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1. 개항 후의 국제무역
  • 2) 국제무역의 추이(1876∼1894)
  • (3) 청·일 경쟁무역기(1883∼1894)

가. 청의 해관 주도와 일본 제일은행의 침투

 일본의 독점무역은 1882년「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조미수호조규」, 그리고 1883년 이후 영국·독일·러시아 등 서구 열강들과 체결한 통상조약들에 의하여 종언을 고하였다. 이어서 1883년 6월 이후 인천·원산·부산 순으로 해관이 설치되고 관세를 징수하기 시작하면서 무관세무역 역시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0280)김순덕,<1897∼1905년 관세정책과 관세의 운용>(≪한국사론≫15집, 서울대 국사학과, 1986), 267쪽.

 조선정부는 관세 수입을 근대화정책의 자금으로 활용하려 하였으나 해관을 설치하기도 전에 관세를 담보로 청·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함으로써 해관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더욱이 청은 묄렌도르프를 조선해관의 총세무사로 고빙하게 하여 일본의 해관 침투를 봉쇄하고 이를 통해 청의 경제적 진출을 용이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는 청국상인의 활동에 하등의 혜택을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1884년 2월 해관업무의 핵심인 관세 징수 업무를 겨우 2만 4천원의 차관을 제공한 일본 제일은행에 위탁 양도함으로써 청이 우려한 일본의 해관 침투를 허용하였다.

 1884년 말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청의 이홍장은 조선에 대한 속방화 정책을 강행하면서 상권 확대의 일환으로 조선해관을 청국 해관에 통합하기 위하여 묄렌도르프를 해임하고 청국 해관의 총세무사 하트(Robert Hart)의 직속부하인 메릴(Henry F. Merill)을 임명하게 하였다. 그러나 하트와 이홍장의 이해관계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았다. 하트는 일본이 획득한 해관세징수권까지 장악함으로써 조선해관을 완전히 청국 해관에 통합하려 한 반면, 이홍장은 관세 수입의 관리권을 영국인 통제 하에 둘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 제일은행은 해관세 징수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고, 조선정부에 대해 계속적인 단기차관을 제공하면서 일본의 경제적 침투의 든든한 교두보가 되었다.

 조선은 1889년 이래 고종 주도하에 새로운 외채를 끌어들여 청국 차관을 상환함으로써 청으로부터 해관의 인사·운영권을 회수하는 한편, 은행을 설립하여 일본으로부터 해관세 징수권을 회수하여 해관의 자주권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알렌·데니·메릴 등 고용 외국인을 통한 차관 도입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모두 청의 조직적인 해외 방해운동으로 인하여 좌절되었다.

 최종적으로 1890년 데니의 후임으로 내무부협판에 임명된 르젠드르(C. W. LeGendre)가 적극적으로 전개한 다섯 차례의 차관 교섭도 모두 좌절되었다. 청은 이를 계기로 1892년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관세 수입을 담보로 20만냥의 차관을 또 다시 제공하여 해관에 대한 관리권과 해관세의 선취권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조선 관세의 예속화, 즉 조선 재정의 예속화를 심화시켜 1894년 청일전쟁까지 조선 해관은 청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0281)김순덕, 위의 글, 294∼300쪽.

 청이 해관의 인사·운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반면, 일본 제일은행은 해관세 징수 업무를 통하여 일본의 경제적 진출과 일본상인의 무역활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894년까지 조선에 지점을 설치한 은행은 제일은행(1878), 제18은행(1890), 제53은행(1892) 등 3개였지만, 이중 제일은행은 자본축적이 미약한 단계에 있었던 일본자본주의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략을 하는 데 선봉을 맡고 있었다.0282)제18은행·제53은행의 조선에서의 금융활동은 1894년까지 극히 미미한 것으로 나타난다(高嶋雅明, 앞의 책, 240∼247쪽). 이 은행은 부산(1878), 원산(1880), 인천(1883), 한성(1887) 등에 지점 또는 출장소를 설치하여 일본인의 무역·상업 금융은 물론 1886년부터는 일본정부와의 위탁계약 하에 조선산 금 매입으로 조선의 부를 유출시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0283)村上勝彦,<植民地>大石嘉一郞 編,≪日本産業革命の硏究≫(下)(東京;東京大學出版會, 1975) 下. 정문종 역,≪식민지≫(한울출판사, 1984).

 그러나 제일은행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침략의 선봉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자본력의 견실함에 있었다기보다는 일본 및 조선정부의 예금을 취급하고 있었던 점, 조선 해관세 취급특권을 획득했던 점, 이를 바탕으로 한 조선정부에 대한 소규모차관의 지속적인 공여 등 다른 일반은행에는 없는 특별한 신용창조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1884년에 획득한 조선 해관세 취급특권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해관세 취급특권은 일본 제일은행에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신용 창조 능력을 가져 왔다. 첫째 조선해관세 취급 자체가 그에 대한 이자 부담이 전혀 없고 오히려 수수료를 받는 유리한 사업이었다는 점(처음에는 해관세 취급액의 0.25%, 1887년의 제2차계약 때는 5%), 둘째 해관세라는 가장 확실하고 안정적인 예금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 셋째 해관세를 수납하고 그 대신 납세자에게 발행한 예탁어음이 은행권과 유사한 기능을 하며 유통되면서 일본상인이 발행하는 ‘韓錢於音’의 신용도를 제고시켰다는 점 등이다.0284)村上勝彦, 위의 글(국역본), 59쪽.

 이같은 제일은행의 금융적 지위로 인하여 관세 수납 화폐로서 일본화폐가 유통하게 되고 이에 의해 일본상인의 무역·상업활동이 엄호되었다. 나아가서 1900년 전후 조선정부가 화폐제도 수립을 위해 열강들과 차관 교섭을 할 때마다 제일은행은 해관세 취급은행이라는 기득권을 이용하여 해관세를 담보로 설정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조선정부의 화폐정책을 저해할 수 있었다.

 당시 해관세는 수출세·수입세·톤세를 합쳐서 1885∼1894년간 총계로 약 343만원 정도의 거액으로서0285)김순덕, 위의 글, 312쪽의 통계에 나오는 관세액을 통산한 액수임. 조선정부에 실로 중요한 재정수입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관세 취급권을 겨우 2만 4천원의 단기차관의 대가로 제일은행에 넘겨 줌으로써 이상과 같은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허용하게 만든 것이다.0286)≪韓國ニ於ケル第一銀行≫(東京:第一銀行, 1908), 5∼26쪽. 게다가 제일은행이 예금으로 확보한 해관세 등 공금예금은 단순히 조선정부의 요구에 의해서만 지출되는 부동자금이 아니라 자본력이 취약한 일본상인들의 상업·무역 자금으로 유용됨으로써 일본상인의 조선상인에 대한 자금적 지배를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하게 되었다.0287)이는 1897년 일본상인들의 일본정부에 대한 진정서 내용 중 “관세 및 기타 공금이 (조선:필자) 탁지부에서 제일은행 등에 예입된 것은 거의 100만 엔에 달하고 이 금액의 대부분은 일한무역의 운전자금으로 이용되어 널리 각지에서 유통되고 있다”(≪京城府史≫제2권, 663∼664쪽)라는 고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몇몇 유력한 일본상인을 제외하고는 이 일본은행으로부터의 자금 융자에 바탕해서 무역·상업자본을 마련했던 것이고 이러한 자금이 ‘곡물수출·면제품수입 구조’에 편입되어 가던 조선상인들에게 주로 곡물 구입을 위한 선대자금으로 대부되어 금융 연쇄 체제를 형성하고 일본인들의 곡물수출과 내지행상을 촉진하였다. 이것이 곧 농촌에서의 미곡 상품화 진전 및 토착수공업의 파괴로 귀결되면서 지주경영의 강화와 소농민·소상인의 성장 가능성을 억압했음은 물론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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