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4. 개화정책의 추진과 좌절

4. 개화정책의 추진과 좌절

 갑신정변의 실패로 말미암아 정부내에서는 물론 일반 민중에게까지도 개화에 대한 거부반응이 확산되어 갔다. 더욱이 청국의 원세개는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함으로써 반청 자주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던 개혁지향적인 세력을 축출하는 데 진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무엇보다도 반개화의식을 불식시키고 개혁의 당위성을 확보하는 것을 당면과제로 삼게 되었다.

 우선 정부는 개화에 필요한 교육과 계몽사업을 가장 효율적으로 추진해가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갑신정변 당시 박문국의 신문시설 파괴로 발행이 중단된≪漢城旬報≫를 속간하기로 결정하였다.≪한성순보≫의 속간에 심혈을 기울인 인물은 친청파로 알려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 金允植이었다.0219)당시 친청파로 분류되었던 김윤식·김홍집·어윤중 등의 개화인식과 개혁활동에 관해서는 崔震植,<金允植의 自强論 硏究>(≪大邱史學≫25, 1984);原田環,<一八八◯年代前半の閔氏政權と金允植>(≪朝鮮史硏究會論文集≫22, 1985);李相一,<雲養 金允植의 政治思想硏究>(≪泰東古典硏究≫6, 1990);韓哲昊,<1884∼1894年間 時務開化派의 改革構想>(≪史叢≫45, 1996) 참조. 그는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반일감정이 비등했던 상황 속에서도 井上角五郞을 재고용하고 일본으로부터 인쇄기계와 활자를 구입하여 博文局을 재건립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12월 21일에≪漢城周報≫가 발간되기에 이르렀다.0220)李光麟,<漢城旬報와 漢城周報에 대한 一考察>, 앞의 책, 77∼82쪽. 김윤식이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한성주보≫창간호의 ‘周報序’에는,≪한성순보≫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자 신문의 발행을 바라는 여론을 수렴하여 창간을 추진하였다고 續刊의 동기를 밝히고 있다.0221)≪漢城周報≫, 1885년 12월 21일.

 ≪한성주보≫의 편집 방침은 “국가의 교섭과 관리의 陞黜에서부터 개항의 謠俗과 農桑사무와 商稅·時價의 高下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모두 기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침은 “국민들의 고통을 애써 찾고 막힌 것을 제거함은 물론이고, 利國便民의 모든 방법을 다 게재하여 정치가 上理에 도달”0222)≪漢城周報≫, 1886년 8월 30일.하게 한다는 전통적인 ‘求言’과 ‘制治’의 제도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한성주보≫가 단지 “명령과 敎戒가 행해지고, 이로 말미암아 상벌의 信實하고 명확함”0223)≪漢城周報≫, 1886년 7월 17일.을 드러냄으로써 기존의 전제군주체제를 강화하려는 官報의 성격을 띤 것만은 아니었다.

 또한≪한성주보≫의 창간 목적은 “백성의 고통을 힘써 찾을 뿐 아니라 아울러 세계 각국의 情形을 探訪하여 천하사람의 귀에 들려주고 천하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게 한다”0224)≪漢城周報≫, 1886년 8월 30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바로 ‘利國便民’의 방법을 모색하는 동시에 국민들을 계몽하고 견문을 넓히는 작업과 직결되어 있었다. 또한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나라도 저들과 같이 신보를 간행하여 백성들의 이목을 깨우쳐 주면 백성이 날로 富해질 것이며, 국가도 날로 강해져서 장차 천하를 호령하는 수레를 타고 저 西人들의 앞에 달릴 수 있는” 富國强兵을 이룩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0225)≪漢城周報≫, 1886년 7월 17일. 이로 보아 김윤식 등 온건개화파는≪한성주보≫를 만들어 자신들의 개혁목표가 바로 부국강병에 있음을 천명함으로써 개혁추진에 필요한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한성주보≫는≪한성순보≫와는 달리 국한문혼용이나 한글전용으로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국민계몽에도 앞장섰다.0226)예를 들어≪漢城周報≫제4호에는 총 18면 가운데 1/4 이상이 순한글로 기사가 쓰여져 있다. 李光麟,<漢城旬報와 漢城周報에 대한 一考察>, 앞의 책, 84쪽. 나아가≪한성주보≫는 한글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정부차원의 번역기관을 설치하여 각종 외국어서적을 한글로 번역·보급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한글의 우수성과 간편성이 세계적으로도 공인받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국민들에게 자국의 문화적 우월성과 자부심을 심어 주고자 노력했던 것이다.0227)≪漢城周報≫, 1886년 1월 12일.

 그러나 박문국은 원래 정부로부터 全州府의 소금·생선·담배, 平壤府 旅閣主人의 口錢 등에 대한 수세권을 배정받아 운영비로 쓰도록 되어 있었으나 잘 거두어지지 않았고, 구독료도 징수되지 않아 운영의 곤란을 겪었다. 그리하여 국민들에게 국제정세와 근대적 지식을 전달해 줌으로써 개화의식을 조장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던≪한성주보≫는 발행된 지 2년 반만인 1888년 6월 6일 박문국의 재정 적자로 말미암아 폐간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한성주보≫의 폐간 당시 김윤식·어윤중 등 신문 발행을 주도했던 온건개화파가 정부의 요직에서 축출된 점으로 미루어 반청적 입장을 견지했던 고종과 민씨척족세력이 정치적인 의도로 신문의 폐간을 방기했으리라 여겨진다.

 한편 근대식 농법과 전신 등 근대적 기술의 도입, 신식교육의 실시 등은 種牧局·育英公院·電報局(電郵總局) 등을 예하기관으로 둔 내무부에 의해 주도되었다. 우선 내무부는 농상사무를 권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農務牧畜試驗場을 산하조직인 농무사에 소속시켜 種牧局으로 개칭하고 그 堂上으로 하여금 전관케 하였다.0228)≪日省錄≫, 고종 23년 7월 15일;≪承政院日記≫, 고종 24년 12월 28일. 報聘使의 隨員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崔景錫이 귀국 후 모범농장의 설치를 국왕에게 청원하였고, 고종이 망우리 일대의 넓은 토지와 자금을 하사하여 1884년 초에 농무목축시험장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농무목축시험장은 뉴욕주재 명예총영사 프레이저(Everett Frazer)로부터 각종 농산물의 종자와 가축, 그리고 신식 농기구를 수입하여 품종을 개량하고 근대적인 농법을 도입했다.

 최경석이 작성한<試驗場各種目錄>에 의하면, 농장은 현재의 농업시험장과 다를 바 없는 많은 종류의 농작물과 야채, 과수들을 재배하고 있었다. 그후 농장에서는 이들의 재배법과 사용법을 소개한 해설서와 함께 수확물의 종자를 전국의 군현에 보내 재배하도록 권하였다. 또한 농장에서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우마 등의 가축도 들여와 품종개량과 사육방법을 개선하기도 하였으며, 버터·치즈까지 만들 수 있는 낙농업까지 계획하였다. 그러나 1886년초 최경석이 갑자기 병사하고 미국에 요청한 농업기사 역시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업은 방치상태에 놓여지고 말았다.0229)李光麟,<農務牧畜試驗場의 設置에 대하여>, 앞의 책, 205∼214쪽.

 내무부는 이 시험장을 農牧局으로 개칭하는 한편 1887년 가을에 영국인 농업기술자 재프리(R. Jaffray)를 고빙하여 그 경영 뿐 아니라 2년제 농업학교인 農務學堂을 설립케 하고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는 내무부가 장기적인 안목에서 농업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새 농법을 보급시킬 교육기관의 설립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계획 역시 재프리가 1888년 5월에 사망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중단되고 말았다.0230)≪統署日記≫1, 고종 24년 8월 23일·고종 25년 5월 19일.

 다음으로 내무부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체계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근대적 학문과 외국어를 교육하는 育英公院을 수문사 예하에 설치하고, 수문사 堂郞으로 하여금 그 사무를 겸관케 하였다. 원래 보빙사의 건의로 입안된 육영공원의 설립계획은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일시 중단되었다가 1886년에 비로소 헐버트(Homer B. Hulbert) 등 미국인 교사 3명이 도착한 것을 계기로 결실을 보게 된 것이었다.

 <育英公院 設學節目>에 의하면 공원에는 左院과 右院을 두었는데, 좌원은 젊은 문무관리 가운데 선발하여 통학케 하고, 우원은 15세에서 20세까지의 재능있는 자를 선발하여 기숙사생활을 엄격하게 시키며, 이에 필요한 운영비는 호조와 선혜청에서 반씩 공동 부담한다. 교과내용은 책읽기와 글쓰기부터 시작하여 수학·자연과학·역사·정치학 등을 배우며, 시험은 월말과 연말, 그리고 3년 뒤에 ‘大考’라는 시험을 치뤄 급제하면 졸업시켜 벼슬을 주도록 하였다.

 육영공원의 학생모집 현황을 살펴보면, 1886년에 좌원 14명과 우원 21명 도합 35명을 선발하고, 1887년에 좌원 6명과 우원 14명 합계 20명, 그리고 1889년에 우원 57명을 추가로 모집하여 총 112명에 달하였다. 최초의 입학생은 모두 양반 고관의 자제였고, 교사들은 영문 교과서를 가지고 영어로 강의하였다. 처음에는 학생들의 지적 능력이 높고 근대적 학문에 열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학습진도도 매우 빨랐다. 그러나 정부의 명령 내지 부형의 권유로 입학했던 학생들은 육영공원의 졸업 여부와 관계없이 관직을 보장받고 있었으므로 엄격한 학칙, 교사들의 철저한 교육에 반발하여 병이나 관청업무를 핑계로 결석을 일삼게 되었다. 또한 공원의 운영을 담당하였던 閔應植·閔種黙·閔丙奭·閔泳達 등 민씨척족도 공원 운영비를 횡령할 정도로 신교육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의 행동을 방관하였고, 심지어 그들의 요청으로 겨울에는 수업시간을 하루 6시간에서 4시간으로 단축하고 좌원의 학생들은 3일마다 한번씩만 수업받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교사들은 서양식방법을 강행하려 했으므로 학생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더욱이 육영공원은 학생들을 충원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재정마저 부족하여 교사들에게 제대로 봉급을 지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1894년에 폐지되었다.0231)李光麟,<育英公院의 設置와 그 影響>, 앞의 책, 104∼125쪽.

 육영공원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지 못한 직접적인 원인은 학생의 신분을 양반고관의 자제나 고관들이 추천한 사람들로 제한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상대적으로 꺼려하는 사람들에게 근대적 문화를 수용하도록 조처한 데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일반평민들에게까지 신학문에 접할 수 있도록 한 외국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이념과 정책 밑에서 새로운 정신을 구현하는 교육기관은 구래의 전통과 특권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외국선교사들에 의해 설립·운영되었던 것이다.

 육영공원 보다 몇달 빠른 1886년경에 설립된 培材學堂과 梨花學堂은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스크랜턴(Mary F. Scranton)에 의해 세워졌다. 이 두 사람은 외교관계가 수립된 후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조선에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들로서 기독교 전도사업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먼저 교육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두 학당은 우리나라 최초로 일반평민들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근대식 학교가 되었다.

 아펜젤러목사는 주한미국공사관부 무관 포크중위를 통해 국왕과 학교설립문제를 놓고 교섭을 벌여 1886년 여름 서울 서소문동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학생 모집은 2명으로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67명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배재학당은 학생들이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自助部를 설치하였다. 한편 스크랜턴은 선교사업의 중요한 분야의 하나로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 준비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도착 1년 후 1명으로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성교육기관으로서의 이화학당은 학교운영에 있어 배재학당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일반의 냉대를 받았다. 이는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는 달리 격하되어 있던 당시의 사회제도와 풍조 속에서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화학당은 그 다음 해에 학생수가 46명으로 불어났다. 더욱이 고종과 정부측도 나라의 문명개화에 기여하는 두 학당을 정식으로 인정해 줌으로써 발전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1887년 고종은 두 학당에 각각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란 교명을 하사했을 뿐 아니라 편액까지 내렸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일반대중의 호응과 관심이 자연히 증대될 수 있었다.0232)孫仁銖,≪韓國開化敎育硏究≫(一志社, 1980), 71∼74·130∼135쪽.

 한편 장로교 선교사로는 1886년말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목사가 자비로 학교에 올 학생이 없었던 당시의 실정을 고려하여 전원을 기숙사에 수용하여 숙식을 제공하는 일종의 기숙학교를 세웠다. 그리하여 고아원, 예수교학당 혹은 구세학당이라고 불렸졌던 이 학교는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이어 간호원으로 내한한 엘러즈(Annie J. Ellers)는 언더우드가 설립한 학교의 부대사업으로 여자교육사업에 착수하였다. 그가 병으로 말미암아 차질이 빚자 한때 헤이든(Mary E. Hayden)이 맡았다가 1890년 도티(S. A. Doty)에 의해 비로소 학교 체제를 갖추어 뒤에 정신여자중·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이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사학들은 기독교적 인물을 기르고 선교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지도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삼았지만, 개화운동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다.0233)白樂濬,≪韓國改新敎史, 1832∼1910≫(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137∼141쪽.

 또한 1885년 2월 고종은 알렌에게 국립병원 설립을 허가해 주어 廣惠院이 만들어졌다. 그후 1886년 3월 조선인들에게 의학을 가르칠 목적으로 알렌·헤론·언더우드 등이 교수진으로 참여한 국립의학교가 설립되었다. 여기에서는 실용의술을 비롯하여 물리·화학 등을 가르쳤으나 의학교로서의 구색을 갖추지 못하고 병원에서 필요한 일을 돕는 조수와 약국원을 양성하는 데 머물고 말았다.0234)白樂濬, 위의 책, 112∼128쪽.

 마지막으로,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던 郵政사업은 내무부가 工作司 예하에 電報局을 설치하여 근대적인 전신시설을 설치함으로써 재개되었다. 1885년 6월 청국이<朝鮮電線條約>을 맺어 漢城電報總局(일명 華電局)을 설치하고 서울·인천간과 서울·평양·의주간의 이른바 西路電線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청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西路電線을 가설하려고 하자 내무부는 조선측의 電務委員을 파견하여 이를 감독하도록 지시하였다.0235)내무부는 서로전선이 가설되자 부호군 李容稙을 電線大員으로 임명하여 淸國派員과 함께 檢飭케 한 데 이어 李應相·姜泰熙·尙澐·朴喜鎭 등을 電務委員으로 임명하였다.≪日省錄≫, 고종 22년 8월 9·19일. 그러나 서로전선은 청국의 차관을 도입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청국이 그 관할권을 장악하게 되었다.0236)金正起,<西路電線(仁川-漢城-義州)의 架設과 反淸意識의 形成>(≪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800∼805쪽.

 이에 대해 일본은 청국의 서로전선 가설이 조일간에 체결된 바 있는<釜山口設海底電線條約>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면서 서울·부산간의 전신가설을 요구하였다. 이에 1885년 11월 정부는 일본과<부산구설해저전선조약 속약>을 맺고 서울·부산간의 남로전선을 착공하게 되었다. 이 전선공사는 청국이 대행하였으나 지연되었기 때문에 정부가 朝鮮電報總局을 설치하여 직접 가설에 착수하였다. 정부는 독일의 世昌洋行으로부터 기채하여 기구를 구입하고 영국인 기사 핼리팩스(T. E. Hallifax)로 하여금 노선을 측량케 한 뒤 착공하여 1888년 5월말에 남로전선의 준공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정부는 남로전선을 독자적으로 주관하여 가설·운영하였기 때문에 업무상의 규정에 있어서도 서로전선의 경우와는 달리 전신규정을 새로 마련하여 사용하였다. 그리하여<국내전보규칙>의 전신을 이루는 우리 나라 최초의<電報章程>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때 모르스부호를 한글로 제정한 ‘國文字母號碼打法’이 오늘날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아울러 정부는 자주적으로 전신을 가설하고 관리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이를 위해 1888년 말경 정부는 청국에 서로전선의 관리권 반환을 요구한 데이어 그 이듬해 5월에 프랑스로부터 200만불의 차관을 얻어 청국의 차관을 상환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정부는 외교고문관 데니의 의견에 따라 남로전선을 연장하여 서울·원산간의 북로전선을 가설하고, 이를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전선에 연결시키려는 계획 아래 전신기재를 구입하기도 하였다. 이는 북로전선이 개통될 경우 일본 및 상해 등지에서 유럽과 미국 방면으로 발송되는 전신은 인도방면을 우회하지 않아 이익을 얻게 될 것이고, 또한 청국의 지배 아래 있는 서로전선도 자연히 중요성이 반감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추진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역시 청국의 반대로 착공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891년 2월 청국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외국의 전선과 접속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의<朝鮮北路電線條約>을 체결한 뒤에야 비로소 착공되어 그해 6월 완공되기에 이르렀다.0237)林明德, 앞의 책, 227∼234쪽.

 이상으로 미루어 볼 때, 내무부는 서양의 근대적 문물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그 산하에 개화·자강추진기구들을 설립·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내무부가 주전·개광 등을 통해 확보한 재정 가운데 그 일부를 연무공원·육영공원·종목국·전보국 등을 설치하는 데 투자하여 자주적으로 ‘富國强兵’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정책들은 전통적인 정치·사회질서를 유지한 채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데 머물렀으며, 그나마 청국의 간섭과 정책담당자들의 무능, 그리고 재정의 빈약 등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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