조선의 주미공사파견에 대한 청국의 부당한 방해활동을 항의·비판하였다. 결국 9월 24일 이홍장은 주미공사가 임지에서 소위<另約三端>을 준수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 파견을 허락하기에 이르렀다.0205)주미공사파견을 둘러싼 조·청·미 3국간의 교섭에 관해서는 宋炳基, 앞의 글, 100∼101쪽;스워다우트 지음·申福龍·姜錫燦 옮김,≪데니의 생애와 활동-韓末 外交 顧問制度의 한 硏究-≫(평민사, 1988), 145∼155쪽;金源模,<朴定陽의 對美自主外交와 常駐公使館開設>(≪藍史鄭在覺博士古稀紀念 東洋學論叢≫, 고려원, 1984), 364∼367쪽 참조. 청국이 내세운<영약삼단>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공사가 처음으로 각국에 도착하면 마땅히 먼저 청국공사관으로 나아가 具報하고 청국공사와 함께 外部로 나아가되 그 뒤에는 拘定하지 않는다.

둘째, 朝會公宴 및 酬酌交際 등이 있을 때 조선공사는 마땅히 청국공사보다 낮은 자리에 앉는다.

셋째, 交涉事大에 관계되는 緊要한 일은 조선공사가 마땅히 먼저 청국공사에게 협상한 후 그 지시에 따라야 한다(≪淸季中日韓關係史料≫4, 2379∼2382쪽).

 삼단은 조선공사에 대한 청국공사의 우월권을 인정케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전통적인 조공관계에 근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내면적으로 삼단을 꼭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이를 형식적으로 수용하고 구미공사의 파견을 실현시켰다.

 이와 같이 3개월간에 걸친 조·청간의 외교적 실강이 끝에 박정양 공사일행은 11월 12일 서울을 출발,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박정양과 함께 미국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행으로는 參贊官 李完用, 書記官 李夏榮·李商在, 飜譯官 李采淵, 隨員 姜進熙·李憲用, 武弁 李鍾夏, 垠率 金老美·許龍業, 그리고 이들의 안내책임자인 미국인 參贊官 알렌(Horace N. Allen) 등 총 11명이었다.0206)朴定陽,≪從宦日記≫2(≪朴定陽全集(竹泉稿)≫, 亞細亞文化社, 1984), 정해 10월 1일, 624∼625쪽.

 朴定陽은 10월 2일 제물포에서 미국군함 오마하(Omaha)號를 타고 釜山을 거쳐 10월 5일 長崎에 도착하였다. 그는 10월 7일 민영익을 만나기 위해 香港에 들렀다가 마카오를 거쳐 10월 24일 橫濱으로 돌아왔다. 10월 26일 그는 알렌일행과 합류하여 橫濱을 출발, 하와이를 거쳐 1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으며, 11월 18일(양력 1888년 1월 1일)에 드디어 미대륙에 상륙한 뒤 기차로 대륙을 횡단하여 11월 26일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박공사는<영약삼단>을 무시한 채 주미 청국공사 張蔭桓을 방문하지 않고 미국무성과 직접 국서봉정 절차를 협의하였다. 이에 대해 청국공사는 영약삼단의 준수를 촉구하였지만, 박공사는 정부의 明文이 없었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절하고, 12월 5일 백악관에서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대통령에게 國書를 奉呈하였다. 특기할 것은 국서에서 중국 연호가 아닌 조선의 개국 연호를 사용하고, 고종 스스로 청국의 황제와 동등한 지위를 표시하는 ‘朕’이란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려 한 점이다.0207)≪舊韓國外交文書:美案 1≫10, 317쪽.

 국서를 봉정한 후 주미공사관을 개설한 박정양은 알렌의 도움을 받아 데이비스(Robert H. Davis)를 조선정부의 필라델피아領事로 임명하였고, 각종 공식 외교행사와 연회에 참석하여 독자적인 외교를 전개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200만불의 차관을 얻어내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행정·입법·사법부의 주요 공공기관과 대학교·신문사·박물관 등 근대적 사회시설, 그리고 워싱턴기념비·남북전쟁 전적지 등을 시찰함으로써 근대적 제도와 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0208)박정양이 견문한 바는≪從宦日記≫(≪朴定陽全集≫2)와≪美行日記≫(≪朴定陽全集≫6) 참조.

 그러나 박정양은 청국측의 派美 허락조건이었던<영약삼단>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원세개의 압력에 굴복한 고종으로부터 소환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는 1888년 10월 12일 클리블랜드대통령을 예방하여 고별인사를 나눈 다음 이상재 등과 귀국길에 올랐다. 11월 27일 미국땅을 떠난 그는 12월 19일 橫濱을 거쳐 東京의 주일조선공사관에 여장을 풀고 국내사정을 탐색한 다음 1889년 3월 12일에야 비로소 釜山에 도착하였다. 그가 서울에 올라와서 고종에게 복명한 것은 미국을 떠난지 9개월만인 7월 24일이었다.0209)박정양일행의 귀국일정에 대해서는≪美行日記≫, 471∼548쪽 참조. 박정양은 최초의 미국견문기인≪美俗拾遺≫와 복명문답을 통해 미국의 제도와 문물을 상세히 소개함으로써 고종과 정부 관리들의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대미관을 형성·확산시키는 데 공헌하였다.0210)韓哲昊,<初代 駐美全權公使 朴定陽의 美國觀-≪美俗拾遺≫(1888)를 중심으로->(≪韓國學報≫66, 1992), 63∼88쪽.

 박정양이 고종에게 복명한 후 청국은 그의<영약삼단>에 대한 위반행위를 징벌하라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이로 말미암아 고종은 그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에 임명하려던 계획을 철회했지만 都承旨 겸 副提學직을 제수하였을 뿐 아니라<영약삼단>의 개정을 요구하였다.0211)1889년 1월 7일 고종이 “出疆使臣 無碍檢擬”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박정양에게 관직을 제수하려는 조치였다고 판단된다.≪日省錄≫, 고종 26년 1월 7일. 아울러 1891년 9월 6일 원세개가 일시 출국한 틈을 타서 고종은 9월 15일에 박정양을 호조판서와 내무부 독판으로 임명하였다. 이홍장은 박정양의 기용을 마냥 거부할 수만도 없었기 때문에 그를 중임에 서용하거나 공사직에 재임명할 수 없다는 조건에서 묵인해 주었지만<영약삼단>의 개정요청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의사를 표명하였다.0212)林明德, 앞의 책, 165∼167쪽.

 그럼에도 고종은 박정양의 후임으로 초대 주미전권공사의 일원이었던 이하영·이완용 등을 차례로 서리공사로 임명함으로써 대미외교를 지속시켜 나갔다.0213)장수영,<구한말 역대 주미공사와 그들의 활동>(≪재미과기협회보≫11-6, 1983), 37∼38쪽. 그리고 1893년 1월 28일 鄭敬源을 시카고 만국박람회(The Chicago World Fair) 出品事務大員으로 선임하여 명예사무대원 알렌과 함께 파견함으로써 미국과의 유대관계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정경원은 귀국 도중 일본에 머물면서 다량의 서적 구입에 몰두할 만큼 근대적 학문과 문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0214)杉山米吉,≪現今淸韓人傑傳:朝鮮國≫(東京:杉山書店, 1894), 34쪽.

 한편 박정양·이완용·이하영·이상재 등 초대 주미전권공사일행은 청국의 대조선 내정간섭이 심화되는 정세 속에서 반청 자주외교를 충실히 수행해냄으로써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親美 開化派로 대두하게 되었다. 일·러 양국의 조선 침탈을 견제하기 위한 세력균형책의 일환으로 조미조약의 체결을 알선·주도한 청국의 의도와는 달리 친미 개화파가 우호적인 미국관을 바탕으로 반청 친미외교의 실무를 담당하면서 정계에 대두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그들이 사행기간에 미국인 參贊官 알렌과 맺었던 인연은 三國干涉 후 친러적 인사들과 貞洞派를 형성하여 반일 친미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0215)韓哲昊,<甲午更張 中(1894∼1896) 貞洞派의 改革活動과 그 意義>(≪國史館論叢≫36, 1992), 39∼42쪽.

 이와 같이 자주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주미전권공사의 파견이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반면 유럽주재 전권공사의 파견은 실패로 돌아갔다. 沈相學에 이어 유럽 5개국 전권공사에 발탁된 趙臣熙는 홍콩에 머물면서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에 대한 청국측의 강경한 태도를 인지하고 정부의 부임 독촉에도 불구하고 1890년 1월 귀국해 버렸다. 또한 그의 후임인 朴齊純도 원세개의 압력으로 인해 서울에서 떠나지도 못하고 말았다.

 구미주재 전권공사의 파견과 더불어 고종이 추진한 반청운동은 청국정부에 원세개의 소환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 역시 고종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내무부에 의해 주도되었다. 1882년<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체결 교섭 당시 事大使行의 폐단을 내세워 추진된 ‘派使駐京’안이 무산되고, 그 대신 조·청 양국간에는 일반 공사보다 격이 낮은 ‘商務委員’을 상호 파견·주차시키기로 합의되었다.0216)金鍾圓,<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에 대하여>(≪歷史學報≫32, 1966), 138∼140·151쪽. 그런데 通商事務를 처리하는 駐津大員인 督理通商事務와 從事官·書記官 등에 대한 인사권은 애초부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아니라 내무부가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내무부는 고종폐위음모 이후 원세개와 고종간의 불화가 심화되자 주진대원으로 하여금 원세개 소환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원세개의 1차 임기가 만료되는 1888년 8월 초에 종사관 成岐運은 이홍장에게 원세개의 후임으로 馬建常을 임명해 줄 것을 의뢰하였고, 이어서 8월 27일에는 고종이 직접 이홍장에게 원세개의 교체를 요구하였다. 당시의 소환요청이유는 원세개가 임기가 만료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사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홍장은 조선의 요청에 응하는 것이 上國의 체통을 잃는 것이며, 더욱이 원세개를 대신할 마땅한 인물이 없다는 판단 아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1889년 5월 21일에 내무부는 민영익과 김가진의 주도 아래 독리통상사무·종사관·서기관 전원을 교체시키면서 재차 원세개의 소환 교섭을 추진하였다. 신임 독리통상사무 金明圭에게 주어진 임무는 표면상 귀국한 초대주미전권공사 박정양에 대한 이홍장의 선처를 부탁하는 것이었다.0217)≪日省錄≫, 고종 26년 8월 24일. 그러나 실제로 袁世凱의 조선내정간섭이 양국간의 관계에 커다란 손해를 입히고 있으므로 그의 후임으로 ‘公正明識’한 자를 선임·파견해 줄 것과 외교상의 자주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그의 주임무였다. 이에 대해 이홍장은 원세개가 조선을 보호한 공이 있는 만큼 조선에 계속 머물면서 그 임무를 다할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아울러 그는 비록 조선이 각국과 조약을 체결했어도 청국의 속방이고, 청국과 교섭하면서 자주적인 지위를 내세우는 것은 양국간에 수백년 동안 내려오는 명분과 기강을 도외시한 처사라고 하면서 원세개의 교체를 요구한 조선정부를 오히려 힐난하였다.0218)林明德, 앞의 책, 156∼157쪽.

 요컨대, 고종은 청국의 적극적인 종주권 강화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주미전권공사를 파견하여 자주·평등외교를 전개하는 한편 주진대원으로 하여금 원세개의 소환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청국의 반대로 말미암아 오히려 원세개의 권한이 더 강화되고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이 강제 소환당함으로써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내무부를 통해 주도했던 반청 자주외교는 조선의 국가적 독립을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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