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1. 개항 후의 국제무역
  • 3) 외국 상인의 침투와 조선 상인층의 대응
  • (1) 일본 독점무역기(1876∼1882)

(1) 일본 독점무역기(1876∼1882)

 미국·청국·영국 등과 수교하기 전의 시기였으므로 이 시기에 조선의 개항장에 들어온 것은 오로지 일본상인들 뿐이었다. 개항으로 종래 조선 왕래에 가해지던 제한이 해제되었지만, 자본력있는 일본상인이 대거 조일무역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상인은 조선이라고 하면 ‘호랑이가 숨어있는 황야와 같이’ 인식하고 있어서 일본정부가 무역에 종사하라는 권유를 해도 응하는 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자본·선박의 대여, 조선항로의 개설, 사금의 우선 매입 등 보호정책을 제시하면서 澁澤榮一·大倉喜八郞·高須謙三 등 유력상인에게 조선무역 종사를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0297)姜德相, 앞의 글, 1∼2쪽.

 이렇게 하여 이들 유력상인을 필두로 하여 일본인들이 조선에 쇄도하기 시작하였지만, 다음<표 5>에서 보듯이 일본인의 조선 거류는 1879년 이후에야 급증하기 시작한다. 이를<표 1>의 무역통계 추이와 연관지어 보면, 1879∼1880년부터 쌀 수출이 급증하면서 무역량이 확대되는 것과 시기를 같이 하는 것이다.

  부 산 원 산 합 계
호 수 인 구 호 수 인 구 호 수 인 구
1876   82(200)       82(200)
1877   (332)       (332)
1878   (700)       (700)
1879   700(1,150)       700(1,150)
1880 402 2,066(2,066)   235(209) 402 2,301(2,375)
1881 426 1,925(1,926)   281(300) 426 2,206(2,226)
1882 306 1,519(1,952)   260(281) 306 1,779(2,233)

<표 5>1876∼1882년 개항장의 일본거류민 추이

*출전:①손정목,≪한국개항기 도시변화과정연구≫(일지사, 1982), 106, 123쪽. ②姜德相, 앞의 글, 2쪽.
*주:손정목의 통계와 姜德相의 통계는 자료 출처가 다른 관계로 차이가 나므로 姜德相 글의 수치는 ( )안에 넣어 처리하였다.

 부산항의 경우 개항 당시에는 東京의 거상인 三井組·小錦組를 위시하여 大池忠助·大倉喜八郞·迫間房太郞·香椎源太郞 등 쟁쟁한 유력상인도 끼어 있었으나 일본상인의 대부분은 자국의 근대화과정에서 밀려난 영세상인이거나 중상주의적 약탈무역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준 일본정부에 의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투기상인·모험상인들이었다.0298)임승표,<개항장거류 일본인의 직업과 영업활동>(≪홍익사학≫제4집, 홍익대학교, 1990), 163쪽.

 이들 일본상인은 조선에서 매매가격의 표준 등이 거의 혼란한 상태라 1백엔 가격의 수입품이 의외로 1천엔 가격으로 뛰고, 일본배 한 척의 적하량으로써 1만 엔의 엄청난 이득을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일확천금의 폭리를 탐할 수 있었다. 또 ‘요즈음 한인들이 물건을 팔 경우 그들이 10냥이라고 말하면 우리(일본상인:필자)는 7냥으로 값을 깎는다. 그가 듣지 않을 때는 대갈일성하며 즉시 주먹을 들어내리면 그는 7냥에 방매한다’라든가, 조선 도량형이 일정하지 않음을 이용하여 크고 작은 두 개의 됫박으로 사기치는 사건이 빈발했지만 모두 영사재판권의 비호하에 처리되고 조선측은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0299)姜德相, 앞의 글, 2쪽.

 그러나 이 시기까지 일본상인의 활동 범위는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개항 초 일본상인의 활동 범위는 거류지로부터 사방 4km로 한정되어 있었다가 1882년 7월의「조일수호조규 속약」에 이르러서야 사방 20km로, 1884년부터 사방 40km로 확장되었으므로0300)≪高宗實錄≫, 고종 17년 7월 17일. 일본상인은 개항장이 아닌 포구나 내륙지방으로 들어가 직접 수출입품을 거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수출입무역에 종사하는 내외국 상인을 상대로 매매를 주선하는 새로운 유통조직으로서 개항장객주가 출현하였다. 개항장객주는 내륙의 생산지나 소비지의 객주와 마찬가지로 위탁매매, 외국상인과 조선상인이 발행한 어음의 인수 및 할인 등 금융업무도 하였으며 독자적으로 상업활동을 전개하는 경우도 있었다. 배를 이용하여 상업행위를 해 오던 船商도 집산지의 포구에서 포구객주를 통해 구입한 상품을 개항장으로 수송해 외국상인에게 팔거나 수입상품을 외국상인에게서 구입할 때 이들 개항장객주의 주선을 거쳐야 하였다.0301)이병천,<거류지무역기구와 개항장객주>(≪경제사학≫제7호, 경제사학회, 1984), 52∼79쪽. 따라서 개항장에서의 거래는 다음과 같이 여러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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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876∼1882년간 수출입품 매매경로
<그림 1>1876∼1882년간 수출입품 매매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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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다단계 수출입 구조 하에서는 일본상인들의 매매 이윤이 적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본상인들은 가능한 한 개항장객주의 중계를 거치지 않고 제한된 활동범위를 넘어 불법적으로 내륙지방에 들어가 곡물을 유출하거나, 조선인에게 자금을 대여하여 곡물을 매집해 오게 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879년에는 일본상인들이 조선상인들과 사전연락 하에 범선으로 조계지 밖인 동래 북쪽의 機張에 불법 침투하여 쌀 수백 석을 매입하다가 발각되었으나 조선인만이 즉시 사로잡혀 투옥되었던 사실이 있다.0302)김경태,<개항과 미곡문제의 구조>, 앞의 책,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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